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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의 정원이야기 May 16. 2022

주유소 알바녀

나미래의 헛헛한 기억의 발아 이야기!

 

  “엄마, 왜?”

  “아야, 아까 집에 무슨 선거 운동원이 왔다 갔는디 말이다. 미래 어머니시죠? 라면서 물어보더라. 너를 알고 있드마.”

  “우리 엄마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대?”

  “안 그래도 물어봤지. 주유소에서 같이 일했던 사람이라고 하더라.”

  “으하하. 주유소 얘기가 또 등장하는 거야?”     


  엄마의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주유소에서 같이 일했던 사람’은 기억의 부화를 이끌다 못해 이내 불콰한 얼굴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오래전 3개월간 근무했던 아르바이트 경력 이야기가 30년 가까운 시점이 되어 또다시 발아될 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나고 자란 친정 동네 인근에는 탁 트인 공간에 남해안 바닷가 전경을 바라보는 주유소가 세워져 있다. 벽지 섬에 두 번째로 생긴 주유소에서 단기 일자리로 여름 한 철을 보냈던 덕분(?)에 나는 ‘주유소 알바녀’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아버지 친구분이 운영하고 있다는 그 주유소(1994년 당시는 성남주유소, 현재는 금산주유소로 이름 변경.)에 단기 일자리를 알아봐 달라고 아버지에게 부탁을 한 적이 있다. 아버지에게 받아본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소소한 백이었다.


  촌락의 섬(거금도, 현재는 연륙교가 연결되어 육지가 되었다.)까지 내려가 주유소의 단기 아르바이트생이 되어야 했던 이유가 궁금해지지 않은가. 그때의 나는 누구보다 섬에서 속도감 있게 벗어나고자 했던 겉멋이 잔뜩 든 거친 인간형이었다. 그렇지만 섬에서 아르바이트를 선택했던 것은 그해 가을께부터 일본 유학을 예정으로 출국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절이 지날 때마다 흑역사로 남을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웃음).


  광주에서 몇 년간의 사회생활을 정리하고 출국 전에 잠시 시골로 내려왔던 나는 한 푼이라도 보탬이 되는 생산적인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섬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섬과 육지가 정한 규칙에 따라 뿌리 깊은 파도를 헤치는 철선을 기다리는 일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르바이트 장소도 변변치 않았던 섬에 새롭게 생긴 주유소가 내 눈에 들어왔던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이미 눈에 넣어버린 그 주유소가 집에서 걸어 다닐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는 것도.


  주유소 아르바이트 첫날부터 순항은 이미 물을 건너가고 있었다. 당시 거금도에서는 섬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인 용두봉 인근에 돌산이 있었다. 그 돌산에서 많이 나는 화강암을 채석하여 12톤 차에 돌을 실어 나르는 남자 운전자들의 직업군들이 많았던 시기였다. 그 운전자 중에는 초중고를 같은 학교에서 다녔던 선후배 동기들이 간혹 눈에 띄기도 했다.


  부끄러웠다. 사실 숨고 싶었다.


  ‘나의 찬란한 미래를 위해 일본 유학 준비 중이에요’라는 말을 매번 달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바른 생활력과 성적으로 다녔던 학교에서는 나름 잘 나갔다고 생각했던 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학교에서 잘 나가지 못한 남자들의 근무지. 즉 트럭 운전자는 그들의 소유물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했던 20대 어린 나에게 부끄럼을 전하고 싶다. 성실하고 거물 고객이 되어준 그들에게는 친절하게 인사를 하고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사적인 영역으로 들어와 말을 걸어오면 곱지 않은 시선으로 쏘아붙였던 것이 나였다. 겉과 속이 헛헛했던 그때의 나는 거친 섬 남자들에게 친절함을 내어주지는 않았다. 성난 표범에게 당한 몇몇 남자들은 이후 나의 그런 행동들을 그대로 엄마에게 묘사해주었다고 한다.


  “갸, 보통내기가 아니던데요. 무섭게 쏘아붙이는데요.”라며.


  함께 일했던 동료 남자들도 이후 나를 계속 기억하고 있었다고 했다. 한 동료였던 어떤 분은 친정에 보일러 기름을 넣어주러 와서는 ‘일본에 갔다는 미래는 잘 있느냐?’ 등의 안부를 묻거나 또 다른 동료 중에는 ‘그 친구, 대단한 궐기가 있는 것 같다며 성공할 줄 알았다.’는 등을 말을 전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함께했던 이들이 ‘성질 보통이 아니던데’라며 나의 이야기를 엄마에게 전해 줄 때마다 나의 얼굴이 해넘이의 노을이 되어버릴 때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듯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어야 했는데 말이다. 조금 더 세련된 행동과 부드러운 말로 그들의 다양한 질문에 응대해야 했는데 아쉬웠던 지점이 아닐 수 없다.


  아버지 친구분이었던 주유소 사장님의 친절함이 아니었다면 3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 나의 열악한 자존심이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을 오는 동안 멍울 몇 사발 먹고 자존감과 자존심을 많이 찾아내지 않았나 싶다. 주유소 알바녀의 꼬리표인 나의 흑역사를 이렇게 글로 풀어내니 편안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은 그렇다.


  이번 시골행에서는 금산주유소의 주변을 다시 눈에 담아 보고 싶다. 어찌되었든 나의 발자취가 남아 주유소 인근에 내 이름의 꽃향이 피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은 거금도 금산 지역을 가게 되시면 #금산주유소에서 기름 한 번 넣어보세요. 어느 시인의 기억의 발아도 함께 해주시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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