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lliott Jun 13. 2021

삼킨







있잖아. 나는 다가오는 얼굴들이 두려운 것 같아. 밝은 얼굴, 친절한 눈동자, 따뜻한 목소리에도 겁을 먹는 이유가 뭘까.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판단되길 원하지 않아. 아무에게도 읽히고 싶지 않은데 ㅡ 그들에게 어설픈 한마디를 꺼내어 놓으면. 너는 A이고 너는 B야. 단정 지어 생각해. 나는 A도 B도 C도 D도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인간인데 누구 하나가 단정 짓고 너는 A야.라고 말해버리면 나는 그 A라는 인간이 되기 위해 마음을 쓰기 시작해. 그들에게 A로 보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지. 그러다 점점 지쳐 가는 거야.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ㅡ 하면서. 그 때문이야. 이제는 닿지 않고 싶은 거야. 가짜의 얼굴로 괜찮아요. 좋아요. 네네. 긍정어를 마구 뿌려대고 싶지 않다는 얘기야. 어느날엔가의 나는 홀로 둥둥 떠다니는 섬 같다는 말을 하곤 했었는데 ㅡ 그때의 난 아무에게도 닿을 수 없는 그 고립감을 괴로워했었는데. 이젠 아닌 것 같아. 차라리 그 편이 낫겠어. 하나의 섬이 되고 싶어 졌어. 이런 내가 이해되니?

 

그치. 난 좀 이상한 여자지. 내 삶을 갉아먹고 있다고 생각해 난. 그 죄책감이 꽤 무거워. 하지만 이런 와중에 나는 내가 밝은 얼굴을 동경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사람들은 말해. 화를 삼키고 말을 삼킨 유머를 삼킨 인간들을 조심하라고 말이야. 그자들은 고약한 냄새를 풍기기 때문에 멀리해야 한다고 말이야. 그러니까 나는 지금 그런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인간이 된 것이 아닐까. 불안한 것 같아. 

혹시 당신도 밝은 얼굴을 동경했나. 나는 모든 것을 삼킬 수가 있었어. 화도. 말도. 어떤 감정들도. 그런데 다만 삼키지 말아야 했던 것은 유머. 그게 아니었을까. 어느 순간 누굴 만나도 유쾌하지 않은 내가 두려워졌어. 나를 물들이고 타인을 물들이는 감정들이 유쾌하지 않은 기분을 낳는다는 건 조금 두려운 일이야.


 어린 시절 사진 속의 밝은 얼굴을 한참을 들여다봤어. 자연스러운 웃음으로 누구에게도 거리낌 없이 닿을 수 있던 그 얼굴이 ㅡ 그리워졌어. 그리고 필요한 것 같아. 나는 아직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인간이 되고 싶지 않으니까. 유쾌하진 못해도 닿지 않는 적정거리의 사람들에게 거부감 없는 밝은 얼굴을 보이고 싶어 졌다는 말이야. 밝은 얼굴은 생명력 가득해 빛이나. 만약 삼켜낸 것들 중 뱉어낼 수 있는 게 있다면 나는 말보다 먼저 그 얼굴을 찾을 것 같아.

밝게 주위를 물들이는 사람. 환하고 가벼운, 웃음이 많은, 생각보다는 말이 더 빠른 그런. 그런 사람이 될 수는 없었을까 ㅡ 가끔 생각해봤지만. 그러기엔 내게 주어진 상황들은 내가 그렇게 나아가길 원하지 않는 듯했어. 인간은 누구나가 다 고통을 안고 가야만 하는 것이라고는 해도. 너무 했지. 핑계라고 생각해도 할 수 없어. 너무 한 건 너무한 거니까. 정말이지 인간은 평등이라는 전제를 가질 수는 없는거야. 해당되지 않지. 아, 모든 자연이 그렇던가.

사실 이런 자조적인 이야기들을 누구에게 꺼낼 수가 있겠어. 이런 속내를. 닿을 것처럼 닿지 않는 사람들에게? 나는 한 가지는 아주 명확하게 알고 있어. 닿지 않는 거리에서 마주 선 사람들은 무엇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을. 닿지 않는 거리에 선 모두가 친절하고 상냥한 인간이야. 나 또한 누군가에겐 그렇겠지. 그 '적당한 선'에서 섣불리 속내를 보일 수는 없어. 아무에게도 책임을 물을수가 없을 때 쏟아진 말들은 가볍게 닦이지 않으니 조심해야해. 눈 앞의 밝은 얼굴은 친절함과 상냥함을 유지한 채 태연히 멀어져 갈 뿐이니까. 홀로 감당하기에 버거운 일은 벌이지 않는게 좋겠지.


꺼낼 수 없고 보여선 안되는 마음을 안고 있으면 말 수가 줄어들어. 마음은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고. 서툰 감정을 뱉었다 데이고, 판단되고, 정의 내려지고, 갈기갈기 찢어지고, 너덜 해지고 너절해지고, 상처투성이, 움츠러들고. 둥글게 말아지고, 작아지고 작아지는 하나의 인간. 유쾌하지 못한. 그렇게 된 거지. 밝은 얼굴 그렇게 잃은 거야. 하고픈 말을 삼키면서 ㅡ 화도 삼키고, 울음도 삼키고, 웃음도 삼키면서. 잃었겠지. 


그래서. 그래. 나는 지금 어떤 얼굴이야? 어떤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걸까. 매우  혼란스러워. 밝은 얼굴을 하고 싶고 동시에 아무에게도 닿 싶지 않아. 그러면서 적정 거리에 멈춰 선 이들에게  속내를 털어놓고 싶고. A가 되고 싶진 않고. B도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해 ㅡ 이런 식이야. 내게 주어진 감정들은 늘 양 극단에 있어서 사람을 어느 쪽으로도 움직이지 못하게 하지. 다 삼킬 수밖에 없었어. 말에도 행동에도 일관성없어. 변죽이 들끓고. 감정은 변덕스런 날씨보다 더 빠르게 바뀌고. 엉망인 것 같아. 내 삶이 너무하다는 생각은 이런 데서 오는 거야.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니까. 그러니까 앞뒤가 구분되지 않는 내 말이 이해가 되니? 내 감정이? 


.

.



작가의 이전글 뛰지 마, 하지 마, 안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