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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 매거진 브릭스 Dec 23. 2017

미국보다 망원동

내가 사는 동네 같은 공간은 어디에도 없다

 나는 합정동에 살고 있는데, 우리 집 앞의 길 하나를 경계로 행정 주소가 망원동으로 바뀐다. 따라서 심리적으로는 거의 망원동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최근에 ‘망리단길’이라는 별명이 동네에 붙은 다음부터, 내 생활공간은 이른바 ‘뜨는 동네’가 되고 말았다. 혹시 이 문장에서 필자가 변화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고 느꼈다면, 그건 전적으로 이러한 별칭이 기획부동산 업자들의 자본주의적 욕망 때문에 붙은 탓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대명사가 돼버린 지금, 내가 사는 동네는 점차 공생할 수 있는 공동체 공간이 아닌, 치솟는 월세와 높아져가는 물가 때문에 결국은 모두가 떠나고 마는 멸망 직전의 공간으로 변하고 있다.



 생활자 중의 한 명으로서 직접 느끼는 변화는 하루가 다르게 가게들이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오래된 사진관은 하와이풍 술집으로, 역시 오래된 헬스클럽은 힙스터들이 사랑하는 카페로, 낡은 때가 잔뜩 묻어 있던 이발소는 퓨전 음식을 파는 식당으로 바뀌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식당과 카페의 등장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복잡한 심리가 개입되는데, 나 역시 이런 ‘팬시한 변화의 이익’을 즐기고 있다. 다만, 동네가 품어온 과거의 색채를 유지하는 공생의 변화를 바랄 뿐이다. 옛것 위에 새것을 더하는, 색채의 다양성 정도를 말이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어렵다는 걸 알지만 말이다.



 이러한 상황은 사실 거시적인 것이다. 역사는 거시적 관점에서 언급될 수 있지만, 일상은 미시적 관점에서 언급될 수 있다. 쉽게 말해, 내가 일상에서 매일 마주치는 건 이 동네를 관찰하러 온 관광객들이다. 왜 관광객이라 표현했느냐면, 언뜻 보기에는 분명히 서울시민 같은데 마치 해외여행을 온 듯이 카페 안에 들어와 쓰윽 둘러보고는 목에 건 DSLR 카메라로 셔터를 눌러대다 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이 무슨 예의 없는 행동이냐’ 할지 모르겠지만, 이게 내가 카페에서 글을 쓰다보면 심심찮게 겪는 일이다. DSLR 카메라가 아니면 스마트 폰으로 수단이 바뀔 뿐이다. 이들이 블로그에 올리는 ‘카페 투어 사진’ 속에 가끔 나도 끼어 있는 것 같은데, 그럴 때면 나는 그들이 촬영한 카페에 배치된 하나의 가구(혹은 치워버리지 못한 불쾌한 피사체)가 된 기분이 든다. 생물이 정물이 되는 순간이다. 이렇듯 나는 불편한 감정을 지닌 채 동네의 변화를 지켜봤다.





 그러다, 미국에 왔다. <위대한 개츠비>를 쓴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의 인생을 따라가는 기행문을 쓰기 위해 온 것이다. 이곳에 와서 첫 번째로 느낀 감정은 미국은 너무 불편하다는 것이다. 땅이 넓으니 다니기 불편하고, 어딘가를 찾아가면 그 때에는 너무나 지쳐서 무언가를 할 의욕이 사라진다(예컨대, 세 시간을 운전해서 목적지에 도착하면 취재고 뭐고, 그저 쉬고 싶은 마음 밖에 들지 않는다).


 게다가, 미국을 ‘자동차의 나라’라고 하는데, 전적으로 맞는 말이다. 좋은 쪽으로 말고 나쁜 쪽으로. 자동차가 없으면 어디에도 갈 수 없다. 이건 자동차 값이 싼 이 나라에서 자동차를 사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자동차를 끌고 나온다 해도 대도시에선 주차할 공간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첫 번째 취재지였던 LA에서는 그야말로 사막에서 우물을 찾는 심정으로 다녀야 했다. 할리우드나 베니스 비치 같은 붐비는 곳의 식당은 주차장이 없고, 도로변에 설치된 미터기 앞에 주차를 하려면 빈자리를 찾아야 하는데, 그 빈자리는 라디오 작가가 되려는 사람이 공석이 생기길 기다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라디오 작가 자리는 한 명이 죽어야 생긴다. 그만큼 자리가 나지 않는다).



 게다가 도로변에 주차를 할 수 있는 시간도 거리마다 제한돼 있고, 커브를 틀어야 하는 공간도 비워둬야 하니 실제로 주차를 할 수 있는 공간은 거의 없는 셈이다. 공영 주차장이 있지만 기본요금이 25달러씩이나 한다. 볼 일을 보기 위해 이런 주차장을 서너 번 들락거리면 100불이 금세 지출돼버린다. 금문교의 야경이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 샌프란시스코나, 스페이스 니들이 도시 한 가운데서 개성적인 기운을 펼치는 시애틀이나, 킹콩이 매달려 사랑을 하게 달라고 애원했던 엠파이어 스테이츠 빌딩이 있는 뉴욕이나, 어디건 간에 주차를 하려면 참전하는 심정이 된다. ‘차를 가져가지 않으면 움직이는 게 어렵고, 차를 가지고 나가면 주차하는 게 어려워’ 도무지 이 땅에서는 뭘 못 해먹겠다는 생각이 든다(다행히 뉴욕에서는 지하철 노선이 여러 군데로 뻗어 있어 그나마 쉽게 다닐 수 있다).


