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의 기운을 온몸으로 때려맞는 중
회사 다니면서 늘 입에 달고 살았던 말
"너무 늦지 않게, 얼른 그만둬야지... 한 2~3년?" 그렇게 미루듯 살아온 시간이 어느덧 10년이라니요.
매월 통장에 꽂히는 월급의 달콤함은 저를 안주하게 했고, 때로는 또 채찍질하기도 했어요. '더 열심히 해야지', '그래도 대기업인데...' 그러다가도, '하... 뭐라도 해볼까?' '곧 나가야지...' 이렇게 말로만 우왕좌왕하던 시절들의 반복, 매일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어요.
결혼과 출산, 육아의 행복은 인생의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과 감사함이지만, 한 켠에서는 해묵은 고민, 풀지 못한 숙제에 대한 무거운 짐 위에 비가 내린 듯, 쉽고 어려운 질문 하나하나가 큰 고민이 되고, 생각과 망상이 되곤 했어요. 그 중심엔 늘 같은 생각의 반복이었죠.
그래서 난, 언제...?
아들이 준 선물
그렇게 생각해요. 육아휴직은 아들이, 그리고 아내가 저에게 준 선물이라고. 생각만 하고 반복된 하루의 굴레에 벗어나지 못하던 저에게, 용기내 보라고, 한번 도전해보라고 시간과 기회를 준 장본인들이에요. 제 휴직은 경제적 수입의 감소, 안정적 직장에서의 벗어남, 편안한 일상에서의 이탈을 의미하니까요.
물론 휴직하고 쉬면 더 편안한 일상 아니냐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저에게 남들 놀 때 다 놀고, 출근할 때 출근한다는 그 편안함을 벗어난다는 건, 직장인에겐 꽤나 쉽지 않은 일이더군요.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출근시간인 9시를 훌쩍 넘어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닐 때면 누군가의 시선이 저를 가르켜 속삭이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지요. '저 사람은 뭔데 지금 이 시간에 저러고 놀아?'
회사 다닐 때 연차를 내고 평일에 쉬던 그 안락함은 이제 분명 사라졌어요.
휴직이지만 '쉴 휴'의 느낌은 0. 오히려 더 큰 압박감과 함께, 휴직 기간 1년 동안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압박이 저를 옥죄어 온 것을 부정할 수 없어요.
회사 다닐 때, 휴직 1달 전부터 하나 둘 뭔가를 준비해왔어요.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자. 생각보다 쉽지 않더군요. 물론 평일에 밖에 나가긴 하지만, 육아휴직을 한 아빠가 육아를 완전히 내팽개칠 순 없는 노릇일 테죠. 육아에 대한 임무분담과 함께, 육아휴직의 명분으로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 임무 2가지가 동시에 충돌하면서, 생각했던 목표는 어디간들 사라지고 오히려 하루하루에 허덕이는 제 자신을 발견했더랬죠.
도저히 안되겠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어요. 나는 왜 휴직을 했을까? 왜 지금?
아이와 아내가 잠든 새벽, 그렇게 빈 줄글 노트를 꺼내 해묵은 검은 모나비 볼펜을 꺼내 들었어요. 키보드라도 치면 아이가 깰까 싶어, 조용히 사각사각 볼펜 소리를 내며 한줄, 두줄 제 생각들을 써 내려갔어요.
휴직... 육아... 회사... 아빠이자 남편... 부모의 자식이자 아들... 대학원생... 미국... 사업...
뭔가 제 생각을 둘러싼 많은 키워드들이 머릿 속에 둥둥 떠 다니고 있더군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채, 그냥 시간이 흘러가면 키워드 하나 그 위에 흘러보내듯, 명확한 목표와 방향도 없이 제 삶을 시간에게 맡기고 있었더군요. 될 대로 되라... 열심히 하고 있잖아? 라며 자위하면서. 열심히 사는 세상은 더이상 통하지 않는 법칙인데 말이죠.
나는 누구인가?
결국 마지막 한 문장은 이것이었네요. 나는 누구인가... 아빠, 남편, 아들, 학생, 사업가... 그냥 이렇게 다양한 역할로 살다가 이 생을 마감하면, 그것이 곧 내 인생의 목표인가? 그것이 나인가? 나는 아빠인가, 학생인가? 사업가인가?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결국 그랬어요. 제가 휴직을 택한 이유, 그것도 가장 활발히 일해야 할 나이에 그런 결정을 내렸던 건 단 하나였어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어요. 열심히는 사는데 뭔가 쫓기듯 살았고, 행복하긴 한데 영원하진 않았어요. 결국 돌아와 다시 물었어요. 이 세상은 무엇이고, 그 속에 존재하는 나는 누구인가.
