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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해정 Aug 08. 2018

해운대 로맨스

누구나 바다에 얽힌 영화 같은 일 하나쯤은 있으니까 

대학 4학년. 영화산업잡지에 인턴기자로 일했다. '초짜'가 할 수 있는 일은 적었다. 선배가 한 인터뷰 녹취를 풀거나 독립영화관을 찾아가 관리자에게 국가가 어떤 지원을 더 해줬으면 좋겠는지를 조사했다. 월급은 적었으나 즐거웠다. 기자라고 적힌 명함도 나오고 시사회로 공짜 영화까지 볼 수 있었으니까.


10월, 부산에 가다 

일 때문은 아니었다. 외국에 있는 대학에서 아시아영화를 전공하는 교수와 학생들이 부산국제영화제에 오는데, 너도 영화제 분위기도 볼겸 와서 놀라는 선배의 권유였다. 거절할 이유가 있나. 영화 배급사에서 일하는 동네 언니의 숙소도 있고 기차표만 끊으면 됐다. 게다가 부산은 처음이었다. 고층빌딩을 뒤로한 해운대 풍치가 그렇게 멋지다던데. 어떤 집에 가도 음식은 맛깔나며, 영화제 기간엔 운이 좋으면 술을 마시는 배우를 노점에서 볼 수 있다지? 마음이 두근거렸다.  


달이 뜬 바다, 지글지글 익는 꼼장어, 해변을 보고 마시는 맥주, 레드카펫을 걷는 장동건의 후광. 내 기대보다 부산은 더 많은 것을 내어주었다. 그리고 하나 더.  


낮에는 영화를 보고 밤에는 외국에서 온 학생들과 어울렸다. 선배와 교수가 친한 사이고 오랜만에 만난 터라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나는 사람 수를 세어 맥주를 주문하고 부지런히 숟가락과 젓가락을 챙기는 일을 했다. 



외국에서 온 학생 중에는 J도 있었다. 영화를 전공하는 학생은 아니었다. 교수의 부탁으로 통역하러 온 한인 유학생이었다. 우리는 행사장이나 술집을 옮겨 다니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어가 불편한 내가 심심할까 봐 일부러 말을 시킨 걸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대화는 그림을 그리듯 멈춤이 없었다. 늘 사람들과 함께였지만, 나는 꼭 우리 둘만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가 좋았다. 반짝이는 해변과 맛있는 술, 낮에 보고 온 영화의 낭만. 이런 모든 게 내 심장을 파르르 하게 만들었나보다. 부산영화제가 365일 이어지기를, 나는 바랐다. 


그러나 이런 마음을 전할 기회는 없었다. 나도 그들도 이제는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나는 부산의 마지막 날, 그들은 한국의 마지막 날이어서 술자리는 늦게까지 이어졌다. 분주함 속에서 둘만 이야기할 기회를 찾았으나 쉽지 않았다. 잠깐 한눈 판 사이, 그는 어느새 술에 취해 픽 쓰러져 있었다.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부축을 받아 숙소로 돌아가는 뒷모습만 쳐다봐야했다. 차라리 내가 먼저 취할 것을. 


그가 없이도 술자리는 이어졌다. 마지막 건배를 하고 짐을 꾸릴 때쯤, 내 이름과 번호를 적은 쪽지를 그와 같은 숙소를 쓰는 외국인 학생에게 주었다. 


숙소에 가면 J에게 전해줄래?


그리고 나는 숙소로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르는 번호로 전화벨이 울렸다. 

지금 시각이면 그들이 숙소로 돌아갔을 때인데. 벌써 술에 깼나? 내 쪽지에 놀란 걸까? 


여보세요?


나 호텔에 잘 도착했어.


전화를 건 사람은 J가 아니라 그 외국인 학생이었다. 내 영어가 짧았는지, 그도 취했는지 내가 그에게 번호를 주었다고 오해하고 있더라. 네가 아니라 J라고 이름 기억 안나냐고 따지지도 못한채 어영부영 인사하고 전화를 끊었다. 



부산이 우릴 다시 부를 확률 

그다음 해 다시 부산을 찾았다. 아시아에서 제일 크다는 영화제는 변함없이 많은 사람을 불러 모았다. 이번엔 친구들과 함께였다. 백사장에서 맥주를 마시며 작년에 있었던 티끌 같은 로맨스를 들려주며 영화제의 밤을 만끽했다. 


그런데 거기서 선배를 다시 만났다. 

선배는 해외에서 아시아영화를 가르친다는 교수님을 만나러 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대학 학생들도 왔어요? 그러면 작년에 그 통역하던 친구도 왔어요? 
왔어. 인사하러 갈래? 


J를 다시 만났다. 서로를 기억한 우리는 어찌나 놀랐던지. '어제 헤어진 것 같다'고 말하며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해만 하나 바뀌었을 뿐, 해운대도, 그의 짧은 머리도, 흰 피부도 그대로였다. 


나와 J는 어떻게 됐을까. 티끌에 티끌 하나 더 보탠 로맨스는 여기까지다. 작년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내 마음을 내비쳤지만, 그는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아무렇지 않게 (그러나 손은 떨면서) 통역이나 뭐 필요한 일이 있을 수 있으니 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 큰 벽으로 다가왔다. 우리가 만날 일이 없다는 게 어쩐지 짐작되었다. 


짐작은 맞았다. 한 달이 지나고 서울에서 택시에 휴대폰을 두고 내렸다. 위치추적을 해보니 마지막 위치가 택시 차고지 근처여서 경찰에 신고까지 했건만 마침 G20 때문에 인력이 부족해 휴대폰 분실 수사는 어렵다는 솔직한 답변만 얻었다. 휴대폰에 J의 연락처가 있는데. 아직 한 번도 연락해보지 못했는데. 그렇게 끈이 끊어졌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봄 바람 때문인지 사내 웹진을 담당하는 해외 필자들이 사랑과 관련한 글을 많이 보내온다. 이번 호의 제목을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를 그대로 빌려왔다. 사랑 이야기는 뻔하지만 늘 간지럽다. 메인 기사로는 멕시코 과나하아토 여행기다. 인디언 언어로 '개구리 언덕'이라 불리는 이곳은 멕시코판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가 서린 곳이다.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둔 두 집의 남녀가 사랑에 빠지지만 둘을 반대한 여성의 아버지가 청년을 죽이면서 비극으로 끝난다. 하지만 후대의 사람들은 골목의 두 사람을 영원한 사랑의 신으로 숭배한다. 골목의 계단에서 키스하면 그들이 영원한 사랑을 맺어준다고 믿는다. 


웹진에 해운대 로맨스를 남겼다. 실패한 통역 탓으로 돌리고 싶은 내 러브 어페어. 언젠가 이 일을 차분히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쓰고 나니 식상하다. (사랑 이야기는 늘 뻔하다니까요.) 그날 찍은 해운대 사진도 다시 꺼내본다. 부산 출신에게도, 부산 출신이 아니더라도 이곳은 참 특별한 풍경을 보여준다. 여러분도 이 바다에 서린 영화 같은 일이 하나쯤 있지 않은가. 날이 참 더운 요즘, 바다에서 맞던 짭짤한 바람이 그리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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