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의 유러피언 챔피언십
'Be the reds!'를 빼고 2002년을 말 할 수 있을까. 모두가 빨간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다니던 그 여름 말이다. 그 후로 벌써 20여 년이 흘렀고 나는 당시에 고작 초등학생이었지만 월드컵이 열리던 시기만은 아직도 생생하다.
어느 날엔가 부모님이 갑자기 손님들을 집안 가득 초대하셨다. TV앞에는 온갖 배달음식과 어른들을 위한 맥주가 가득했고 나와 동생은 붉은악마 티셔츠를 입은 채 들뜬 어른들 사이에서 어리둥절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다 어느순간 우리 모두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를 지르고 껴안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그 날 이후로 나는 경기가 있는 날이면 빨간 옷을 입고 친구들과 만나 아파트 단지 곳곳에 설치된 대형 텔레비전 앞으로 향했다. 어떤 아이들은 어디서 구했는지 양 손에 태극기까지 들고 등장했다. 월드컵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 갈 때 즈음 엄마는 우리를 시청 앞으로 데리고 갔다. 내게 기억나는 건 다닥다닥 붙어 앉은 사람들 사이의 열기와 피곤함 그리고 소음 뿐이지만 아마 한창 젊었던 엄마는 그날을 다르게 기억하고 있겠지.
아주 오래된 2002년 월드컵의 기억이 되살아난 것은 불현듯 이웃집에서 들린 함성소리 때문이었다.
2020년에는 올림픽 뿐 아니라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국제 축구대회, 유러피언 챔피언십도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작년의 유럽에선 축구를 하긴 커녕 일상생활마저 위협받는 수준이었기에 당연히 올해로 연기 되었고 EURO 2020을 2021년에 개최하는 웃지 못 할 일이 생겨버렸다.
큰 대회라고는 하지만, 나는 딱히 축구팬도 아닌데다가 독일은 우승전력도 아니고 코로나와 각종 방역수칙 때문에 축제 분위기를 느끼기 힘들었다. 이웃집 발코니마다 걸린 여러나라 국기들만이 대회를 리마인더 시켜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열린 창문 틈 사이로 갑자기 이웃집의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주기적으로 한 번씩 들리던 함성이 괴성으로 바뀔 때 즈음 도로에서 차들의 경적소리가 울렸다. 왠지 익숙한 소리들이 아주 오랫동안 떠올릴 기회가 없던 2002년 월드컵의 추억을 스믈스믈 되살려냈다.
그리고 그 날부터 기억에 덮인 먼지를 후후 불어내듯이 매일같이 대회를 챙겨보기 시작했다. 경기를 더 재미있게 즐기기 위해 시작 전에 응원하는 팀을 미리 정해놓고 공이 골대 근처로 날아갈 때마다 열심히 소리까지 질렀다. 어느 날은 내가 괴성을 지른 다음 5초 뒤에 옆집에서 똑같은 소리가 들렸고 또 다른 날은 어느 집에서 먼저 우와악! 하는 함성을 질렀다. 모두가 각자의 집에 있지만 왠지 모여있는 것같은 느낌이 들었던, 언택트 단체관람이랄까.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와중에 실제로 모이기도 했다. 경기장에 입장한 수만 명의 관중은 당연히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았고 펍이나 야외 광장에서 수십, 수백 명이 함께 경기를 본 다음 밤새 파티를 벌이는 바람에 코로나 확산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컸다. 심지어 영국은 일일 확진자가 3만 명 가량이 발생하는 상황에서도 런던에서 열린 결승전에 6만 여 명의 관객을 입장시키는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사실 나도 경기 중에 침 튀기며 열렬히 응원하는 관중들이 카메라에 잡힐 때마다, 저래도 되나 싶어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탈리아가 우승한 날 밤에 온 동네가 떠나가라 울리는 기쁨의 함성, 자동차 경적음, 폭죽소리를 들으면서는 갑자기 불편함이 누그러지고 희망이 샘솟았다.
1년을 넘게 온갖 규제에 억눌려 있었어도 우리는 다시 자유로워질 수 있고 아무런 걱정 없이 모르는 사람과 어울리던 시간을 다시 누릴 수 있으리라는 기대. 아무 규칙에도 얽매이지 않는 금요일 저녁이 다시 돌아오리라는 확신.
안타깝게도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결승에서 패배한 영국팀의 흑인 선수들이 인종차별을 당한다는 기사를 읽으며 축제 분위기는 망쳐졌고, (우연의 일치인지) 유러피언 챔피언십 이후로 유럽 전체에서 신규 확진자까지 증가하면서 완전히 자유로운 삶으로 돌아가는 길은 아직 멀어보인다.
영국 대표팀 감독이 에세이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국가대표는 누군가의 기억에 평생 남을지도 모르는 순간을 선물하기에 매 순간 최선을 다해서 뛰어야 한다고.
그렇다. 20년이 지나도 이탈리아 전에서 안정환이 연장전에 헤딩 골든골을 넣던 순간을 기억하는 것처럼, 마지막 승부차기를 성공시킨 홍명보가 머리를 휘날리며 달리는 모습을 기억하는 것처럼. 넘치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 해 자동차 위에 올라타 대~한민국!을 외치던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처럼.
올해의 유러피언 챔피언십도 누군가에게는 평생 이어질 기억이 되겠지. 훗날 사람들은 이 시기를 어떻게 기억할까? 그 해는 참 이상했다고, 모르는 사람의 옆에 가는 것조차 꺼려지는 때였는데 축구장에만은 바이러스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고 추억하게 되려는지. 뭐가 됐든 미래에는 2021년의 일상이 비정상적인 것으로 기억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