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인 유전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진화
이기적 유전자는 진화의 주체, 진화의 단위가 개체나 종이 아닌 유전자라고 주장하는 책이다. 유전자를 중심에 놓고 그 관점에서 진화를 바라보면 개체 혹은 종의 관점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웠던 여러 가지 현상, 예를 들어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생물의 특이한 형태나 생활양식, 구애와 번식 방법, 이타적인 행위 등을 모두 설명할 수 있기에 이제 개체나 종이 아닌 유전자의 관점에서 진화를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저자가 정의하는 유전자는 '여러 세대에 걸쳐 존속할 가능성이 있는 염색체의 작은 토막'이다. 물리적으로 정확하게 유전자의 스펙을 정의해 놓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향후 10세대 이상 존속할 가능성이 80% 이상인 뉴클레오타이드 4쌍을 묶은 1.36nm짜리 염색체 토막’과 같은 식으로 정의하지는 않는다. 저자는 각 토막의 크기가 일정할 것이라고 가정하지도 않는다. 유전자에 따라 그 크기가 다를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며, 책 제목으로 '약간 이기적인 염색체의 큰 토막과 더 이기적인 염색체의 작은 토막'을 고려했다고 하기도 한다.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과연 개체나 종의 관점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점들이 유전자의 관점에서는 깔끔하게 설명된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때 저자의 논리를 받쳐주는 핵심 가정이 바로 '유전자는 이기적이다'라는 것이다. 주의할 점은 유전자가 자기가 생존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유전자는 의식적이거나 의도적이지 않다. 미래에 대한 계획 같은 것도 없다. 그저 존재할 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기적이라는 것일까?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유전자가 이기적이라는 것은 이기적인 특성을 갖고 있던 유전자가 경쟁에서 살아남았다는 뜻이다. 결과론적 이야기인데, 최초에는 이타적인 특성을 갖고 있던 유전자도 존재했을 수 있으나 그런 유전자는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유전자들이 다른 유전자를 제치고 살아남아 더 많은 복사본을 남겼고, 그 많은 복사본들이 다시 다른 유전자들을 제치고 살아남아 더 많은 복사본을 만들며 여러 세대에 걸쳐 마치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은 것처럼 번창하면서 결과적으로 유전자는 이기적인 특성을 갖게 됐다고 한다(그 과정에서 자신과 똑같은 특성과 전략을 가진 유전자와도 잘 살 수 있어야 했다는 등 여러 세부 전략도 설명된다).
결국 이 책은 ‘진화는 유전자 단위로 이뤄지며 유전자는 이기적이다’라는 주장과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근거로 구성돼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근거는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실제 사례들이다. 저자는 직접 관찰했거나 다른 연구자가 관찰해 발표한 여러 생물에 관한 자료를 준비해 놓았다. 특히 진화를 개체나 종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설명하기 어려운 사례가 주로 등장한다. 혈연관계에 따라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우리 인간의 사례가 등장하기도 하고, 뻐꾸기 같이 널리 잘 알려진 동물 사례가 나오기도 하며, 자기 여왕의 목을 자르는 다소 충격적인 개미들 이야기도 나온다(이 부분은 마치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을 보는 것 같은 재미가 있다).
저자는 이와 같이 다양한 생물들의 모습이나 습성을 자세히 묘사한 뒤 이기적인 유전자 관점에서 진화를 바라보면 이런 사례들(이타적으로 보이는 사례들까지도!)이 논리적으로 잘 설명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읽다 보면 수긍하게 된다.