 주차만 참으면 되지 않느냐 한다면, 운전도 복잡하다. 좌회전은 비보호라 언제나 상대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 그러면 우회전은 편하게 하느냐면, 그 역시 아니다. 우회전도 도로에 따라 신호를 받아서 해야 하기에 운전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두통이 시작된다. 이렇게 한참을 걸려 가까스로 목적지에 도착해도 주차할 곳을 찾아 헤매야 한다. 같은 공간을 3~40분 정도 헤매다 보면 어느새 방광은 터질 듯이 화장실에 가겠다고 아우성을 친다. 비상깜빡이를 켜고 빈자리를 헤매는 운전자들과 눈이 마주치면 서로 먹이를 먼저 채어 가겠다고 으르렁거리는 하이에나의 심정이 된다.



 주차와 운전만 참으면 되지 않느냐 한다면, 기본 생활도 불편하다. 물 한 통 사려해도 편의점이 없으면 거대한 슈퍼마켓까지 차를 끌고 가서 넓은 매장에서 한참을 걸어 달랑 물 한 통을 쥐고 긴 계산대 앞에 서야 한다. 그럼 가는 김에 물뿐 아니라 다른 것도 왕창 사와서 갈 일을 줄이는 게 낫지 않느냐 묻는다면, 이래서 불필요한 소비가 늘어나는 것이고, 이래서 불필요한 음식을 사놓았기 때문에 이를 먹어치우느라 체중이 느는 것이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나는 방금 고작 빨래 좀 하겠다고 두 시간을 허비하고 왔다. 빨래를 하려면 동전 세탁기에 2달러 50전을 넣어야하는데, 2달러 25전까지 넣은 후 세탁기는 더 이상 동전을 받지 않았다. 투숙중인 호텔 로비로 가서 설명을 하자, 직원이 전문가를 보내준다고 했다. 기다림 끝에 온 전문가는 경비원이었다. 나는 어째서 경비원이 세탁기 전문가인가 의아했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그는 일단 내 안부를 묻고, 어디서 왔느냐 묻고, 그 다음 오늘 꼭 빨래를 해야 하느냐 묻고, 한참 후에 ‘이 세탁기는 동전으로 꽉 차서 더 이상 동전이 안 들어가니 내일 아침에 하는 게 좋겠다’고 결론 지었다.


 벽에는 기세 좋게 “신용카드로도 빨래를 할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지만, 아멕스, 비자, 마스터카드를 모두 수십 차례 그어보아도 꿈쩍하지 않았다. 게다가 객실은 9층, 세탁실은 3층, 로비는 1층에 있었서 세탁물을 들고 세탁실과 로비를 수차례 오가야 했다. 카드가 안 된다고 보고하고, 그 뒤에는 동전을 바꾸고, 그 다음에는 다시 세제 판매기가 없어서 또 로비에서 세제를 받고, 그 뒤에는 동전을 기계가 받지 않는다고 보고 하러 가는 동안, 계단은 이동할 수 없어(막혀 있다) 줄곧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야 했다. 이 모든 일이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는 일이었다.



 이런 경험을 하고 나니 다시 우리 동네가 떠올랐다. 비록 ‘망리단 길’이라는 독창성 떨어지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지만, 동네에서는 이런 불편을 겪을 일이 없다. 기본적으로 차를 가져갈 필요가 없는 동네다. 나야 주민이므로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가면 그만이고, 방문자들은 지하철을 타고 오면 그만이다. 역에서 누구나 걸을 수 있는 거리에 모든 게 있다. 주차는 싼 값에 공용 주차장을 이용할 수 있고(물론, 자리가 넉넉하진 않지만), 고작 빨래나 하고자 두 시간 동안 고장 난 세탁기 앞에서 허송세월할 필요도 없다. 이런 경험을 하고 나니 “There is no place like home(집과 같은 공간은 어디에도 없다)”이란 말이 떠올랐다. 이 문장을 이 글의 맥락에 맞게 변용하며 마무리 하겠다. “내가 사는 동네 같은 공간은 어디에도 없다.”


 아무리 부동산 업자들이 몰려와도, 카메라 셔터가 무례하게 터지더라도, 내가 사는 동네만한 곳은 없다. 다만, 변화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


 부디 함께 살 수 있게, 인간답게 변했으면 좋겠다.




글 최민석 / 사진 베르고트, 이주호

글쓴이 최민석은 소설가다. 주변에서 많은 조언을 들으며 살고 쓰고 있으며, 귀가 얇다. 쓴 책으로는 소설 <능력자>, <쿨한여자>, <미시시피 모기떼의 역습>, 에세이 <꽈배기의 맛>, <꽈배기의 멋>, <베를린 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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