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등이다!

2026년 을 맞이하며

by DesignBackstage

몸만큼이나 마음이 분주하게 움직인 하루였다. 한해의 마지막날. 새로운 광고업체와 신년맞이 광고 촬영을 하는 날이었다. 광고의뢰를 한 다음날 서울에서 원주까지 달려온 담당자는 마트를 구석구석 꼼꼼히 보고 여러 제안을 했다. 생동감 있는 모습을 담기 위해 수산팀에서 생선을 잡는 모습과 정육팀에서 통째로 들어온 고기를 하나하나 부위별로 손질하는 장면을 촬영했다. 육사시미를 뜨던 정육팀장은 고기의 단면이 더 잘 보이는 각도를 제안하기도 했고, 수산팀에서 생선을 잡을 땐 펄떡이는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생선을 담은 뜰채를 흔들며 활어가 더 팔딱거리게 부추겼다. 적극적으로 손을 보태준 직원들에게 두 엄지를 들어 올리고 앞뒤로 흔들어댔다. 내 엄지도 그날은, 펄떡이던 활어처럼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브런치 연제 17화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 새빨간 고백에 뒤늦은 답을 들은 느낌이었다. 새해를 앞두고 일정이 빡빡하다. 신년맞이 세일 광고와 프로모션을 시작으로 외관도 새롭게 단장할 계획이다. 식자재 마트에서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잡화 코너를 보완하기 위해, 마트 옆 별도의 공간에 새로운 매장도 준비 중이다. 2026년 원주에서 가장 열심히 준비하는 마트로, 매출 1등을 향해 해 볼 수 있는 일들은 모두 해보기로 했다.


광고촬영과 신년계획서를 모두 정리하고 퇴근을 준비하는데, 허기짐을 넘어선 묘한 공허함이 찾아왔다. 단순하고 직관적인 맛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초코파이 한 상자를 사들고 퇴근했다. 퇴근길 차 안에서 초코파이 세 개를 순식간에 해치웠다. 초콜릿으로 코팅된 도우와 마시멜로우가 입안에서 엉키며 퍽퍽한 식감과 말랑한 질감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마치 2025년을 잘 마쳤다는 위안과, 2026년은 더 잘될 거라는 기대가 겹친듯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한 해가 달달하게 마무리됐다. 집에 와서 긴장이 풀렸는지 가방과 겉옷을 내던지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아이들은 모두 학원에 가 있어 고요한 집이었다. 나도 모르게 잠시 눈이 감겼다.


엄마! 나 1등이야!!

평소 톤이 높지 않은 둘째 아이의 하이톤 환호가 들렸다. ‘1등’이라는 말은 꿈속에서도 참 좋았다. 현실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잠깐 눈을 감고만 있었던 터라 아이가 학원에서 돌아올 시간이 아니었다.

엄마, 1등이라고!

현실감 없는 소리에 눈을 깜빡이다, 나는 다시 잠에 빠졌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내 팔을 붙잡고 흔들며 소리쳤다. ‘뭐지, 꿈이 아닌가?’ 게슴츠레 뜬 눈앞에 ‘1등’이라 적힌 작은 쪽지를 들고 서 있는 아이가 보였다.

학원에서 돌아온 아이는 소파에 내팽겨져 있던 초코파이를 먹다가 과자 상자 겉면에 붙어 있는 이벤트 스크래치 쿠폰을 발견했다. 그리고 은박으로 씌워진 그 부분을 동전으로 긁었는데 1등에 당첨됐다는 것이다. 난생처음 경험한 1등이 자신의 노력 덕분이 아니어도 기분 좋은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예상치 못한 횡재라는 생각에 더 좋았을 것이다. 흥분한 채 나를 흔들어 깨운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내가 상상했던 종류의 1등은 아니어서 감정의 곡선은 올라갔다가 멈췄지만, 덩달아 기분이 꽤 좋았다. 그런데 쿠폰을 아무리 살펴봐도 경품이 무엇인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뒷면에 덩그러니 적힌 한 문장이 보였다. ‘마트 직원에게 문의해 주세요.’ 출근할 때까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롯데웰푸드 홈페이지에 들어가 이벤트 코너를 뒤졌다. 하지만 진행 중인 경품 이벤트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비슷한 이름의 지난 이벤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 경품을 확인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숨이 멎었다. 무려 롯데 시그니엘 숙박권이었다. 만약 정말 지난 이벤트였다면, 제조일자가 얼마 되지 않은 상품에 왜 이벤트 쿠폰이 붙어 있었는지 따져 물어야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롯데웰푸드에 문의했다. 돌아온 대답은 실망스러웠다. 본사에서 진행한 이벤트가 아니라는 것이다. 롯데웰푸드 원주지점에서 자체적으로 진행한 이벤트라는 것이었다.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대리점에 문의했다. 대리점 직원은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경품이 뭔지 알려주었다. 경품은 무려 '김치통'이었다. 그럼 도대체 2,3등 경품이 뭔지 궁금해서 물어보니 1등은 큰 사이즈 김치통, 2등은 중간사이즈 김치통, 3등은 작은 사이즈 김치통이라고 했다. 11월 김장시즌을 앞두고 대리점에서 진행했던 이벤트였다. 롯데 시그니엘에서 우아하게 조식을 먹는 상상을 하던 나는 그날 하루아침에 S마트에서 가장 큰 김치통을 받는 사람이 되었다.


한 해의 마지막 날, 나는 1등이 됐다. 기대와는 달랐지만 웃으며 한 해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26년에는 정말 1등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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