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우리는 늘 용기를 내고 있을지도.
죽을힘을 다해 나를 일으켜 세워 들쳐업고는, 있기는 한 걸까 늘 의심하게 되는 그곳을 향해 겨우 한 발 한 발 내딛습니다. 그러다 매서운 폭풍우에 아니면 무서운 동물들의 습격에 또 아니면 그저 스쳐 가는 바람 한 점에도 전부 무너져내리고 다시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지금까지도 수없이 떨어졌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삶이 그렇다는 것을 이제는 잘 알고 있습니다.
보통 저는 글을 씁니다. 글을 쓸 때만은 오롯이 있는 그대로의 내가 되어 정직해지고, 친절해지고, 따뜻해지고, 밝아집니다. 미워하는 모습들도 그런대로, 투명하게 정면으로 바라보며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바닥이 끝이 없어 보일 때는, 글을 쓰는 것도 다 부질없어 마냥 내려놓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그런 잠식에서 벗어나려 애를 쓰는데, 요즘은 필사에 열심입니다. 읽으면 되지 굳이? 라고 생각했었는데, 팔이 아프게 꾹꾹 눌러쓰며 읽어내려가다 보니, 그 내용이 온전히 내 것이 되는듯한 기분 좋은 느낌이 들어서 참 좋습니다.
최근 필사하는 책은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이라는 영국 작가의 이야기입니다. 길을 잃은 소년이 숲속에서 동물들과 함께 나아가는 여정은, 얼핏 보면 동화책이 아닌가 싶을 만큼 그림과 짧은 대화로만 이루어졌지만, 그 어떤 성인 소설보다 깊은 여운과 진한 감동을 안겨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치 저의 삶을 꿰뚫고 있는 것과 같은 빛나는 말들에 속절없이 마음이 아려온다고 할까요.
“네가 했던 말 중 가장 용감했던 말은 뭐니?”
소년이 물었어요.
“도와줘, 라는 말.” 말이 대답했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진정으로 수용받은 적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까닭에 평생 가면을 쓰고 살아온 저입니다. 남한테 못나거나 약한 모습을 보이거나 진짜 나의 본모습이 드러나면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에, 도와달라는 말을 하다니요. 그건 내가 못한다고, 약하다고 바로 인정하는 셈인데,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동안의 저에게는 말입니다.
어떻게 살아왔던 걸까요, 나란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나는 사랑이나 존중받을 가치가 없으므로, 단 한 번도 내 편을 가져본 적이 없다고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습니다. 부끄러운 있는 그대로의 내가 드러날까 늘 아등바등 동동거리며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애를 쓰며 살아왔음에도, 내가 이룬 과정이나 성취에 당당한 적이 없습니다. 마음 한편은 언제나 안달하고 조바심내고 불안했었습니다.
“가야 할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았어.” 소년이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래. 하지만 우리가 얼마나 많이 왔는지도 뒤돌아 봐.” 말이 말했습니다.
나름 성실하게 정직하게 살아왔음에도, 뭐가 그렇게 두려웠던 걸까요. 내가 얼마나 많이 걸어왔는지, 어떻게 해냈는지 누군가의 표정을 한번 살피는 것보다도 더 들여다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정도면 잘한 거야, 수고했어. 같은 말들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 말들입니다. 그만큼 남에게 인정받기만을 바랐지, 자신을 뒤돌아본다거나, 나의 소중함 같은 거는 애초에 못 했던 것입니다.
“누군가가 널 어떻게 대하는 가를 보고 너의 소중함을 평가하진 마.”
“항상 기억해. 넌 중요하고, 넌 소중하고, 넌 사랑받고 있다는 걸. 그리고 넌 누구도 줄 수 없는 걸 이 세상에 가져다줬어.”
나만이 이 세상에 가져다줄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애증하는 부모님에게는 그래도 가장 귀한 딸, 둘도 없는 자매, 아이들에게는 세상 전부인 엄마. 너무 가까이 있어 그 소중함을 항상 묵살했던 나의 다른 이름과 역할들은 분명 특별한 빛을 반짝였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평생 타인이 날 어떻게 대하는지만 바라보며 나의 가치를 판단하며 살아왔을까요.
“시간을 낭비하는 가장 쓸데없는 일이 뭐라고 생각하니?”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일.” 두더지가 대답했습니다.
타인과 비교하며 살지는 않았다고 자부했습니다만, 모든 기준을 내가 아닌 타인에게 둔 것, 그 자체가 이미 비교였음을, 아까운 시간을 그렇게나 허비했다는 것을 삶의 중후반에 들어선 이제야 깨닫습니다.
“때로는…….” 말이 말했습니다
“때로는?” 소년이 물었어요.
“때로는 그저 일어서서 계속 나아가기만 해도 용기 있고 대단한 일 같아.” 말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짐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나마 짐을 가볍게 할 저마다의 방법들도 가지고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 책이 그러해 지금 이렇게 책을 집어 듭니다만, 음악이나 운동, 게임도 좋겠지요. 어떤 방법도 혹은 그저 아무것도 안 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만, 우리가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이미 용기 있고 대단한 일일 것입니다.
어쩌면 책을 읽는 것이, 이 글을 쓰며 나의 말을 하는 것이, ‘도와줘.’라고 외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는 글을 쓰고 싶다 했지만, 실은 나 좀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요. 책에게, 글에게, 타인에게 아니면 음악에게, 운동에게, 게임에게, ‘쉼’에게 한발이라도 내딛으려고, 우리는 사실 모두 용기를 내고 있는 것이라고요
그러니 우리 모두 저마다의 방법으로 이 시간을 또 살아봅시다.
그리고 우리의 용기는 절대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같이 믿어보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의 경우 지금은 보이지 않아도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분명 있었습니다.
그러니 우리 어디에 있더라고,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아니면 그저 이불속에 가만히 웅크리고 있더라도...
아니면 소리를 지르며 펑펑 울더라도...
그걸로 충분합니다.
“살면서 얻은 가장 멋진 깨달음은 뭐니?‘ 두더지가 물었어요.
”지금의 나로 충분하다는 것.“ 소년이 대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