두 번째는 논리적인 근거들이다. 저자는 죄수의 딜레마나 ESS(evolutionarily stable strategy,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와 같은 여러 가지 논리적인 틀을 이용해 사고 실험이나 컴퓨터를 이용한 시뮬레이션 실험을 진행한다. 이를 통해 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유전자 단위의 진화가 어떻게 진행돼서 현재의 생물이나 생태계와 같은 모습을 만들어 낼 수 있었는지 살펴본다. 당연하겠지만 이런 방식의 근거들은 실제 사례보다는 증거 능력이 떨어지며 읽는 재미도 살짝 덜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이와 같은 근거와 논리에 기반해 최초에는 세포의 형태도 갖추지 못하고 원시 수프를 떠돌아다니던 유전자들이 어떻게 지금과 같은 고등 생물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지 설명해 나간다. 그 과정에서 특히 흥미로웠던 지점은 생물의 번식 방법과 기생 및 공생을 엮어서 왜 몇몇 유전자들이 서로의 운명을 함께 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게 됐는지 설명하는 부분이었다. 운반자와 덜거덕거리는 로봇, 확장된 표현형 등 참신하면서도 논리적으로 딱 들어맞는 새로운 개념을 하나씩 추가하면서 설명해 나가는데 다 읽고 나면 이 가설을 제칠 수 있는 더 논리적인 대안이 등장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또 하나 이 책에서 꼭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게 하나 있다. 바로 밈(meme)이라는 단어다. 밈이라는 단어는 리처드 도킨스가 이 책에서 처음 사용한 단어다. 자기를 복제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진화할 수 있는 게 꼭 DNA만은 아닐 것이라며 그 강력한 후보로 소개한 게 바로 밈이다.
도대체 유전자는 무엇이 그리 특별할까? 그 해답은 이들이 복제자라는 데 있다. 물리학의 법칙은 우리가 이를 수 있는 전 우주에 적용된다고 생각되고 있다. 생물학에도 이에 상응하는 보편타당성을 가지는 원리가 있는 것일까? 우주 비행사가 저 멀리 떨어진 행성에 날아가 생명체를 찾는다면 그는 우리가 상상도 못 할 기묘하고 희괴한 생물체를 찾아낼지 모른다. … 화학반응에 의존하지 않고 전자 회로를 기초로 한 생물이 발견되었다고 할 때, 이들 모든 생물체에 적용될 수 있는 일반 원리는 없는 것인가? 물론 나는 그 답을 모른다. 그러나 만약 내기를 해야 한다면 나는 하나의 근본 원리에 돈을 걸 것이다. 바로 모든 생명체가 자기 복제를 하는 실체의 생존율 차이에 의해 진화한다는 법칙이다. 우리의 행성 지구에서 자기 복제를 하는 실체로 가장 그 수가 많은 것은 유전자, 즉 DNA 분자다. 어떤 다른 것이 그 실체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가령 그와 같은 것이 존재하고 다른 여러 조건이 충족된다면, 이것이 진화 과정에 기초가 될 것은 거의 필연적이다.
다른 종류의 자기 복제자와 그 필연적 산물인 다른 종류의 진화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아주 먼 세계로 여행을 떠나야만 하는 것일까? 내 생각에, 신종의 자기 복제자가 최근 바로 이 행성에 등장했다. 우리는 현재 그것과 코를 맞대고 있다. 그것은 아직 탄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이며 자신의 원시 수프 속에 꼴사납게 둥둥 떠 있다. 그러나 이미 그것은 오래된 유전자를 일찌감치 제쳤을 만큼 빠른 속도로 진화적 변화를 달성하고 있다.
새로이 등장한 수프는 인간의 문화라는 수프다. 새로이 등장한 자기 복제자에게도 이름이 필요한데, 그 이름으로는 문화 전달의 단위 또는 모방의 단위라는 개념을 담고 있는 명사가 적당할 것이다. 이에 알맞은 그리스어 어근으로부터 ‘미멤mimeme’이라는 말을 만들 수 있는데, 내가 원하는 것은 ’진gene(유전자)‘이라는 단어와 발음이 유사한 단음절의 단어다. 그러기 위해서 위의 단어를 밈meme으로 줄이고자 하는데, 이를 고전학자들이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위안이 될지 모르겠지만, 이 단어가 ’기억memory’, 또는 프랑스어 ‘meme’라는 단어와 관련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이 단어의 모음은 ’크림cream’의 모음과 같이 발음해야 한다.
밈의 예에는 곡조, 사상, 표어, 의복의 유행, 단지 만드는 법, 아치 건조법 등이 있다. 유전자가 유전자 풀 내에서 퍼져 나갈 때 정자나 난자를 운반으로 하여 이 몸에서 저 몸으로 뛰어다니는 것과 같이, 밈도 밈 풀 내에서 퍼져 나갈 때에는 넓은 의미로 모방이라 할 수 있는 과정을 거쳐 뇌에서 뇌로 건너 다닌다.
