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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지 Oct 18. 2021

보이지 않는 대상에 대하여 쓰기

그림책 《불어, 오다》 창작 노트

《불어, 오다》(꼬마이실 2021)는 바람에 대한 그림책이다. 하지만 책 말미에 붙은 정보면을 제외하면, 표지와 본문에는 단 한 번도 ‘바람’이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 책을 출간하고 나서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는 게 꽤 재미있었다. 화가와 디자이너들은 본문에 ‘바람’이라는 말이 없다는 것을 대부분 몰랐다. 작가나 편집자들 중 몇몇은 “어떻게 바람이라는 말을 한 번도 안 썼어?”라고 물어왔다. 어린이 독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나 정답 알아. 바람!”

바람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바람에 대해서 쓰는 일은 나 혼자만의 숙제이자 이 책에 넣어둔 일종의 나만의 킥이었다. 내 의도를 알아차리고 공감하는 사람이 있다면 기쁘겠지만 일부러 드러내서 내 입으로 먼저 말하고 싶지는 않아서, 보도자료에도 이 사실은 쓰지 않았다.

이 책은 지금껏 썼던 원고 가운데 가장 어려웠다고 말할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일 듯이 쓴다는 것이 일단 어려웠고, 그것을 화가가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글로 표현한다는 것이 더욱 어려웠다. 나는 퇴고한 원고를 몽땅 다시 써야 했는데, 화가가 도저히 그림을 그리지 못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럼 첫 원고와 출간된 책의 글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한번 살펴보자.

첫 원고의 첫 번째 페이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혹시, 내가 보여?

안 보인다고?

잠깐만 기다려!”


이 장면에서 나는 화가에게 아무것도 없는 하늘을 그려달라고 했다. 다음 페이지는 이렇게 썼다.


“입술을 내밀고 후우-, 숨을 불어봐.]

이 작은 깃털이 나를 타고 날아갈 거야.

그래, 맞아. 방금 네가 나를 만들어 냈어!”


이 장면에서는 하늘에서 한들한들 떠가는 깃털을 상상했다. 깃털과 함께 저편으로 움직이는 듯한 구름도. 하지만 화가는 시작부터 그리기가 너무 막막하니 공간 설정이 확실해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이 글은 책의 뒷부분으로 보내고, 시작을 아래와 같이 수정했다.


나는 어디에나 있어.
하지만 아무도 볼 수는 없어.
그래도 내가 있다는 건 누구나 다 알지.
사람들도, 새들도, 꽃도, 모래도.




사람과 새, 꽃, 모래를 언급해서 이 모두가 함께 등장하는 배경, 즉 바닷가가 연상되도록 썼다. 바닷가에서 새와 사람들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그림은 자연스레 뒷장면으로 책장을 넘기도록 유도한다.

세 번째 장면에서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이제 내가 누군지 알았다면 나랑 같이 여행을 떠나자.



첫 원고에는 ‘여행’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닷가에서 출발해 드넓은 바다로 나아가는 새로운 구성에서는 여행이라는 말이 썩 잘 어울렸다. 그래서 《불어, 오다》의 앞부분과 마지막 부분에 여행이라는 단어를 추가해 책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 단어 덕분에 시간이 갑자기 과거로 흐르는 장면은 시간여행을, 바다와 환상적인 공간을 넘나드는 장면은 환상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제목도 달라졌다. 첫 원고의 제목은 ‘나의 이름’이었다. 나라마다, 지역마다, 또 바람의 세기,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과 때에 따라 바람의 이름이 달라지는 점이 재미있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또한 ‘바람’이라는 말은 ‘바라다’의 명사형과도 같다. 사전에서 찾아보면 명사형 바람은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이라고 나온다. 그래서 <나의 이름>의 제일 마지막 문장은 아래와 같았다.


“사람들은 나에게 여러 가지 이름을 붙여 줬어.

윈드, 방트, 펑, 뤼즈가르, 베체르 그리고 바람.

나는 바람이라는 이름이 가장 마음에 들어.


바람은 희망과도 같은 말이니까.”


이 문장들은 새로 원고를 구성하면서 모두 본문에서 삭제되었다. 아쉬운 마음에 정보면 제일 마지막 페이지를 바람의 이름들로 장식하고 “바람은 희망과도 같은 말”이라는 문장으로 책을 마무리했다. 이 정보면에 대해서는 독자마다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다. 은은하고 아름다운 책의 분위기를 정보면이 깨버렸다고 아쉬워하는 독자도 있고, 정보면까지 알차다니 일석이조라며 좋아하는 독자도 있었다. 둘 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책의 본문은 아래와 같은 말로 끝맺는다.


나의 여행은 영원히 계속될 거야!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바람의 여행, 그 이면에는 순환하는 자연과 우리의 삶이 있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쳤지만, 은은한 여운을 남기는 이 마지막 문장이 나는 마음에 든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독자들이 이 책과 함께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바람의 여행을 떠올리며 세속적인 근심이나 순간의 어려움을 멀리 바람과 함께 날려 보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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