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으로 대책없게
제주도에 집을 샀다.
이 말에는 어쩐지 낭만적이면서도 대책 없는 느낌이 있다.
시들해진 제주 이주 열풍에 뒷북을 울린 것이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서울과 제주를 오가던 나의 인생 무대를 제주도로 확정 짓는 결정이었달까. 아홉 살 겨울에 처음 만난 제주는 밤이면 불빛 하나 없이 새까만 어둠이 내리고 그 사이로 반딧불이가 날아드는 섬이었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하늘과 바다와 오름 말고는 아무것도 없던 제주. 열 아홉 살 겨울까지 제주에서 꼭 10년을 채우고 대학에 진학하며 서울로 갔다. 따지자면 내가 태어난 곳은 서울이니 고향으로 돌아간 셈이었다.
어린 어른이 되어 서울로 간 나는 처음 걸음마를 배울 때처럼 느렸다. 지하철이 입을 벌려 한 무리의 사람을 토해내면, 순식간에 썰물같이 빠져나간 사람들 뒤로 혼자 플랫폼에 남았다. 시간이 쌓일수록 사람들에 섞여 잰 걸음으로 계단을 오를 수 있게 되었지만, 서울이라는 도시는 늘 나를 있는 힘껏 뒤로 밀어내는 것 같았다. 해가 들지 않는 땅 아래를 달리던 지하철이 지상으로 올라 한강을 가로지를 때, 파도가 느껴지지 않는 강물에서 바다 냄새를 그리워하며 숨을 삼켰다.
졸업 후 공채 시즌 대기업에 도전했지만, 서류 합격 조차 쉽지 않았다. 희박한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막연히 방황을 이어나가기보다 빠르게 눈을 낮춰 적당한 곳에 취업하는 쪽을 택했다. 월급은 소금보다 짰고 1000에 40, 월세방 자취 인생은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갔다.
대학 시절 하던 주말 아르바이트를 다시 시작했다. 이른 아침 물로는 지워지지 않는 피로를 화장으로 가리고 불빛이 반짝이는 청담의 어느 결혼식장으로 갔다. 누군가의 가장 빛나는 날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모든 것이 문제없이 매끄럽게 진행되도록 그림자처럼 숨죽여 움직였다. 그마저도 모자라 주에 2~3번쯤은 퇴근 후에도 아르바이트를 했다.
일주일에 두 번쯤, 아르바이트가 없는 퇴근길에 편의점에 들러 4캔에 만 원하는 맥주에 컵라면이나 도시락을 사는 것이 소소한 즐거움인 생활이 이어졌다. 한 캔이면 충분하던 것이, 두 캔을 마셔도 모자라게 느껴지고, 결국은 네 캔을 모두 비워내게 됐다. 불행하지는 않았지만, 피로하고 조금 우울했다.
먼저 나가 떨어진 건 몸이었다. 어느 날 아침 알람 소리에 눈꺼풀을 반쯤 열고 침대에서 일어섰을 때, 세상이 빙빙 도는 느낌에 침실에서 화장실까지 채 몇 걸음을 걷지 못하고 도로 침대로 쓰러졌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니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119? 택시? 의식이 멀쩡한데 119를 불러도 되나?’
고민하다 119에 전화를 걸었다. 가까운 병원이 어딘지도, 어느 병원에 가야 할지도 막막했고, 택시 타러 나가다 넘어져서 머리라도 깨지면 큰일이니까. 구급대원은 신속히 도착해서, 걸을 수 있겠냐고 물었다. 끔찍하게 어지럽지만, 고작 3층이고 들것에 실려 내려가는 게 더 어지러울 것 같아 난간을 잡고 기듯이 걸어 내려갔다.
"다음부터 걸을 수 있으면 택시를 타세요"
소방대원이 핀잔을 줬다. 걸을 수 있느냐 물어서 최대한 걸었을 뿐인데. 구급차에 타자마자 어지럼증을 견디지 못하고 구토가 올라왔다.
'봐요, 진짜 아프잖아요'
말 대신 빈 속에서 영문 모를 액체를 게워냈다. 병명은 이석증이었다. 이석증 다음은 신우신염, 그 다음은 편도선염. 내 몸은 온갖 염증의 사이사이에 잊을만하면 이석증이 찾아오는 상태가 되었다. 그때쯤이었다. 다 때려치우고 제주도에 가서 귤이나 따며 살고 싶다는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
대학 시절 서울의 풍성함과 화려함 속에서 정신 없이 몇 개월을 보내다 방학이 되면 제주로 와 잠을 자곤 했다. 엄마가 걱정스러워 깨울 정도로, 깊고 달게 잤다. 모든 긴장과 피로를 제주에 쏟아 내면 다시 서울로 갔다. 체력도, 정신력도 고갈되어 가던 때 제주도에 가서 귤이나 따며 살고 싶다는 말을 버릇처럼 하게 된 건, 대학 시절의 습관을 기억하고 있던 몸이 시킨 말이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사람은 늘 말을 조심해야 한다. 말은 씨앗이 되어 싹을 틔웠다. 물론 귤 밭에 취직한 건 아니고, 재미 없고 평범한 직장을 찾았을 뿐이다. 먹고 사는 것은 중요한 문제니까. 아무리 부모님이 있다고 해도, 다 큰 딸자식이 백수가 되어 얹혀 살 순 없잖아. 일이 그렇게 되려고 그랬는지 서류와 면접을 무난하게 통과하고 출근이 확정되었다.
숨막히게 더웠던, 기록적인 폭염이 찾아왔던 2016년 8월, 에어컨도 없던 자취방에서 솜이 가득한 겨울 옷들을 우체국 택배 상자에 넣는 동안 다섯 번이나 찬물로 샤워를 했다. 물을 끼얹고 나오자마자 열이 오르는 몸을 미지근한 선풍기 바람에 맡기고, 돈내코 계곡의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을 떠올렸다.
제주로 돌아 오던 날, 비행기가 쿵- 하고 땋에 닿자마자 비행기 밖으로 나와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습기가 많고 짭짤한 맛과 향이 있는 공기가 가슴 가득 들어왔다. 공항의 국적불명 야자수 나무조차 반가웠다.
‘잠시 쉬었다 가자.’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었다. 결국 서울살이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망쳐 왔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방학 때 잠시 쉼을 충전하고 돌아갔을 때처럼, 그렇게 쉽게 다시 서울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1년, 아니 2년쯤,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돈도 모으고 학자금 대출도 좀 갚고 체력도 회복해서 서울로 가자고. 그렇게 다짐했다. 하지만 굳은 다짐이 무색하게도, 5년 뒤 나는 제주에 집을 샀다.
떨어져 있으면 그립고, 돌아오면 떠나고 싶은.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 이상한 나의 섬. 나의 제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