친절하게 어떻게 발음해야 할지까지 정해놓았다. 리처드 도킨스가 창조한 밈은 그야말로 밈 그 자체가 되어 사람들의 뇌에서 뇌로 옮겨 다니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알게 된 것도 밈이라는 단어의 근원이 궁금해서 찾아보다가 알게 된 것이었다.
살다 보면 아래와 같은 생각을 한 번쯤은 하게 된다.
어느 수준의 이타주의가 바람직한가? 가족인가, 국가인가, 인종인가, 종인가, 아니면 전체 생물인가에 대한 인간 윤리의 혼란은 진화론의 입장에서 보면 어느 수준에서 이타주의를 기대할 수 있는가라는 생물학적인 문제와 혼란을 그대로 반영한다. 집단선택론자도 경쟁 집단의 구성원들이 서로 미워하고 옥신각신하는 것에 그리 놀라지 않을 것이다. 경쟁 집단의 구성원은 노동조합원이나 군인들처럼 한정된 자원을 둘러싼 싸움에서는 자기 집단의 편을 든다. 그러나 이 경우 집단선택론자가 어느 수준이 중요한지를 어떻게 정했는가 하는 것은 질문할 가치가 있다. 만약 선택이 같은 종 내의 집단 간이나 다른 종 간에서 일어난다면 왜 더 큰 집단 간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종은 속에 속하고 속은 목에, 목은 강에 속한다. 그렇다면 ‘사자는 포유동물의 이익을 위해’ 영양을 죽이지 않으리라고 예측할 수 없는 것인가? 분명히 포유동물의 절멸을 방지하기 위해서 사자는 영양 대신에 새나 파충류를 사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척추동물 문 전체를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귀류법으로 집단선택설의 난점을 지적하는 것에는 별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개체에 이타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설명해야 하는 일이 아직 남아 있다.
이런 생각은 여러 지점에서 시작될 수 있다. 금연 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며 침을 뱉는 사람을 보면서 시작될 수도 있고, 어렵게 모은 전 재산을 주변 대학이나 고아원에 기부하는 사람을 보며 시작될 수도 있으며,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캣맘을 보면서 시작될 수도 있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나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을 보면서 시작될 수도 있다. 하루 종일 애를 돌보느라 지친 누군가를 보면서 시작될 수도 있고, 지하철 선로에 떨어졌거나 물에 빠진 생면부지의 사람을 구하려고 목숨을 거는 누군가를 보면서 시작될 수도 있으며, 내가 보낸 메신저나 메일에만 답장을 하지 않는 업무 카운터파트 놈의 얼굴을 떠올리며 시작될 수도 있다.
어디서 시작됐든 그 꼬리를 계속 물고 가다 보면 위 인용 문단의 가장 마지막 문장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 그 지점에서 더 꼬리를 물고 들어가는 것이 상당히 어려웠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어느 수준의 이타주의가 바람직한가?’라는 질문에 어떤 답을 내려야 하는지를 판단할 수 없었다. 이쪽으로 생각을 발전시키면 이런 허점이나 오류가 보였고, 다른 쪽으로 생각을 발전시키면 또 다른 허점이나 오류가 보이는 식이었다.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한 우문현답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의아하거나 납득되지 않았던 부분이 있었다. 납득되지 않았던 부분을 발췌하고 그 밑에 왜 납득하기 어려웠는지 기록을 남겨 놓는다.
세포벽은 아마도 유용한 화학 물질을 모아서 온전하게 유지하며 새어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로서 생겨났을 것이다.
여기서 ‘~ 장치로서 생겨났다’는 표현이 조금 거슬렸다. 이 책에서 저자는 유전자에게는 어떠한 목적도 없다는 것을 줄곧 강조하는데 갑자기 이 대목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해서 의아했다.
