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끝나는 대로 서둘러서 집으로 왔다. 나의 퇴근 시간과 상관없이 늘 저녁을 하기 싫어하는 아내지만 퇴근 예상 시간 연락을 하지 않으면 크게 화를 낸다. 일이 언제 끝날지 가늠이 되지 않는 날이 있는데 오늘이 그랬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시간은 6시 32분. 직장에 다녔다면 퇴근하고 집에 왔을 시간보다 일찍 집에 도착했다. 아내는 내가 들어와도 현관으로 나와볼 생각이 없다. 내가 아내가 있는 곳으로 찾아가서 다녀왔다는 인사를 건넨다. 아내가 화가 났다면 대답이 없을 거다. 두 달 가까이 주말도 없이 새벽같이 출근해서 퇴근하는 일정을 반복하며 내 개인 시간은 거의 사라졌다. 나도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 육아에 참여하고 있지만 주말에 두 아이 육아를 혼자서 하고 있는 아내의 성에는 차지 않는 모양이다.
“은행 서류 출력해 왔어?” 첫째의 적금 만기가 돌아온다며 아내가 두 달 전부터 미성년자 은행업무에 필요한 서류를 사무실에서 출력해오라고 했었다. 오늘까지 미션을 완료해야 했는데 계속 정신이 없어서 챙기지 못했다. “그럴 줄 알고 나도 저녁 안 했어. 자장면 배달시킬게.” 아내가 웃으며 이야기한다. 나도 따라 웃는다. 내가 또 깜빡할 걸 아내는 예상했다. 배달음식 맛도 없고 비싸기만 해서 싫다. 아내가 화내지 않고 이 상황을 넘길 수 있다면 집밥을 먹지 못하는 게 뭐 대수인가 싶다. 전에는 아내에게 배달음식이나 외식 말고 집밥을 먹자고 자주 말했었다. 그런 나에게 아내는 집밥이 먹고 싶으면 내가 직접 요리를 하면 된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퇴근하고 돌아오면 아내가 차려준 밥상을 받고 싶었던 것 같다. 결혼하고 햇수로 6년을 살면서 지켜본 아내는 마음이 내킬 때만 요리를 하는 것 같다. 내키지 않을 때 해달라고 하면 싸움으로 이어진다는 걸 이제 안다. 아내가 만들어주는 음식보다는 평화를 선택했다.
아이들이 등원하면 아내에겐 자유시간이 주어진다. 그때 운동도 하고 사람들도 만나고 가끔 낮잠도 잔다. 지금 나에게 간절히 필요한 시간. 그 시간을 누리면서 아내는 여전히 불만이 있다. 하루는 불만 가득한 아내에게 나도 화가 나서 이야기했다.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왜 그렇게 불만이 많냐고. 아내는 내가 화를 내면 자기는 더 크게 화를 내는 스타일이다. 자기가 진짜로 하고 싶은 것, 만나고 싶은 사람은 모두 서울에 있는데 자기가 뭘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있냐며 따진다. 아내는 지금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서 즐겁게 지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서울에 살고 있다가 내 일을 따라 마산으로 내려온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을 빚처럼 가지고 있다. 마산에서 2년 살고 서울로 돌아가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못하고 있다. 그런 내가 아내를 이길 수가 없다.
아이들이 잠들고 나서 사무실에 내려가서 서류를 출력해 왔다. 잠이 쏟아지지만 일하고 돌아와 육아 퇴근 후에 바로 잠들기 아쉽다. 거실 소파에 늘어져서 빔프로젝터를 켠다. 전원을 켬과 동시에 소파 맞은편 테이블 뒤에 앉아서 뭔가를 읽는 건지 쓰는 건지 모를 아내가 한마디 한다. “거실에서 TV 볼 거면 빨래 개면서 봐.” 그냥 자러 침실로 들어갈 걸. 누워서 핸드폰이나 볼 걸 그랬나 보다. 골프 예능을 켜 두고 시선은 영상에 고정한 채 소파 한편에 산처럼 쌓인 빨래를 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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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다르게 인식하고 이해하기 위한 장치로 화자가 ‘남자’인 에세이를 써 보는 과제.
가장 가까운 남자 사람이나 남편, 남자 친구, 아버지. 그들의 입장에서 아내인, 여자 친구인, 딸인 나를 표현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