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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pera Apr 09. 2021

스마트폰으로 쓴 스페인 기행기 3

코르도바, 그라나다 (알함브라)



2012.08.29. 그라나다   

아침 일찍 간단히 조식을 마치고, 그라나다로 출발한다. 먼저 코르도바를 들러간다고 한다.  오늘도 가이드분은(개성이 강하고, 상당히 박식한 분인 것 같다) 비디오를 보여주면서, 스페인과 이슬람(모로코)에 대한 여러 얘기를 한다. 일행들이 아침부터 편하게 잠들며 간다. 나도 한번 졸긴 했지만, 재밌게 들었다.


포르투갈의 파두가 한을 삼키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스페인의 플라밍고는 한을 표출하기 위한 동작이라고 한다. 그래서 박수(팔마 : 안달루시아 춤의 다른 리듬을 손바닥으로 치는 것) 치며, 호응하고 동참해야 한다고 한다. 파두는 부르는 것을 듣지만, 플라밍고는 함께 즐겨야 한다고 한다. 오늘 밤 옵션으로 플라밍고 공연을 보는데, 강제는 아니라고 설명하면서 참석 예정자들을 모으고 있다. 당연히 손을 들었다. 일행들은 대부분 참석한다고 했다. 모집을 마치고, 그나와 음악(모로코의 소수민족, 서아프리카의 고대 가나 제국에서 모로코로 팔려 옴)을 먼저 들려주면서, 모로코 생활을 보여주는 비디오를 틀어주며 코르도바를 향해 우리 버스는 계속 간다. 


지중해의 번영을 상징했던 대도시 페스(Medina of Fez)는 오십만의 인구에 9600여 개의 골목(이 골목이 14세기에 조성된 것이라고 하니, 놀랍기만 하다)으로 이루어진, 오래된 도시다. 워낙 골목이 많아 길을 잃어도, 잃은 것을 모를 만큼 재밌는 곳이고, 수만 개의 가게에 고대 화장품, 문짝(옛날 문짝만 파는 곳도 있다고 한다), 카펫, 도자기 등 온갖 종류의 물건을 전통 장인들이 만들어 판다고 한다.  여러 여행프로를 통해서도, 잘  알려진 페스는 가죽 염색공정을 볼 수 있는 테너리로 유명하다. 천년 전부터 내려온 중세 방식 그대로, 세계 최고의 가죽을 만드는 패스는 비디오로만 봐도 사람 냄새가 물씬 나는 것 같다. 흥정을 반복하고, 아무리 가격을 낮춰도 화내지 않는다. 모로코 사람들의 느긋한 삶의 태도를 볼 수 있다. 


적당히 졸음 오기 좋게 햇살은 차창으로 들어오고, 흔들거리는 버스 안에서 비디오를 보면서 모로코 특히 패스를 꼭 가보겠다고 꿈을 가졌었다. 2021년 글을 정리하며 쓰는 지금,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은 맞는데, 꿈을 가지려면 더 간절하게 가져야겠다고, 결심해본다. 작년 1월에 스페인을 다시 다녀왔는데, 모로코를 잠시 들렸지만, 패스는 가지 못해 아쉬움이 컸기 때문이다.


하이 야틀라스산 해발 3000미터 고지 마을에 사는 베르베르족은 돌산을 깎은 터 위에 집을 짓고 고립된 삶을 살아간다. 박하차를 다듬는 “아마리”라는 과부를 인터뷰한 장면이 인상적이다. 나이를 묻자 그녀는 나이를 모른다고 했다. 잊었다고... "맨날 그렇게 사는데 나이는 알아서 뭐해요?" 늙어서 혼자되면 어떻 하지요? 물으니, “그게 자연이지요”라고 답한다.  태어났기에 아무 욕심도 없이 순응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봄이면 피고, 가을이면 한 해를 풍요롭게 장식했던 자신의 잎을 다 떨어뜨려 빈 몸으로 겨울준비를 하는, 자연과 조금도 다름없이 살아가는 자연 속의 일부인 사람들의 삶을 보여준다.  비디오는 계속된다.

   

메르조가 마을은 사하라 사막의 시작지이다. 사막에서 낙타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낙타의 관절이 세 개인 것을 이 프로를 보고 보고 알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낙타가 주는, 나름 의미 있는 여러 이야기들을 좋아하지만, 무릎관절이 세 개라서 두 번 구부려서 앉는 것은 몰랐다. 두 번이나 구부리는 낙타는 온전히 사막의 사람들을 위해 태어나고 살아가는 것 같다.   세상에서 다른 생물의 거름이 되지 않는 것은 사람밖에 없다는 오래전 이야기가 생각난다.