별로 돌아다니지 않는 동물이나 작은 그룹을 이루어 돌아다니는 동물에서는 자기가 만나는 개체가 누구든 자기와 친척일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자기 종의 구성원이면 누구에게나 친절해라”라는 규칙은 플러스의 생존 가치를 가질 수 있는데, 이는 이 유전자를 갖고 있는 개체에게 이 규칙을 따르도록 하는 유전자가 유전자 풀 속에서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 그런데 물에 빠진 사람을 야생 돌고래가 구조했다는 믿을 만한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물에 빠진 무리 내 구성원을 돕기 위한 규칙이 잘못 사용된 것이라 생각된다. 물에 빠진 무리의 구성원에 대한 정의는 대략 ‘수면 가까이에서 숨을 못 쉬고 허우적대는 기다란 물체’와 비슷할 것이다.
혈연관계에서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사례를 유전자에 기반한 근연도로 설명하는 부분에서 저자가 오류로 분류한 몇 가지 예가 나온다. 돌고래가 사람을 구한 사례나, 남의 자식을 입양해 키우는 몇몇 동물들의 사례 혹은 다른 암컷의 새끼를 훔쳐서 보살피는 원숭이 사례 등이 나오는데 저자는 이를 반증 사례가 아니라 오작동 사례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반증 사례라고 해도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느 쪽도 자신이 맞다고 확실하게 증명할 수 없는 사례인 것 같다.
피임은 종종 ‘부자연스럽다’고 비난받는다. 그렇다. 극히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복지 국가도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우리의 대부분은 복지 국가를 매우 바람직한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부자연스러운 복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부자연스러운 산아 제한을 실행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연 상태에 있는 것보다 더 비참한 결과에 이를 것이다.
복지 국가란 지금까지 동물계에 나타난 이타적 시스템 중 아마도 가장 위대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이타적 시스템도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 그것은 그 시스템을 착취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이기적 개체에게 남용당할 여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키울 수 있는 것 이상의 아이를 낳은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무지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므로, 그들이 의식적으로 악용을 꾀한다고 보긴 어렵다. 다만 나는 다수의 아이를 낳도록 의도적으로 선동하는 지도자나 강력한 조직에 대해서는 그 혐의를 풀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은 이 책의 논리와 관련된 문제는 아니고 다산한 사람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남겨 놓은 것이다. 현대 사회는 모든 영역에서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속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그 누구도 ‘자기가 키울 수 있는 아이의 수’를 정확히 정의할 수는 없다. 아니, 정확히가 아니라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도 없다. 따라서 이 문제는 이미 개개인의 지식, 개개인의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운의 영역으로 넘어갔다고 생각한다. 이런 상태에서 자기 혼자 시간을 초월한 관점에서 조망하는 척하며 지레 ‘대개의 경우 무지 때문’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매파와 비둘기파, 경솔형 암컷과 조신형 암컷, 성실형 수컷과 바람둥이형 수컷
앞서도 말했지만 전략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현실을 너무 단순화하면서 수치도 작위적으로 부여한 느낌이 들어 살짝 거부감이 든다. 물론 한편으로는 이와 같이 단순화하지 않는다면 이론을 만들어 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추측건대 우리의 유전자 하나하나가 공생 단위체라는 보다 과격한 생각이 언젠가는 받아들여질 것이다. 우리는 공생하는 유전자들의 거대한 집합체인 것이다. 누구도 이에 대한 ‘증거’를 실제로 들이댈 수는 없겠지만, 앞서 내가 설명했던 방법과 마찬가지로, 이 가설에 대한 증거는 우리가 유성 생식 생물의 유전자 작용을 생각할 때의 바로 그 사고방식 속에 이미 내재하고 있다.
이 부분은 논리라기보다는 워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구도 이에 대한 ‘증거’를 실제로 들이댈 수는 없겠지만, …. 이미 내재하고 있다.'는 표현은 그동안 종교 지도자에게서 많이 들은 표현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쪽은 더 연구할 여지가 남아 있고, 신은 그런 여지마저 없다는 차이가 있기는 하다.
내가 보기에 로즈 등은 우리가 만든 케이크를 우리가 먹고 있다고 비난하는 것 같다. 우리가 ‘유전자 결정론자’이거나 ‘자유 의지’를 믿거나 둘 중 하나이지, 둘 다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 유전자가 인간 행동에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수준에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견지와, 그 영향력이 다른 요인에 의해 무효가 되거나 전혀 반대 양상이 나타나거나 하는 식으로 조정될 수 있다는 견지를 동시에 갖는 것에는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점이다.
