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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yn Nov 21. 2020

3 - 독일에서의 첫 직장

서른 살, 독일, ..

나는 한국에서 취준생이었던 적이 없다. 이력서를 보내면 다음 날 연락이 오고 면접 후 집에 가는 길에 합격통보를 받는 회사에서 몇 번 일한 게 전부다. 한국에서 잠깐 다녔던 직장은 전 직원이 5명인 광고대행사였다. 월급은 150만원을 받았다. 어느 날 사장이 데드라인이 내일이라며 웬 프로젝트를 따왔다. 하루만에 절대 끝낼 수 없는 양이었기에 포기하고 퇴근시간에 맞춰 회사를 나왔다. 다음 날 출근을 했더니 선배가 아침 7시까지 일을 해서 프로젝트를 끝내놓았다고 했다. 그 선배의 월급도 150만원이었다. 더 다닐 필요가 없겠다 싶어서 바로 그만두었다.


한국에서는 직장인이 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삶의 선택지가 한국에는 없었다. 취업준비를 열심히 해서 대기업에 가볼까 하는 건 꿈도 꾸지 못 했다. 경쟁이 너무도 치열했다. 명문대를 나온 친구들도 이력서를 50개, 100개씩 돌리며 발을 굴렀다.


설령 어떻게 대기업에 취업을 한다 해도 아침 8시에 집을 나와서 저녁 8시나 되어야 들어가는 삶에서 행복을 상상해보기는 어려웠다. 대기업에 가지 못 하면? 200만원도 채 안 되는 월급으로 더 과중한 업무를 떠맡아야 하는 게 한국 노동시장의 현실이다.

돈을 못 벌수록 더 힘든 일을 해야하는 아이러니
2017년, 스위스 로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한 채 도피성 여행만 다니고 있던 때에, 친구가 보내 준 채용공고가 나의 인생을 바꾸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지역에서 근무할 인원을 한국에서 채용한다는 내용이었다. 인생 처음으로 내가 가야할 길이라는 확신이 들었고, 그 기운이 남들 눈에도 보였는지 그 회사에 최종합격했다. 그리고 3개월 뒤인 2월 23일에 캐리어 2개와 등산가방 1개를 들고 독일에 도착했다.

설렘 가득하던 프랑크푸르트에서의 날들

내가 독일에서 처음 다녔던 회사는 지점장 한 명에 직원이 6명인 단촐한 곳이었다. 처음에는 모든 게 꿈만 같았다. 그렇게도 바라던 독일에서 일을 하면서 살게 되다니. 아침에 눈만 떠도 행복하고 하루하루가 기다려지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물론, 그 환상이 깨지는 데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이 회사는 심각한 재정난을 겪고 있었다. 선배들의 월급이 몇 달씩 밀리고 있다는 사실을 안 건 입사한 이후였다.


이렇게 사업을 하는 사람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직원들에게 마치 큰 아량을 베푸는 듯이 군다는 점이다. '내 덕에 네가 해외에서 살면서 일도 하게 되었는데 돈까지 벌길 바라니?' 이런 태도가 디폴트다. 한국에서라면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을 근무 조건을 마치 큰 혜택인 양 내세우면서 새로운 삶을 향해 날아온 젊은이들의 피와 살을 빨아먹는 인간들. 사실 대부분의 영세 한인업체, 한식당, 한인 미용실 등이 이런 이들에 의해 운영된다. 듣기로는 독일 뿐 아니라 다른 나라도 사정은 비슷하다고 한다.


아마 내가 일했던 회사의 지점장은 아직도 스스로를 너그러운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을 것이다. 어려운 와중에 최선을 다해서 직원들을 챙겼다고 생각하겠지. 그런 사람이니까 결국엔 사업이 다 망해서 한국으로 돌아갔겠지만은.

독일에서는 각 도시마다 크고 작은 마켓들이 열린다. 신선한 야채와 치즈, 꽃을 살 수 있는 곳.

내가 살았던 회사 숙소엔 독일생활 3년차인 선배 2명이 있었다. 그 집은 방이 2개여서 막내직원인 나는 '당연히' 거실에서 살아야 했다. 거실 한 가운데에 커튼을 치고 그 뒤에 침대와 책상을 놓은 게 짐의 전부였다. 그래도 나는 독일에서의 첫 보금자리가 생겼다는 것에 기뻤다.


하지만 나의 선배들은 나와 생각이 많이 달랐다. 언젠가 외박을 하고 집에 돌아오자 화가 잔뜩 난 선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지점의 역사상 신입이 직원 숙소에서 나가 외박을 하는 경우는 없었다나. 스크롤을 내려도 내려도 끝이 없는 카톡을 보내서 나의 외박이 자기를 걱정시켰다며 화를 쏟아냈다. 20대 후반의 나이에, 회사 선배로부터 외박을 했다는 이유로 혼나야 한다는 건 독일에 올 때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 한 일이었다.


