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을 둘러보던 친구는 내 손목을 단단히 붙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주변은 해가 지고 있는 것 같았다. 노랗고 붉고 보라색으로 흐르고 있다. 뛰다 보니 어느새 내 눈높이 아래로는 완전히 어둠이 내렸다. 꽤나 오래 뛰어 큰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늪을 통과하고 바로 주변을 보았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바위나 돌 같은 것들이 무리 지어 있다. 주변을 둘러보니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과 간혹 무리 지어있는 돌무더기만 보였다. 바닥과 돌무더기가 엷은 베이지 색으로 동일하다.
“왜 숨은 거야? 누가 와?”
“글쎄.. 오는 게 아니라 아무도 안 와서 문제지.”
말을 흐리는 친구가 이제는 미덥지 않다.
“다시 물어볼게. 넌 이름이 뭐야?”
“너는 이름이 뭐지?”
“뭐?.. 내가.. 수인이라며.”
이미 알고 있는 이름인데도 순간 이 이름이 너무 어색하고 처음 듣는 단어인 것 같은 느낌. 내 이름이 이렇게 낯설었던가 싶다. 하지만 이 이름도 저 친구가 불러준 거였는데.
“네가 날 그렇게 불렀잖아.”
“그렇지. 그럼 너도 날 이름으로 불러줘. 내가 널 수인이라 부른 것처럼.”
‘이게 대체 무슨 말이지? 난 이 친구 이름을 모르는데? 이름을 지어달라는 건가?’
“아니.. 수인이라..”
“그래, 나도 수인이야. 네가 수인이라 불렀으니까 나도 수인이!”
황당하다. 그런데 더 당황스러운 것은 말을 끊고 내게 자기도 수인이라고 하는 친구가 이상하게 느껴지는 게 아니라 당연하게 느껴지는 내가. 이 혼란함은 얼마가지 못했다. 꽝하는 소음에 너무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하지만 소음과 동시에 이마를 짓누르는 고통에 짧은 비명조차 내지 못했다.
겨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한껏 올라간 눈썹과 미간을 찡그리며 천천히 내렸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소리, 아니 무슨 진동이야?”
소리만 큰 게 아니다.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진동과 귓바퀴를 울리는 진동이 단숨에 왼쪽 눈썹 위에서 부딪히는 것 같다. 누군가가 온갖 화와 분노를 담아 찍어 누르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닌가? 두려움? 아니, 공포스러움인가? 다행히도 고통은 금세 사라졌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주변을 둘러보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대체 뭘까? 아무도 없는데 어디서 이런 굉음이 난 거야?”
자기도 수인이라 불러달라는 친구는 어둠이 낮게 깔린 맞은편을 응시하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나 너무 졸려. 자야 할 것 같아.”
어이가 없다. 굉음이 발생하는 이유도 알 수 없고, 아무도 없어서 여기가 어딘지 여기서 어떻게 나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이 상황에서 잠을 자겠다고?
“무슨 소리야. 여기서 어서 빠져나가야지. 잠이 와?”
벌써 눈을 감고 돌무더기에 몸을 기댄 채 잠이 들어버린 친구. 마치 죽은 것처럼 갑자기 잠에 들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눈을 꿈뻑이며 친구를 천천히 살폈다. 죽은 게 아닐까 싶어 코에 손을 가져다 대기도 했다.
“숨은.. 쉬네.”
밤은 꽤 길었다. 이상하리만치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친구가 잠든 후 나도 같이 잠을 자야 하나 싶어서 옆에 기대어봤지만 잠도 오지 않고 혹여 이 밤에 누군가 와서 우리를 해칠까 봐 잠을 자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을 경계하며 가만히 둘러보았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큰 홀의 깊이감과 늪이 있다는 것은 이 친구가 알려주었다. 그러나 지금 이곳은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과 어디서 굴러왔는지 알 수 없는 돌무더기, 밤이라는 시간뿐이다. 친구와 나 만이 숨을 쉬는 존재인 것 같다. 혹시 늪을 통과한 것처럼 바닥을 통해서 다른 공간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바닥에 납작 엎드려 아까 너무 아팠던 왼쪽 눈썹 위를 바닥과 돌무더기에 대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긴지 알 수 없는 긴 시간이 지났다. 어둠이 더 깊어져 친구와 돌무더기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가 되자 바닥도 돌도 모두 너무 차가워졌다. 내 안에서부터 차갑게 굳어가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곧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촉감에 의지해 옆에 있는 친구를 붙들고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친구에게 속삭였다.
"나 너무 무서워 빨리 일어나."
서서히 여명이 밝아왔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처럼 내 눈높이 정도까지 빛이 차오르자 친구는 눈을 슬며시 뜨며 말했다.
“나 버리지 마.”
“무슨 소리야? 내가 널 왜 버려. 어서 일어나, 아침이야. 여기 빠져나가야지. 나 밤새 춥고 무서웠어.”
꽝-꽝-꽝-꽝-
말을 이어가려 하는데 큰 굉음과 함께 바닥이 흔들렸다. 동시에 왼쪽 눈 위의 고통이 시작되어 머리를 부여잡고 눈을 질끈 감았다.
끔뻑하고 다시 뜨자 굉음은 멈추었지만 친구는 또 졸린 눈으로 돌무더기에 기댄 채 같은 말은 반복한다.
“나 버리지 마.”
