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일, 달리기 누적거리 1000Km를 달성했다. 1000Km에 도달하겠다며 의지를 불태운 건 아니다. 그저 5Km, 6Km, 때론 10Km씩 그날 그날 달리기를 해낸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했는데, 그게 꾸준히 쌓여 1000Km라는 의미있는 기록이 되었다.
사실 1000Km가 어느 정도의 거리인지실감이 나지 않았다. 검색해보니 서울에서 부산까지 직선 거리로 388Km이고, 서울에서 베이징까지 직선 거리가 956Km라고 한다. 서울에서 내 고향 부산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고도 224Km가 남을 만큼 거리를 달려왔다니, 놀랍고 믿기지 않았다. 작은 것들이라도 오랜 시간 소중히 모으면 믿기 어려울 만큼 반짝이는 결과물이 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1000Km를 달리는데 걸린 시간은 20개월. 내가 첫 달리기를 했을 무렵 첫째가 23개월, 둘째가 4개월 아기였는데, 지금은 첫째가 42개월, 둘째가 23개월이 되었다. "엄마 안아줘.", "책 읽어." 등 짧은 문장으로 의사를 표현하던 첫째는 이제 자신의 생각을 또렷하게 말하고, 제법 동생을 챙기는 기특한 형이 되었다. 바닥을 기지도 혼자 앉지도 못했던 둘째는 잘 걷는 것을 물론이고 아기 킥보더가 되었다. 한 발을 높이 들고 속도를 즐기고, 내리막길에서도 발을 브레이크 삼아 속도를 줄이는 등 킥보드 타는 모습이 프로다. 공원을 가면 많은 사람들 시선이 둘째에게 쏠린다. "재 좀 봐.", "아기가 킥보드를 타네.", "너무 귀엽다." 라는 말이 들리면 덩달아 내 입꼬리도 흐믓하게 올라간다.
아기 둘을 키우면서 시간을 내서 달리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둘째를 낳은 후 처음 달리러 나갔던 날 기억이 생생하다. 남편은 한 손으로는 23개월 첫째 손을 잡고, 한 팔로는 울며 보채는 둘째를 달래며 현관에서 나를 배웅해주었다. "잘 달리고 와."라고 말은 하면서도 '안 가면 안돼?', '나 잘 할 수 있을까?'라는 듯 불안과 두려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던 남편. 세 남자가 걱정되고 마음이 쓰였지만 내 건강과 가족 행복을 위해 용기를 내야한다고 생각했다. 잘 다녀오겠다며 인사하고 현관문을 나섰는데 첫째까지 "엄마" 하며 크게 울음을 터뜨려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첫 날 이후에도 한동안 계속...
남편과 아이들은 내가 없는 시간 동안 차츰차츰 취향을 맞춰가며 '끈끈'해졌다. 처음엔 아이들이랑 놀아주느라 힘겨워하던 남편은 춤 추는 걸 좋아하는 장점을 살려 아이들과 춤을 추기 시작했다. 시작은 막춤이었는데, 요즘엔 셋이 싸이의 강남스타일, New Face, BTS의 Dynamite를 틀고 흥겹게 춤판을 벌인다. 내가 달리러 나가면 목 놓아 울던 첫째는 이제 아빠랑 바나나 괴물놀이 할 시간이라며 "잘 달리고 와."라고 시원스레 손을 흔들어준다. 남편이 둘째에게 "우준아, 엄마 좋아? 아빠 좋아?" 라고 물으면 해맑게 웃으며 "아빠!"라고 대답한다. 둘째는 어린이집을 다녀오는 시간 빼고는 늘 내 몸에 딱 붙어있는데, 백 번을 물어도 그저 아빠가 좋단다. 내가 없는 잠깐의 시간 동안 남편이 둘째에게 어떤 매력을 어필하는건지 신기할 따름이다.
아이들은 하프 마라톤에 도전하는 '엄마를 응원하는경험'도 했다. 한강은 햇빛을 받아 아름답게 반짝였지만 바람이 차갑고 매서웠던 11월의 어느 날, 남편이랑 아이들은 나의 첫 도전을 응원하러 광나루 한강공원까지 함께 와줬다. 첫째는 목에 완주 메달을 걸고 깜찍하게 웃으며 기념 사진도 찍었다. 결승선까지 1Km를 남기고 정말 눈물이 날만큼 힘든 순간 '두 아이들을 얼른 만나 뜨겁게 안아주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끝까지 달릴 수 있었다. 아이들이 기억하진 못하겠지만, 아이들이 크면 얘기해 줄 것이다. 엄마는 너희들이 아주 어릴 때부터 달리는 걸 좋아했고, 너희 덕분에 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엄마, 달려!"