또 어느 날은 그 인간이 카톡으로 프라이팬 사진을 찍어 보냈다. 내가 아침으로 계란후라이를 해먹은 다음 설거지를 대충해서 바닥에 찌꺼기가 눌러붙어있다고. 대체 무슨 찌꺼기를 말하는 건지 보이지도 않았다. 그 날 밤 늦게 집에 돌아갔더니 프라이팬이 식탁 위에 떡하니 올려져 있었다. 그 집엔 프라이팬이 딱 하나였다. 반드시 내가 설거지를 한 번 더 하도록 만들기 위해 프라이팬을 하루종일 못 쓰는 불편함까지 감수한 것이다.


이런 인간들에게도 특징이 있다. 본인을 굉장히 자애롭고 편한 선배라고 평가한다는 점이다. 자기가 당했던 부조리를 남에게도 똑같이, 혹은 그 이상 갚아줘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면서도 그를 끝끝내 인정하지 않으니 대놓고 선배노릇을 하며 후배를 괴롭히는 쪽보다 대하기가 더 어렵다. 그 인간들이 혹여나 이 글을 읽게될 지 모르겠지만, 읽는다고 쳐도 자기를 향한 이야기인 줄 모를 것이다. 원래 사람은 자기가 좋을 대로만 기억하기 마련이니까. 그들은 선배 무섭고 고마운 줄 모르고 버릇없게 행동하던 무개념 신입으로 나를 기억하고 있겠지.

나에게 위로가 되어주던, 집 근처 빵집에서의 아침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독일에 와 있는 게 맞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한국인들과만 일을 하니 독일어를 써 볼 기회도 없었고, 심지어 그 한국인들은 내가 만난 그 어떤 사람들보다 똥군기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아침 7시에 중앙역으로 나를 불러서 선배 출근인사를 시키고 차를 청소하게 만드는 일 정도는 귀엽게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한국이었다면 출근 첫 날 점심시간에 가방을 싸서 나와야 할 정도로 엉망인 회사 분위기였지만, 나는 아직 독일에서의 잡마켓이 어떤지도 알지 못 한 채였고 당장 일을 그만두면 한 달 이상을 살아낼 돈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계속 다녀야만 했다.


외국에 나와서 자리를 잡는 것부터 이미 힘든데 나와 전혀 맞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려니 한계가 왔다.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 걷다가 구역질을 하거나 눈의 실핏줄이 다 터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도 눈치가 보여서 제대로 쉬지를 못 하니 도무지 몸과 정신이 버틸 수가 없었다.


한 달 노티스로 퇴사 통보를 했더니 지점장의 첫 마디는 당장 이번 주 까지만 일을 하고 그만두라는 거였다. 분노할 힘도 없어서 그냥 그만 두려다가, 일을 제대로 마무리하고 싶단 의견과 한 달 월급이라도 아쉬운 실정임을 잘 설명했다. 우여곡절 끝에 한 달 더 일을 하기로 했고 집을 구하는 대로 숙소에서도 짐을 빼기로 협의했다. 결국은 내가 집을 구하기도 전에 나가라며 쫓겨났지만.

독일의 겨울

퇴사를 한 지 두 달 쯤 뒤에 다니던 회사가 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선배들 중 일부는 한국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지점장부터 직원까지 그 누구도 안타깝지 않았다. 내가 정말 안타깝게 생각하는 건, 독일의 선진 노동문화를 꿈꾸며 넘어와 한인업체에 취직해 영혼이 갈려나가는 워홀러들이다. 마치 2018년의 나 같은 20대 중후반의 사회 초년생들.

독일 안, 한국인들만의 작은 섬


독일에서는 절대로 계약서가 없이 일 해서는 안 된다. 풀 타임으로 주에 40시간을 일할 경우 1년에 최소 20일의 휴가가 보장되어야 한다(보통의 독일 직장인들은 연차로 24~35일 정도를 받으니 20일 휴가로 계약한다면 매우 나쁜 조건). 1년 이상 세금을 낸 기록이 있다면 실업급여를 수령할 수 있으며 매 달 월급의 약 60% 정도를 받을 수 있다(일 한 기간에 따라 수령기간이 다름). 그 기간동안 나라에서 보험료도 커버해준다.


하지만 작은 한인업체, 한식당, 한인미용실 등 영세업체에서 일하는 한인들은 이런 노동조건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독일에 있지만 한국인은 '한국인들만의 룰'을 따른다. 내가 알바했던 한식당에선 매일매일 16시간씩 주 6일을 일하는 사람도 있었다. 휴가는 1년에 14일이었다. 팁을 안 주거나 사장이 떼먹는 경우도 많다.


나는 이런 저런 알바를 하다가 운이 좋게 직장을 잡아 취업비자를 받고, 내 이름이 문 앞에 적힌 예쁜 집도 구할 수 있었다. 인생 처음으로 큰 회사에 다니며 직장인으로서 알아야 하는 것들을 배워나갔다. 올해 초부터는 연봉을 높일 수 있는 곳으로 이직을 준비했다. 이제 고난은 다 지나갔겠구나 안도했다. 코로나가 터지면서 갑자기 실업자가 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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