...
성적 욕구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가 있었다는 것에도 동의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아마도 사회적으로 필요하다 싶을 때에는 별문제 없이 성적 욕구를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이원적이 아닌가? 분명히 아니다. 그리고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의 폭정에 대한 반역’을 내가 옹호하는 것도 이원적이 아니다. 우리의 뇌는 우리 유전자의 명령에 반항할 수 있을 만큼 유전자로부터 떨어져 있고 독립적이다. 이미 살펴본 대로, 우리가 피임법을 사용하는 것도 작은 반역이다. 우리가 큰 규모의 반역 역시 꾀하지 못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저자는 이원적이 아니라 서로 독립적이기 때문에 유전자가 유의미한 수준에서 영향력을 주는 것과 그 영향력에 반하는 행동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 선뜻 납득되지 않았다. 차라리 앞서 살펴본 돌고래가 인간을 구하거나 원숭이가 다른 암컷의 새끼를 납치해 키우는 사례처럼 오류에 가깝다고 설명했다면 어땠을까? 혹은 성적 욕구를 억제하는 유전자가 번창하고 있다는 방식으로 설명했으면 조금 나았으려나? 잘 모르겠다. 아무튼 난 지금 위 인용 문단에 나오는 로즈와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저자가 자신이 만든 케이크를 자신이 먹고 있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납득하기 전까지 그렇게 비판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는 것 같다.
몇 년 전에 ‘만들어진 신’을 아주 즐겁게 읽었고, 이번에 ‘이기적 유전자’도 아주 즐겁게 읽었다. 책에서 소개한 저자의 또 다른 저서 ‘확장된 표현형’까지 추가로 질렀다. ‘만들어진 신’을 읽고 나서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조금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품고 있던 여러 의문이 내가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해소되는 것 같았다.
다음 발췌 문단은 이 책뿐 아니라 리처드 도킨스라는 사람의 성격이 아주 잘 드러나는 문단인 것 같아 가져왔다.
일부 사람들, 심지어 종교가 없는 사람들조차 내가 심슨의 말을 인용한 것에 화를 냈다. 처음 읽었을 때 이것이 헨리 포드의 “역사는 대체로 터무니없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말처럼 매우 교양 없고, 눈치 없고, 옹졸한 소리로 들린다는 것에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종교적인 해답(이것에 대해서는 나도 잘 알고 있으니 나한테 편지를 보내느라 우표를 낭비하지는 말길 바란다)을 차치하고라도, 혹 당신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든가, ‘생명에는 의미가 있는가’라든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다윈 이전 시대에는 어떤 답을 했을까 고심하게 되었을 때, 당신은 (상당한) 역사적 의미를 제외한, 가치가 있다고 인정할 만한 답을 생각해 낼 수 있었을까? 세상에는 정말 말 그대로 잘못된 것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는 것들이 있는데, 이러한 질문에 대한 1859년 이전 해답들이 바로 그렇다.
‘우표를 낭비하지 말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상당히 오래된 책이다. 1975년에 출간된 책이니 나보다 나이가 한참이나 많다. 현대에 들어와서 그 어느 분야보다도 역동적으로 빠르게 변화하는 생명 과학 분야의 책이, 그것도 증명된 사실을 쓴 게 아니라 가설을 주장하는 책이 그 오랜 시간을 반증되지 않고 버티며 신선함까지 유지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대단한 책인지 알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전혀 다른 방면에서의 인사이트도 얻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아래와 같은 문단을 보자.