첫째는 '유모차 라이딩'을 즐긴다. "어? 지금 달리라고. 짐이 많은데." 첫째에게 사정해보지만 돌아오는 말은 "달리라고. 달려. 달려."라는 힘찬 외침뿐이다. '저기, 얘들아 2인용 유모차에 너희들 몸무게, 짐까지 합치면 30Kg이 넘거든. 엄마 힘들어.' 라고 반항하고 싶지만 속으로 삼킨다. 조금 힘들지만 나도 달리는 걸 좋아하고 아이들도 원하니 힘을 내고 싶다. "알겠어. 꽉 잡으세요." 나의 단단한 외침과 함께 유모차 달리기는 시작된다. "와!" 첫째는 한껏 웃으며 속도를 즐기고, 둘째는 처음엔 무서워하더니 이젠 "이야!"하며 환호한다. 묵직한 유모차를 미는 게 쉽지 않지만 아이들의 반응에 나도 덩달아 신이난다.
달리는 걸 싫어하는 아이는 드물 것 같다. 아이들에게 달리기는 운동이 아니라 '놀이'다. 우리 아이들에겐 더욱 그렇다. 첫째는 치타가 그려진 점퍼를 입은 날은 특히 "나는 치타보다 빠르지."라고 외치며 수시로 달린다. 시호가 달리기 시작하면 나는 유모차를 밀고, 둘째는 킥보드를 탄 채 시호를 쫓아간다. 때론 내가 먼저 "엄마, 잡아보세요."하고 잡기 놀이를 시작한다. 그럼 시호랑 우준이는 짧은 두 발로 나름 속도를 내며 쫓아온다. 시호는 꽤 잘 달리고, 우준이는 아장아장하지만 팔 다리를 휘적휘적 저으며 50m 정도는 충분히 달린다. 달리는 두 아이들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함께 달리는 우리 얼굴엔 웃음과 즐거움이 피어난다.
일주일 전엔 처음으로 러닝앱을 켜고 첫째와 달리기를 했다. 올해 다섯 살이 된 첫째가 몇 분이나 달릴 수 있을지 궁금했다. 작고 보드라운 첫째 손을 꼭 잡고 함께 발을 맞추며 달렸다. 1분 쯤 달렸을까 첫째가 "엄마, 힘들어." 하길래, "그럼 더 천천히 뛰자. 우리는 할 수 있어."라며 속도를 늦췄다. 비탈길을 올라 흔들의자가 설치된 작은 공간을 지나 숲길을 달렸다. 아직 겨울이지만 나무와 풀에 봄의 기운이 깃들어 있는 듯 했다."엄마, 재밌어. 아빠는 이제 못 쫓아오겠지."라고 말하며 즐거워하는 시호 모습에 내 마음이 포근포근하고 행복해졌다. 그렇게 달린 시간은 5분. 더 달리고 싶었지만, 시호가 숲속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겠다고 해서 달리기를 멈췄다. 달린 시간은 중요하지 않았다. 둘이 손잡고 함께 달린 것만으로축제같은 시간이었다.
러너라면 누구나 만트라 하나 쯤은 가지고 있을 것 같다. 나는 달리면서 포기하고 싶을만큼 힘겨운 순간에 속으로 이 말을 외친다. '나는 할 수 있어. 나는 나를 믿어. 나는 시호, 우준이 엄마야.' 그리곤 나를 믿는 마음 하나로 목표한 거리를 최선을 다해 달린다. 달리면서 가진 태도는 삶으로 이어진다. 아이들과 함께 있으며 지치거나 힘든 순간에 "우린 할 수 있어."라고 말하며 힘을 낸다.
한 달 전쯤, 첫째가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어 하는데 밖에 비가 왔다. 내가 비가 와서 아이스크림 사먹으러 가기 어렵겠다고 말했더니 첫째가 내게 단단한 눈빛으로 말했다.
엄마, 우린 할 수 있어.
심장이 '쿵'했다.삶에 대한 내 태도와 말이 아이에게 스며든 것 같아 감동이 밀려왔다. 물론 첫째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은 마음에 그런 말을 했겠지만, 내겐 어려움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는 자세와 용기로 느껴져서 너무 좋았다.
육아맘 러너가 된 지 20개월. 우리 아이들이 달리기를 좋아할 뿐 아니라, 내가 달리기로 얻은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와 에너지, 끈기 있는 자세가 아이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 기쁘다.나는 아이들과 함께 국내 마라톤 대회에도 참가하고, 해외 여행을 가서 여행 중 이벤트로 그 지역 마라톤에도 함께 참여하고 싶은 꿈이 있다. 아이들이 조금 더 크면 아주 천천히 달리는 시간을 늘려보려고 한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마라톤 출발선에 함께 선 나와 아이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남편도 원하면 같이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