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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연 Oct 30. 2023

가을의 쇼팽

쇼팽의 음악은 쓸쓸했다. 쇼팽의 음악을 처음 들었던 게 언제였을까. 아마도 내가 의식하고 들었던 건 고등학교 무렵 쇼팽 에튀드를 치기 시작하면서일 것이다. 정확히는 말할 수 없는 비밀과 베토벤 바이러스를 보고 나서겠지. 아무튼 그게 고등학교 시절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 시절 나는 쇼팽 에튀드 음반을 구매해 오디오로 들었었다.


그때 내가 가장 좋아했던 건 쇼팽 에튀드 Op.25-11 겨울바람이다. 휘몰아치는 건반에 어렵기로 유명한 곡이다.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연주하는 장면을 보고 너무 멋있어 매일같이 연습해 겨우 악보 반장을 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그때만 해도 깊은 감상이라기보다 그저 멋있어서 쇼팽의 음악을 좋아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막연하게 드뷔시나 쇼팽의 곡들이 좋다고 생각했다. 왜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아무래도 서정적인 느낌이 좋았던 것 같다. 그리고 더욱 시간이 지난 언젠가부터 쇼팽의 음악에 쓸쓸함과 애절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저 멋있게 느껴졌던 음악이 어느새 쓸쓸함으로 다가왔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사는 지역에서 피아니스트 김정원의 독주회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공연의 주제가 무려 'Last Chopin'이라니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다. 


공연 당일. 거리는 어느새 단풍으로 물들고 하늘은 청량했다. 아직 낮에는 햇빛이 따사로워 쌀쌀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나는 버스 창문을 조금 열어놓고 가을을 맞으며 공연장으로 향했다. 


공연장에 도착하니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번 공연은 쇼팽 생애 마지막 3년(1846-1848)의 피아노 작품으로 구성됐다. 녹턴을 시작으로 마주르카, 환상곡 등이 연주됐다. 처음 듣는 곡이 많아 집중해서 들을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막상 연주가 시작되니 몰입감이 엄청났다. 섬세한 감정과 격정적인 연주에 감탄하며 그의 연주에 빠져들었다. 이 한 곡을 연주하기 위해 얼마나 오랜 고뇌를 견뎠을까. 이런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수 있다니. 아무래도 나는 이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많은 것들을 보고 경험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일지 모른다.


앙코르 곡으로 그는 쇼팽의 유작 녹턴 No.20을 연주했다. 영화 피아니스트 속 처절했던 연주자가 생각났다. 이어서 그는 쇼팽이 스무 살 무렵 작곡했다는 녹턴 Op.9-2를 연주했다. 이 두 곡이 묘하게 대조되면서도 일치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음악은 어딘가 모르게 관조적이었다. 쇼팽은 내성적이고 고독에 침착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런 그는 1849년 10월 17일. 마흔을 채 넘기지 못한 채 사망한다.


팸플릿에는 이런 글이 있었다.

"쇼팽의 음악은 '사랑'이다. 피아노에 대한 사랑, 연인에 대한 사랑, 조국에 대한 사랑. 매우 내성적이었던 쇼팽은 가슴속의 뜨거운 사랑을 음악으로 치열하게 표현했다. 그러나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 시기. 그는 연인을 잃었고, 건강을 잃었고, 그토록 원했던 조국 폴란드의 독립은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이국 땅에서 삶의 마지막 순간들을 보내며 그는 지나간 시간들을 아득한 그리움으로 회상했다. 아프고 외로웠지만 결국 그의 마지막 순간에도 그의 음악은 사랑이었다."


쇼팽의 음악은 쓸쓸했고, 또 따스했다. 누군가 그의 음악을 가을의 달빛이라고 했다. 나는 가을과 달을 좋아한다. 내가 쇼팽을 좋아했던 건 어쩌면 내면 깊은 곳의 이끌림이었을지 모른다. 낙엽이 지는 가을밤, 쇼팽의 음악을 듣고 나오는 길. 눈앞에 은빛의 보름달이 환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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