이 책을 집필하는 시점에서 사용자가 가장 쓰기 편한 컴퓨터는 애플 매킨토시라고 널리 여겨진다. 매킨토시는 진정한 하드웨어 기계(다른 모든 컴퓨터와 마찬가지로 매우 복잡하여 인간의 직감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메커니즘을 지닌 기계)를 다른 종류의 기계, 즉 인간의 뇌와 인간의 손에 꼭 맞도록 특별히 설계된 가상 기계처럼 보이게 하는 일련의 내장 프로그램 덕분에 성공했다. 매킨토시 유저 인터페이스라고 불리는 가상 기계는 분명 기계다. 버튼도 있고, 하이파이 오디오 세트와 같은 슬라이드 컨트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가상 기계다. 버튼과 슬라이더는 금속과 플라스틱으로 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화면상에 보이는 것으로, 당신은 화면상의 가상적인 손가락을 움직여서 버튼을 누르거나 슬라이드시키거나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당신은 기계를 조종하는 주체라고 느낀다. 왜냐하면 당신은 물건들을 자신의 손가락으로 움직이는 것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지난 25년 동안 나는 여러 기종의 컴퓨터를 사용해 보고 프로그램도 짜 넣어 봤지만, 매킨토시를 사용하는 것은 이전의 어떠한 기종의 컴퓨터보다 질적으로 다르다고 증언할 수 있다. 매킨토시를 쓰는 데는 별다른 노력이 필요치 않으며 상당히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마치 이 가상 기계가 자신의 몸의 일부인 것 같다. 이 가상 기계는 놀라울 정도로 당신이 매뉴얼 대신 직감을 따를 수 있게 한다.
'매킨토시를 쓰는 데는 별다른 노력이 필요치 않으며 상당히 자연스럽게 느껴진다.’라는 문장을 읽으며 문득 Git이 떠올랐다. 나름 Git을 이용한 지 연단위로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자연스럽게 사용한다는 느낌이 잘 들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딘가 직관적이지 않다. 아무래도 인간의 뇌와 인간의 손에 꼭 맞도록 잘 설계된 것 같지 않은 느낌이다. 이런 불만을 토로하는 게 비단 나뿐만은 아니다. Git은 그저 오픈소스를 폭발적으로 사용하게 된 트렌드에 잘 올라탄 것일 수 있다. 언젠가 더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분산 버전 관리 협업 툴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그렇다. Git이 도대체 익숙해지지 않아서 불만을 한 번 적어봤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역설적으로 ‘신’이라는 존재가 떠오른 한 대목도 가져와 봤다.
우리가 이 점을 명심하는 하나의 방법은, 오늘날에도 한 유전자가 표현형에 미치는 효과가 모두 그것이 위치하는 개체의 몸속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그리고 사실상 유전자는 개체의 체벽을 통과해 바깥세상에 있는 대상을 조종한다. 그 대상 중 어떤 것은 무생물체고, 어떤 것은 다른 생물이며, 또 어떤 것은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
저자가 말하는 확장된 표현형이 극한으로 진화하면 그게 바로 ‘신’이 아닐까? 개체의 체벽을 통과해 바깥세상에 있는 대상을, 그것도 무생물과 생물을 가리지 않고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대상까지 조종하는 능력이 극한으로 발전하면 그것이야말로 신이 아닐까? 물론 확장된 표현형에서 발전한 신은 전혀 자비롭거나 현명하거나 책임감 있는 신은 아닐 것이다.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나 더 보이즈의 홈랜더에 가깝겠지.
이렇게 보니 문득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생각나기도 한다. 아무튼 저자가 무슨 연유에서인지 이 책과 어울리지 않게 다소 감상적으로 남긴 아래 문단을 옮기며 마치겠다.
우리가 비록 어두운 쪽을 보고 인간이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라고 가정한다고 해도, 우리의 의식적인 선견지명, 즉 상상력을 통해 장래의 일을 모의 실험하는 능력이 맹목적인 자기 복제자들의 이기성으로 인한 최악의 상황에서 우리를 구해줄 것이다. 적어도 우리에게 당장 눈앞의 이기적 이익보다 장기적인 이익을 따질 정도의 지적 능력은 있다. 우리는 비둘기파의 공동 행위에 가담하는 것이 장기적 이익이 될 수 있음을 이해할 능력이 있으며, 이 공동 행위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그 방법을 서로 논의할 능력이 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낳아 준 이기적 유전자에 반항하거나, 더 필요하다면 우리를 교화시킨 이기적 밈에게도 반항할 힘이 있다. 순수하고 사욕이 없는 이타주의라는 것은 자연계에는 안주할 여지도 없고 전 세계의 역사를 통틀어 존재한 예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육성하고 가르칠 방법도 논할 수 있다. 우리는 유전자의 기계로 만들어졌고 밈의 기계로서 자라났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창조자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지구에서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의 폭정에 반역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