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정, 시간을 건너는 감각》

A Pavilion of One’s Own – 2025년 버전

by 매체인간

공간 사이를 이동한다는 것.

그것은 단지 지리의 문제가 아니다.

공간 이동은 에너지의 소모이며, 시간을 흘려보내는 의식의 과정이다.


서울에서 춘천까지 두 시간 남짓.

바퀴의 발명과 도로라는 기술의 흔적을 따라 이동한 나는, 그 하루가 감각의 진화였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경춘가도를 따라가다 문득, 차창 밖으로 흐르는 강물과 숲의 명료한 선들에 이끌려 네 바퀴를 멈추었다.

자동차는 강철의 육체이자, 내 안의 무뎌진 감각을 깨우는 기계적 욕망이었다.

예전엔 그것을 무심코 ‘게으름의 기계’라 부르곤 했지만, 이 날만큼은 달랐다.

정밀한 이동은 상실된 감각을 되살릴 수도 있다는 사실. 나는 그것을 춘천에서 배웠다.


의암댐 근처, 산 중턱의 하얀 산장이 강과 산 사이를 점유한 채 고요히 앉아 있었다.

질투했다. 그 집주인의 뻔뻔한 안온함을.

그러다 문득, 그렇게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하나의 용기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결국 나는 소양정을 향해 봉의산 자락을 올랐다.

차를 세우고 200미터쯤, 이윽고 드러나는 누각.

소양정은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 자리에 고요히 있었다.

이 정자가 이곳에 놓인 이유를, 나는 한눈에 이해했다.

강과 산, 마을과 마을 사이에 자리한 이 누각은 차를 마시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차를 마시는 존재를 감각하도록 돕기 위해 존재한다.


소양정은 본래 ‘이요루(二樂樓)’라 불렸으나, 조선 순종대에 이르러 소양정(昭陽亭)으로 개칭되었다.

이름은 바뀌었지만, 물과 산의 경계에 놓인 감각은 그대로였다.

한때 강변 절벽 위에 있었던 정자는 수차례의 유실과 재건을 거치며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그러니 이 정자는, 시간 속을 걷고 있는 건축이다.

세월에 저항하지 않고 흘러온, 누군가의 침묵과 수고로 이어진 감각의 기록.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겹처마가 만들어내는 그늘 속에서, 나는 앉아 있었다.

북한강과 소양강이 만나는 지점.

두 물줄기의 만남 위에, 나는 차를 놓았다.

단순한 녹차 한 잔이었지만, 그 향이 뜻밖에도 율무 같았다.

시간이 다른 시간을 비추듯, 이질적인 맛이 나의 혀를 일깨웠다.

그곳에는 연출되지 않은 풍경, 드라마 없는 일상이 있었다.


소양정 앞의 작은 뜰,

그 구석에 서 있는 낡은 가로등은 밤이면 누군가의 혼잣말을 받아 적는 듯한 빛을 낼 것이다.

그 뒷언덕에 숨어 있던 소양정의 뒷모습은 예사롭지 않았다.

앞에서는 풍경이었지만, 뒤에서는 기억이었다.

지붕 너머로 떠오르는 모든 시선이 이 정자의 이름을 불러준다.


나는 다기를 꺼내고, 떨어진 솔방울 하나를 집어 들었다.

밑동이 상처 입은 그 솔방울을 찻자리 한편에 앉혔다.

차를 좋아하는 게으른 고양이 한 마리쯤 초대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러니 이 날의 주인공은 나도, 소양정도 아닌, 다기 곁에 놓인 솔방울이었다.


2025년의 어느 여름,

나는 춘천의 소양정을 마셨다.

시간을 마시고, 풍경을 마시고, 상념을 마셨다.

그날의 정자는 ‘지어진 것’이 아니라 ‘열린 것’이었다.

삶과 풍경, 기억과 감각 사이를 잇는 열린 구조로서의 장소.


나는 그곳에서, 공간이 시간에게 보내는 차 한 잔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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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03화소양정 - 2005. 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