“무슨 말이냐고! 빨리 가자-”
애원하듯 말을 이어가는데 친구는 다시 순식간에 잠에 들었다. 순간 소름이 돋아 하늘을 보니 아침이 아니라 저녁이다. 다시 빛이 내려가고 어둠이 차오르고 있었다. 게다가 굉음이 들리기 전에 있던 돌무더기와 다른 돌무더기옆에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정리를 해보자.”
잠에 든 친구를 보며 중얼거렸다.
"밤이.. 되면 친구는 자고 나는 잠이 오질 않는다.
잠자는 걸 막을 수가 없다.
한번 잠들면 아침이 될 때까지 아무리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는다. 죽은 건 아니다.
아침이 되면 굉음이 나고 나는 고통스럽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고 나서 떴더니
다시 밤이 되고 친구는 잠들고 원래 있던 돌무더기에 기대어 있지 않다..?
낮이 없는 것이라면 다른 돌무더기에 기대어 있을 리 없다.
밤새 친구를 지켜보며 함께 본 돌무더기가 어떤 모양이었는지 똑똑히 기억한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순식간에 잠에 들었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굉음과 동시에 친구는 깨어나고 나는 아침에 잠에 든다.
그리고 친구는 나를 다른 돌무더기 옆으로 옮겼다는 말이 된다. 왜 다른 돌무더기로 가야 할까?
돌무더기가 굉음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나? 밤새 아무도 없었다. 우리 말고는.
그런데 무엇이 두려워서 돌무더기에 몸을 기대고 숨는 걸까?
무엇보다 그 말이 이상하다. 버리지 말라니. 내가 왜 버릴 거라 여기는 걸까?
여기에 내가 기댈 사람이라곤 자기밖에 없다는 걸 모를 리가 없는데..."
문득 이상한 장면이 눈앞을 스쳐갔다. 이 친구를 돌이 바닥에서 터져 나오는 어느 곳에 내버려 두고 나 혼자 도망가는 장면이.
“.. 설마.. 나 여기에.. 처음 온 게 아니야? 그리고.. 내가.. 그랬다고? 내가 쟤를 버리고 도망갔다고?”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연신 튀어나온다. 눈앞을 스쳐간 장면과 바람 한 점 없는 이 세계를 비교하며 다시 아침이 오길 기다렸다.
이윽고 아침이 오자 친구는 눈을 살며시 떴다. 나는 눈을 뜰 때 번쩍 뜨는 것 같은데 왜 저렇게 느리게 눈을 뜰까? 혹시 죽어가나? 하는 생각을 하며 친구의 두 눈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 눈에 비치는 내 모습을 마주하기 직전에 친구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저 앞에 보이는 돌무더기 보이지?”
친구가 보는 곳으로 나도 시선을 돌렸다. 지금 몸을 숨기고 있는 이 돌무더기 보다 더 큰 돌무더기가 보였다.
“응. 이것보다 더 크네. 저기로 가면 좀 더 안전하겠다.”
“맞아. 우린 반드시 저기로 가야 해.”
꽝-꽝-꽝-꽝-
그리고 다시 밤이다. 나와 친구는 전날 밤에 기대어있던 돌무더기에서 더 큰 돌무더기로 옮겨가는 중이다. 그래서 내가 눈을 뜬 곳은 돌무더기가 없는, 모든 게 노출되어 있는 바닥이다.
잠에 든 친구를 겨우 일으켜 천천히 걸어갔다. 처음에는 이 친구의 말만 믿고 무언가를 한다는 게 우스웠지만 이곳에서 친구 외엔 믿을 구석도 없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기억, 친구를 버리고 도망쳤던 기억에 미안한 마음도 들었기에 친구 말대로 더 큰 돌무더기로 가기로 했다. 친구는 나와 키가 비슷하지만 잠에 들어있으니 발이 바닥에 질질 끌렸다. 친구도 나도 맨발이다. 바닥에 질질 끌려도 피는 나지 않는다. 나도 돌부리를 밟으면 아플 뿐 외상은 없다. 정말 온 힘을 다해 계속 걸었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돌무더기도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이러다가 돌무더기가 바로 앞에 있는 것도 모른 채 앞으로가 부딪힐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꿍-
“아윽!”
돌부리에 걸려 친구는 그대로 무릎이 꺾이며 바닥에 쓰러지고 나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손과 팔꿈치로 짚으며 넘어져서 부딪히며 타고 올라온 진동이 자연스레 왼쪽 눈썹 위로 전해왔다. 그리고 순식간에 아침이 찾아왔다. 이전과 달리 친구는 순식간에 눈을 번쩍 떴다.
꽝—꽝—-꽝-
꽝-꽝—꽝-꽝——
꽝—꽝-꽝꽝—-
지금까지 들었던 굉음과는 다르게 매우 빠르게 그리고 불규칙하게 진동해 왔다. 당연히 나는 이마를 부여잡고 끔찍한 고통스러움에 온몸을 웅크렸다. 위장까지 꼬이는 듯한 어지러움증도 동반하여 날 껴안은 친구에게 온몸을 의지했다. 친구는 웅크린 나를 덮듯이 껴안으며고 속삭였다.
“잘했어. 날 버리지 않고 여기까지 왔어. 잘했어.”
순간 내가 엎드려 있던 곳 근처의 바닥이 어떤 힘에 의해 분수처럼 터져 나와 큰 돌들이 내 주변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굉음이 내 귀에 더 가까이 다가왔다. 너무 무서워서 더욱 세게 눈을 감았다. 나와 친구 위로 돌무더기가 떨어져 내려오고 있는 걸 느꼈다. 강한 한기와 함께 공기를 무겁게 짓누르며 짙은 그림자가 우리 머리 위로 드리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