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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yn Oct 14. 2020

1 - 나의 대학교 시절(1)

서른 살, 독일, 백수, ..

1 - 나의 대학교 시절(1)

나는 한국의 많은 청소년들과 마찬가지로, 좋은 대학만 가면 인생은 반이 끝난 것이나 다름 없다고 믿으며 십대를 보냈다. 치열하게 공부한 적은 없지만 나름대로 노력했고 운 좋게도 서울 안에 있는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모두에게 축하를 받으며 잔뜩 으쓱해진 어깨로 시작했던 나의 스무살은, 상상과 많이 달랐다.


대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과잠바를 주문했다. 학교 이름이 등짝에 새겨진 게 어찌나 좋던지 아침마다 서울역에서 지하철을 기다릴 때면 사람들이 내 과잠바를 잘 볼 수 있도록 등에 맨 백팩을 일부러 벗어 손으로 들었다. 학교 가는 길이 행복했고, 한 두 과목에선 A+도 받으며 부과대까지 도맡았다. 성공적인 입시를 해냈다는 성취감에 눈이 멀어서 대학교 뒤에 진짜 인생이 펼쳐진다는 건 생각지도 못 한 채였다.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걸 눈치챈 것은 1학년 2학기 때다. 교양수업에서 4학년 선배들 3명과 한 조가 되었는데 모두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여자인데다가 심지어 인문대생이면 공무원 준비 외엔 길이 없다고 했다. 나는 우연히 만난 3명 모두가 똑같은 삶의 목표를 가졌다는 게 이상하기만 한데 선배들은 오히려 날 보고 '일찍 준비할 수록 좋다'는 눈치를 줬다.


그 즈음 알게된 다른 과 선배는 회계사를 준비하다가 학원에서부터 학벌로 차별을 받는다며 포기했고, 서울의 유명한 명문고에서 우리 학교에 온 동기는 열등감이 든다며 편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 때의 나에겐 세상이 무너지는 충격이었다.


10대 시절을 걸고 이뤄낸 성취는 사회에서 특별한 가치가 없었다. 인생은 오히려 대학교 입학 후부터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사회에 나의 가치를 증명해내야만 했다. 나는 하나도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었고 꿈은 멀기만 했다.


알바를 해서 모은 돈으로 떠난 첫 해외여행, 2014년 여름의 뉴욕

나는 완전히 길을 잃어버렸다. 2학년 때부턴 수업에 거의 나가지 않았다. 직장에서 해고당하고도 가족에 말을 못 해 아침마다 정장을 입고 출근하는 사람처럼, 나도 아침에 가방을 챙겨 집을 나와서는 다른 데로 갔다. 카페, 도서관, 남산, 1호선 지하철 여행 등등 학교 빼고는 어디든 다녔다. 


친구들은 몇 주는 아침마다 안부를 묻다가 내가 아무 답이 없자 나를 학교로 부르는 걸 포기했다. 학사경고를 받으니 과사무실에서도 전화가 왔다. 도움이 필요하냐는 전화였는데 도무지 어떻게 답을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다음 학기는 출석을 잘 하겠다고 얼버무렸다. 물론 다음 학기도 학사경고였지만.


학고를 두 번 연속 받고서 급하게 다음 학기는 휴학을 했다. 


20대 초반의 나는 평범한 직장인이 되기 싫었고, 무엇보다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 또 다시 피튀기는 시험을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대학교를 순위매기듯 직장과 연봉대로 순위를 매겨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사회에도 진절머리가 났다. 한국인들은 어쩜 외울 것도 없는지 대학교 순위를 달달 외는 것도 모자라 기업 순위까지 외우고 있다는 걸 그 때 깨달았다. 


찬란한 인생이 펼쳐질 거라던 대학생활은 고등학교 때와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지인들이 점점 취직을 하면서 나는 자연스레 초조해졌지만 내가 무엇을 해야할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2014년 7월 말의 뉴욕

목적이 없는 휴학을 했으니 하루의 대부분을 집에서 보내는 날이 많았다. 친구가 나를 보다 못 해서, 차라리 영어공부를 할 겸 미드라도 보면 어떻겠냐며 '모던패밀리'라는 시리즈를 추천해줬다. 


아무 기대 없이 보기 시작했다가 첫 화부터 눈물나게 웃어버렸고 이를 시작으로 온갖 미드에 발을 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How I met your mother)' '화이트 칼라'처럼 완전히 빠져버린 드라마는 모두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너무 뜬금없게도


미국에 가봐야겠다,


마음을 먹었다. 저 드라마가 펼쳐지는 곳을 꼭 직접 보고싶었다. 

2014년, 뉴욕 메츠 구장

미국을 가보긴 커녕 여권도 없는 나였다. 부랴부랴 10년짜리 여권을 만들고 아르바이트를 풀타임으로 하며 거의 일 년 동안 미국 여행을 준비했다.


뉴욕 2주, 샌프란시스코 2주. 


그 어떤 생산적인 목표도 없이, 오로지 나의 행복만을 위해 노력했던 한 달동안 나는 많은 에너지를 얻었고 그 힘으로 인생을 즐겁게 바라볼 수 있었다. 


'꿈을 꾸면 이렇게 이뤄지기도 하는구나'

'세상은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크구나'


인생은 시험 뒤의 시험, 고난 뒤의 고난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달콤한 행복이 숨어있었다니 너무나 반가웠다.


이렇게 쭉 쓰고보니 나는 20대 초반에 길을 잃었던 게 아니라 아마 지쳐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10대엔 대학을 위한 희생, 20대는 취업을 위한 희생, 30대는 저축을 위한 희생, 40대 이후부터는 가족을 위한 희생. 꼭 고통받기 위해서 태어난 듯한 불행의 굴레에 숨이 막혀있었나보다.

2016년 연말의 뉴욕, 마음이 남은 곳이라 자주 가게 된다

본래는 독일에서 백수로 지내는 이야기를 쓰려고 했는데, 그러려면 우선 내가 왜 독일에 있는지를 말해야 했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어떻게 20대 초중반을 보냈는지에 대해 말해야 했다. 다음 글에서는 20대 중반의 시기를 돌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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