새 빨간 고백

크리스마스이브날, 정보국 요원이 되다.

by DesignBackstage

사십 명의 직원들 이름이 익숙해질 즈음, 또 다른 이름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각 파트에 비슷한 시기로 인원이 보태지면서, 이름이 조금씩 헷갈리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직함으로 부르는 일이 더 잦지만, 중요한 업무를 지시할 때만큼은 이름과 직함을 함께 부르게 된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줄 때, 나는 비로소 존재로 호명된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김춘수의 「꽃」처럼 말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사회 초년생 시절, “어이, 신입. 여기 좀 와봐!”라는 말에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여기저기 불려 다녔다. 대부분은 서류를 전달하거나, 택배를 찾거나, 간단한 의견을 묻는 정도의 가벼운 업무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선배가 나를 불렀다. “○○ 씨, 내일 회의 자료인데요. 10부만 출력해서 회의실에 준비해 주세요.” 그녀는 파일을 건네며 사무적으로 말했다. 상냥하지도, 그렇다고 강압적이지도 않은 무미건조한 말투였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팀의 사소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받은 업무지시는 상당히 무겁고 중대한 일을 넘겨받은 것처럼 느껴졌다. 처음으로 ‘어이, 신입’이 아닌 내 이름으로 받은 첫 업무였기 때문이다. 열 장이 넘는 회의 자료를 출력하고 한참을 망설였다. 이 자료들을 엮기 위해 스테이플러를 가로로 집을지, 세로로 집을지, 사선으로 집을지 고민하다가, 기존 다른 자료들은 확인 후 똑같이 사선으로 집었다. 회의실 테이블 위에 자료를 올려놓을 때도, 간격을 맞춰 하나하나 가지런히 놓았다. 그 과정에서 내가 이전보다 조금 더 신중해졌다는 걸 느꼈다. 아마 그날은 처음으로 내가 이 팀에 소속되었다고 느낀 순간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회사에서 내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소속감이 커질 뿐 아니라, 상대의 말에 집중도가 확 올라간다. 그래서 내가 처음 S마트에 왔을 때도 직원들 이름을 외우는 걸 가장 먼저 한 일이었다. 하지만 최근 이십여 명의 직원이 대거 충원되면서 이름을 기억하기가 어려웠다. 사무직이 아니라 다들 바삐 움직이는 현장직이다 보니 가만히 얼굴과 이름을 새길 시간이 부족했다. 그렇게 며칠 동안 고민을 하다 연말 이벤트 관련 회의를 했다. 다들 연말 파티 품목 배치에 대한 의견이 오갈 때, 나는 직원들에게 크리스마스 분위기 연출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매장의 분위기를 바꾸는 가장 큰 힘은 직원이 고객을 맞이하는 태도인걸 알기 때문에.


너무 과도한 연출이면 부담스럽거나 거부감이 들 수 있을 테니, 작게 웃음정도 지을 수 있는 포인트가 좋을 것 같았다. 고속터미널 꽃시장 옆 크리스마스 부자재 코너를 돌며 적당한 사이즈의 존재감 있는 니트로 짠 빨간 산타모자를 찾았다. 모자에 글루건으로으로 브로치 집게를 달면서 생각했다. '직원들이 하기 싫다 하면 이 모자들은 다 어디서 써야 하나' 소심한 생각이 들었다.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며 시선을 뺏은 뒤 명찰옆에 브로치를 달아주기로 치밀하게 전략을 세웠다. 그리고 명찰의 이름을 스캔하며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면 미션성공인 것이다.


크리스마스이브 당일, 나는 007 제임스 본드처럼 주변을 살폈다. 이번 미션의 핵심은 직원들의 컨디션을 파악하는 일이었다. 업무가 과중해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자연스러운 스몰토크를 시도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은 역시 식당 배송이 몰리는 시간이었다. 모두의 카트 주행 속도가 눈에 띄게 빨랐다. 이럴 때 끼어드는 건 금물이었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각자의 업무 흐름을 지켜봤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얼굴에 조금씩 활력이 돌아왔다. 지금이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미션을 성공시킬 수 있는 타깃을 찾는 게 중요했다. 첫 성공이 다음으로 이어질 자신감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커피를 마시고 기분 좋게 들어오는 A대리가 첫 타깃이 됐다. 평소에도 웃음이 많고 긍정적인 성격이라
반응이 좋을 거라는 예상이 섰다.

대리님, 제가 뭐 하나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했어요.
어머, 너무 귀여운데요?

자연스럽게 크리스마스 계획을 물으며 명찰 옆에 산타 모자를 달았다. 미션 성공. 순간, 내가 원주 정보국의 비밀요원이 된 것만 같았다. 첫 성공의 여세를 몰아 60명의 직원 모두에게 브로치를 달아줬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브로치는 한 번에 잘 끼워지지 않았다. 덕분에 직원들과 자연스럽게 짧은 1:1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연말 분위기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는 상투적인 이야기부터, 십여 년을 이곳에서 일했지만 이런 깜찍한 이벤트는 처음이라는 말도 들었다. 퇴사를 앞둔 직원에게는 그동안 고마웠다는 인사도 함께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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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모두의 가슴에 새빨간 산타 모자가 하나씩 달렸다. 푸른 유니폼 위에 찍힌 작은 빨간 점들이 멀리서 보니, 그 풍경은 마치 007 영화 속 보안 장치의 레이저처럼 보였다. 점들이 보이지 않게 이어져 공간 전체를 하나의 선으로 묶고 있는 듯했다. 각자 다른 자리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그 빨간 점들은 우리를 같은 편으로 연결하고 있는 듯했다. 평소 현장에서 바쁘게 일하는 직원들을 따로 불러 깊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 잠깐의 순간 동안 우리는 눈을 마주치고, 서로의 이름과 얼굴을 또렷이 기억하게 했다. 그들이 S마트에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내 마음이 전해졌기를 바랐다. 그리고 나의 새빨간 고백이 성공적이었다는 걸, 비로소 다음날 마트 광고 촬영 현장에서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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