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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나은 Mar 25. 2023

어떤 장점은 변하지 않는 상수처럼

원가족에게 나쁜 일이 생기면 나는 그 소식을 남편에게 전하고 싶지 않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나 사고가 나와 내 가족에게 찾아오면 과거를 돌아보게 된다. 그 불행이 꼭 과거의 잘못으로 생겨난 결과로 느껴질 때가 있다. 나 혼자만 알고 끝내고 싶은 내 부모의 흠을 굳이 남편에게까지 까발리고 싶지 않은 마음. 남편은 어떤 일이든 나에게 숨기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면서 나는 남편에게 말하지 않음으로 비밀을 만든다. 비밀을 만들었다면 잘 숨길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나는 내 감정이 얼굴에 모두 드러나는 편이다. 남편은 이 사태의 전말을 듣지 않아도 알고 있을 것이다. 아내가 꺼내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남편은 묻지 않는다.


연애시절의 나는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하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첫 만남에서 남편에게 큰 매력을 느끼진 못했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몇 번 만나보다가 둘이 함께 하는 시간이 편안하게 느껴지며 그냥 한번 만나볼까 싶었다. 그러다 어느새 나도 모르는 사이 남편에게 스며들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퇴근 후에도 만나고 주말에도 만나고 매일같이 시간을 보냈다. 그때까지도 내 마음속에 남편이 얼마나 큰 지분을 가지고 있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우리는 미래를 약속 한 사이도 아니었고 서로에게 누군가 더 좋은 사람이 생긴다면 새로운 시작을 선택할 수도 있다고. 그래서 나에게 새롭게 다가오는 이성을 애써 막지 않았다. 연락을 차단하지 않았다. 야심한 시각 데이트 중 나의 전화가 울렸다. 버튼을 눌러 전화를 끊어도 금방 다시 진동 소리가 들렸다. 입장을 바꿔 똑같은 상황이 남자 친구에게 벌어지고 있다면 화를 참지 못했을 것이다. 역시나 남자친구의 표정이 굳는 걸 흘깃 봐버렸다.

"내가 핸드폰을 좀 봐도 될까?"

이런 상황에서도 남자 친구는 예의를 잃지 않았다. 나였다면 상대의 의견 따위는 묻지 않았다. 당장에 핸드폰을 내 앞에서 탈탈 털어 너의 무죄를 증명하라고 요구했을 것이다. 내 요구에 응하는 않는다면 나는 너에 대한 신뢰를 잃었고 너는 나를 속이고 배신했다며 격해진 감정에 이별부터 통보하고도 남았다. 나와는 달랐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에게 너를 한번 만나볼 마음이 있다는 여지를 준 것도 사실이었다. 그와 나눈 대화를 본다면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터였다. 나는 보여주기 싫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내가 떳떳하지 못하다는 자백과도 같았다. 나에게 화를 내고 그러다 이별을 통보해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의 예상과 다르게 남자 친구는 말했다.

"다음번에는 이 시간에 다른 남자에게서 전화 오는 일이 없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이 사람과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걸. 결과적으로 우리는 부부가 되었다. 현재의 우리는 같은 기종의 핸드폰을 사용하며 잠금화면의 비밀번호도 같다. 언제든 상대의 휴대폰을 사용할 수 있다. 고속도로를 달리며 데이터무제한 요금제를 사용하는 남편의 휴대폰을 차와 연결해서 음악을 듣는다. 휴게소에 들러 남편이 화장실에 가려 하면 블루투스 연결이 끊어졌다 다시 연결해야 하는 게 귀찮아 남편의 휴대폰 대신 내 휴대폰을 들고 가라고 한다. 퇴근한 남편의 휴대폰 잠금화면을 풀고 남편이 오늘 일하며 몇 보를 걸었는지 확인하며 걸음 수만큼의 캐쉬를 짤랑짤랑 모은다. 인터넷서점 어플에 로그인해 출석체크를 하고 할인쿠폰을 받는다. 나와 다르게 남편은 나의 핸드폰에 별 관심이 없다.


언젠가 큰 아이 친구들 엄마 모임에서 이런 질문이 나왔다. 이 엄마들은 아이가 3살 때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어린이집을 함께 보내며 서로 인연이 닿았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엄마들. 약속을 정하지 않아도 오며 가며 자주 마주치는 사이다.

"만약에 그러니까 정말 만약에 이 대화방에 있는 사람의 어떤 남편이 바람을 폈다. 그 상황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사실을 당사자에게 알려줘야 할까요 모른 척해야 할까요...? 내 남편의 일이라면 알려달라는 사람 손?"

나는 고민하지 않고 손을 들었다. 남편이 바람을 핀 상황보다 그걸 내 주변 사람들은 다 알고 있고 나만 모른 상태로 바보가 된 것 같은 상황이 더 끔찍하다. 현실을 제대로 알고 앞으로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싶다.  


시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남편은 일을 하며 생겼던 에피소드를 나에게 이야기해 준다. 이야기를 듣다 보면 가끔 시아버지의 말씀이나 행동이 며느리인 나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그럴 땐 이야기를 듣다가 화가 올라와 남편의 말에 긍정적인 호응을 할 수 없다. 하지만 섣불리 화를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화를 내는 나를 보면서 남편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아내가 싫어하는구나 기분 나빠하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입을 닫아 버릴까 봐. 그래서 내가 모르는 일들이 점점 많아질까 봐. 남편과 다르게 알고 싶은 게 있다면 남편이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묻는다.


남편과 나는 비슷한 듯 다르다. 모든 걸 다 알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내 성격. 우리 가족에게 생기는 일이나 가족이 느끼고 있는 감정까지도 전지적 작가시점처럼 알고 싶어 하는 나. 그게 현실에서 가능한 일인가? 모든 걸 투명하게 알게 되었다 한들 그게 과연 득일까? 안다고 해서 달라질 일도 아니라면 차라리 모르고 넘어갔다면 좋았을 일도 있을 텐데. 어쩌면 이것은 내 안의 믿음의 문제일까? 남편이 나를 믿고 기다려주는 마음이 나보다 크다는 것은 알겠다. 내가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묻지 않는 남편에게 가끔 고맙다. 결혼 후에도 변함없이 내가 지키고 싶어 하는 비밀을 비밀로 남겨줘서 좋다. 정말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는 그것을 감추지 위해 가끔은 진실이 아닌 거짓을 이야기하게 되는 경우도 있으니까. 묵비권을 행사하는 것과 거짓말을 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반대로 남편의 지키려고 하는 영역을 아내인 나는 호시탐탐 침범하려고 해서 미안할 때도 있다. 아무리 부부사이라 해도 우린 엄연히 개인과 개인으로 독립적인 인격체인데 말이다. 미안해하면서도 여전히 알고 싶어 하는 나라는 사람. 사람 참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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