서재에 돌아가 책장 속 꽂힌 책들을 쭉 보았어요. 휴직 전 1년 동안 가장 많이 읽었던 책들이 곧 그것들이었어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쓴 사람들. 노자, 오쇼, 부처, 그리고 사업가들의 수많은 자서전들이요. 참 신기한 게, 휴직 전에는 아무리 읽어도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가슴 속으로 들어오진 않았어요. 피상적인 이야기들 뿐이라고 생각했어요. '두드리지 마라, 문은 항상 열려있다' 도대체 이 말이 무슨 말이지? 그냥 그렇게 넘겼어요. 하지만 쉬면서 다시 같은 문구를 읽었어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저 말의 본뜻의 서서히 표면 위로 올라오고 있었어요. 조금씩 더 선명해지는 느낌이었달까요.
Epilogue.
두드리는 인생, 좇는 인생이 아니라 내가 주체가 되는 삶
우리는 인간이에요. 인간은 육체(body)와 정신(mental) 2가지의 결합체로 태어나요.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라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내 육체와 내 정신을 손에 꼽아요. 그렇게 다시 물어요. 그래서 당신은 누구인가요? 당신은 OOO 라는 이름인가요? 아니요.
태어날 때부터 이름은 갖고 오지 않았듯, 이름은 당신 것이 아니에요.
그럼 육체인가요? 육체는 이 생을 지나면 소멸되고,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도 몰라요. 당신 것이 아니죠. 그럼 정신인가요? 정신은 생각이기도 하죠. 생각은 내가 한다고 착각하지만, 사실 생각은 타인과 환경의 지배를 받아요. 더 똑똑한 사람이 나를 가르치기도 하고, 더 큰 무언가가 제 생각을 지배하고 조종하기도 해요. 결국 그것도 제 것이 아니에요. 더군다나 생각은 제 마음대로 조종할 수도 없어요. 부정적 생각이 드는데 갑자기 긍정적 생각을 하란다고 한순간에 바꿀 수 있나요?
결국, 나라는 존재는 '존재하지 않아요'
나는 육체도 정신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의 상태', 그것이 진짜 나에요. 다만 육체와 정신은 진짜 나를 위해 존재하며, 이 지구상에서 살아가기 위한 아주 훌륭한 2가지 도구이자 무기일 뿐이에요. 잘 쓰고 잘 버리면 되는, 그리고 이리저리 잘 갖다 쓰면 되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에요.
인간은 '무'라는 세계에서 '유'라는 세계로 잠시 놀러 온 존재에요.
왜 왔을까? 알아야 할 것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겠죠. 탁한 지구의 세계로 내려와 알아야 할 것이란 게, 결국은 맑은 무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좀 더 배우고 돌아오라는 깨우침 이었을거에요. 그 가르침이란 곧 '무심', 신체(몸)와 정신을 뛰어넘어 순수하게 흐르고 통하는 '무'의 것을 깨우치라는 거에요. 막힘 없이, 고민 없이, 주저함 없이 항상 온전한 상태로 존재하는 그 '무'의 상태.
아기는 태어날 때 '무의 상태'로 태어나요.
기쁘면 웃고, 슬프면 울죠. 원래 '무의 나라'에서 왔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이 지구 나라에서는 육체와 정신이라는 족쇄가 달려 있어요.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기에, 마음대로 흐르고 싶어도 육체가 붙잡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도 이분법적 정신이 나를 얽매어 좋고 싫음, 기쁨과 슬픔이라는 복합적인 감정을 만들어 내요. 그런데 그게 인간이 만들어진 원리에요.
인간이 '무의 세계'로 돌아가는 유일한 방법
육체와 정신을 뛰어넘어라. 즉, 내 육체와 정신이 곧 나라는 착각, 무지에서 벗어나, 진짜 '나'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얼른 다시 '무의 세계'로 돌아와라... 라는 특명을 받고 지구에 온 거에요.
인간은 욕심을 부려요.
내 육체, 내 정신을 위해서만 욕심을 부려요. 세상에서 느껴지는 바, 나와 통하는 바는 둘째 치고, 일단 욕심에서 비롯된 내 생각이 내 육체와 정신을 꽉 쥐어매요. 예컨대 이런거죠. '돈 얼마를 벌어야 해!' '몇 살까지 성공해야 해' '사람들에게 인정 받아야 해' 등등이요. 그걸 많은 철학자들은 '에고'라고 하더군요. 에고가 나를 세뇌시킨다. 자유를 잃은 존재, 내가 누군지 망각한 존재, 그것이 현대의 개인들이라고 강조해요.
To-be-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