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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heavenlyp Oct 02. 2021

결혼 12일만에 혼인신고를 했다. 집 때문에

정상 가족이 되라는 주문


사실 내가 제주에 정착하기로 맘 먹은 데는 아주 낭만적인 이유가 있다.


사랑에 빠진 것이다!


사랑에 푹 빠진 나는 서울의 괜찮은 일자리를 찾아 사람인을 뒤적거리는 것을 그만두었다. 향수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툭하면 제주를 떠나 서울행 비행기를 타던 것도 그만두었다. 그러기는커녕 사랑하는 이와 제주 어디에서든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었다. 조금 지나자 자주 만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밤마다 함께 잠들고 아침마다 함께 눈뜨고 싶어졌다. 이 단순 명료한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그가 회사 기숙사를 정리하고 나와 자취방을 구했고, 거의 매일 함께 지냈다.


1년이 순식간에 지나 월세 계약이 끝나는 시점이 돌아왔다. 월세 계약을 연장할 것인가 전세로 이사할 것인가의 갈림길에서 무수한 고민과 열띤 토론 끝에 ‘전세집을 마련’해 ‘결혼을 전제로 동거’하면서 ‘1년 뒤 결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동거에 대해서도 할 이야기가 많지만, 결론만 말하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이 한국 사회에서는 결혼뿐이라는 것을 느끼고 결혼을 선택하게 됐다고 하겠다.


양가에 결혼 계획을 알리고 적당한 전세집을 구한 뒤, 공식적으로 살림을 합치고 결혼준비를 해나갔다. 함께 사는 것에도 점점 익숙해지고 더 재미가 붙었다. 그러던 중 사소한 문제가 하나 생겼는데, 결혼 시점이 원래 생각하던 그 해 가을에서 다음해 봄으로 6개월 정도 미뤄지게 된 것이었다. 결혼식 전 1년 6개월을 이 집에서 지내게 되면서, 결혼식을 올리면 거의 바로 전세 연장을 할지, 이사를 갈지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단연 연장 쪽이었다. 나와 나이가 엇비슷할 정도로 오래된 그 아파트는 오래된 만큼 구조도 별로고, 수납도 턱없이 모자랐지만, 회사는 물론 각종 편의 시설과 가까워 생활 인프라 면에서 만족스러웠다. 마침 임대차법이 개정되어 전세 연장도 무리 없이 가능한 만큼, 결혼한 후에도 2년 정도 더 지내며 돈도 더 모으고 싶었다. 하지만 남자친구에서 결혼할 예정인 동거인으로 격상한 그의 의견은 달랐다. 아파트에서는 도저히 답답하고 신경 쓰여서 못살겠으니, 주택으로 가자고 했다. 어린 시절 내내 주택에서 자란 그는 아파트를 벗어나고 싶어했다.


사실 나도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단독주택에서 자랐다. 그럼에도 살아 보니 느껴지는 아파트의 여러 장점들을 포기하고 불편하고 번거로운 주택으로 가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못살겠다고 하니 어쩌겠는가. 결혼준비를 하는 사이 틈이 날 때마다 이사를 갈만한 집들을 물색했다. 이 기나긴 여정은 다음 편에서 좀 더 자세히 다뤄보기로 하고,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조건과 예산과 일정에 잘 맞아 떨어지는 집을 샀고, 무사히 이사를 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반드시 필요한 법적 절차가 한 가지 있었으니, 바로 ‘혼인신고’였다. 연인, 결혼 전제로 교제 중인 예비 부부, 신혼부부 세 가지 상황에서 각각 집을 구해 보니, 단연 신혼부부일 때 더 많은 복지와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나와 그의 애정 관계나 생활은 같이 사는 연인일 때나 예비 부부일 때나 신혼부부일 때나 큰 차이가 없었음에도, 혼인신고를 통해 법이 인정하는 관계가 되느냐 마느냐에 따라 이자와 대출 한도가 달라졌다. 티끌 같은 자본금으로 집을 사려는 큰 꿈을 품은 우리는 최대한 많은 돈을 은행으로부터 받아내야 했고, 그러려면 반드시 혼인신고를 해야 했다.


내심 아이가 생기기 전까지는 법적으로는 미혼인 상태로 지내고 싶었다. 그게 아니면 결혼 1주년이나 3주년 기념으로 뭔가 행사처럼 혼인신고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잔금 실행일 전에 우리의 혼인 관계가 증명이 되어야 하니 어쩔 수 없었다. 결국 결혼 12일 만에, 점심 시간에 회사를 탈출해 후다닥 혼인신고를 했다. 시청 한 구석의 포토존에서 멋도 없는 인증샷을 남기고 나와 소바를 먹었더랬다.


신혼부부에게 제공되는 각종 어드밴티지를 최대한으로 활용한 끝에 무사히 집을 살 수 있었지만 어쩐지 입맛이 썼다. 저출생이 심각한 문제고, 해결을 위해 청년층에 안정적인 주거 환경을 제공해야 하고, 그래서 저금리 장기 대출 상품으로 집을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겠지만, 뒤집어 생각해 보면 남자와 여자가 만나 부부가 되어 아이를 낳고 꾸리는 것만이 ‘정상 가정’이고, 그 가정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을 사회의 새로운 구성원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뿌리 깊은 편견이 그대로 드러나는 제도 아닌가.


우리가 만약 동성 연인이었다면, 연인이 아니라 아주 친한 친구이고 여생을 같이 살고 싶어서 집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동거 상태에서 집만 함께 얻고 싶었다면 꼬박꼬박 세금 내며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한 나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동반자법이니 생소한 개념까지 가지 않더라도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가족의 정의가 조금 더 유연한 것이 되어야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형태로 삶을 영위하면서 조금 더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어쨌든 나라가 내미는 당근을 순순히 받아 들인 나는 결혼 12일 만에 법적으로도 남편이 있는 여자가 되었고, 그 대가로 내 인생 첫 집이자 우리의 소중한 신혼집을 얻게 되었다.


뭐, 나쁠 거야 아무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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