프랑스인 아빠가 아이를 데리고 사막 여행을 한다.

사막은 아무 때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한다. 

이 아빠는 아이가 아무리 울어도 같이 타지 않는다.  아이를  보호와 책임으로 먼저, 생각하는 우리네 사고와 조금 다른 것 같다. 이름도 모르는, 프랑스인 아빠가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시시 시각각으로 변해가는 것이 사막의 매력이에요. 우린 여기를 보려고 3000km를 달려왔어요. 제정신을 잃게 만들 만큼 사막은 아름답지만,  낙타 등뼈를 느끼며 가야 하는 이 시간, 사막에서 우리는 인생에서 소중한 것이 무언지를 배우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달려왔어요”. 그의 말은 아직도 울림을 준다. 


 “인생”이란 긴 여행길에선 평탄한 길도 있지만, 사막의 길도 많을 것이다. 사막 길에서 다행히도, “낙타” 라는 편할 줄(?) 알았던 동반자를 만나, 덥석 탔는데 이게 마냥 편하지만은 않은 것이다. 낙타의 등뼈를 내 허벅지로 받아들여 하나가 되어야 만, 사막을 통과할 수 있다는, 고통도 내 것으로 받아들일 때, 맛있고 재밌는 인생이 될 거란 교훈을 준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비디오를 보면서도 상념에 젖어, 통찰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여행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싶다.


어느새 버스는 배고픈 시간에 맞춰, 코르도바에 도착했다. 코르도바는 고대 페니키아, 카르타고의 식민지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711년 무어인들이 세운 칼리프 왕조의 수도로써, 당시 유럽에서 가장 번성하게 발달한 도시였다고 한다. 칼리프 왕조는 그 위용을 자랑하기라도 하듯, 780~1100여 년에 걸쳐 대모스크(매스키타)를 지었다. 1240년 경에 카르티아의 페르난도 3세가 탈환하여, 일부 파괴한 후, 가톨릭 성당으로 사용하고, 후에 르네상스 양식의 성당을 사원 중앙에 짓게 되어, 오늘날 어디에서도 보기 드문 모스크와 카롤릭 제단이 함께 있는 아름다운 건물이 된 것이라고 한다. 


코르도바 매스키타는 세계적으로 큰 회교사원으로 로마, 고딕, 비잔틴, 페르시아, 시리아 건축양식이 혼재되어있는 독특한 건물로써, 역사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건축학적 의미도 크다고 한다. 우리는 중앙 예배당 의자에 앉아 건너편 이슬람모스크 기둥과 아치를 바라보며 짧은 설명을 듣는다.


코르도바는 “도시 전체가 꽃, 꽃의 도시”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곳곳에 꽃과 나무로 아름다운 정경을 자랑하는 곳이다. 골목마다 집 벽에 꽃 화분이 달려있고, 베란다와 마당, 조금이라도 공간이 있는 곳은 온갖 화초들이 자태를 뽐낸다. 가꾸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섬세하게 꾸며 놓았다. 마을이 너무 예쁘고 고풍스러운 코르도바를 뒤로 하고, 차는 계속 그라나다로 가고 있다. 


  멋진 사이프러스 나무와 골목  /  골목 벽마다 걸려 있는 여러 가지 꽃 화분들  

  모스크와 가톨릭 제단이 함께 있는 코르도바 대성당 


가도 가도 황량한 벌판에 올리브나무만 서있다. 우리나라는 땅만 있으면, 풀이 자라는데, 이 땅엔 덥수룩한 수풀이 별로 없다. 올리브 밭에 풀이 없는 이유는, 대지가 석회암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달리는 차창밖에 보이는 집들이 예쁘다. 특히 빨강(약간 주황빛 나는.) 지붕이 참 예쁘다. 유독 빨간 기와지붕이 많은 것은 빨간 흙이 많아 기와 재료로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플라시도 도밍고의 그라나다로, 타레가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들으면서 두 시간 반을 더 간다. 기타의 애잔한 선율을 들으며, 그곳에서 들리는 물소리와 비교해 보아야겠다 생각한다. 세비아에서 세르비아의 이발사에 나오는 발코니도 보고, 카르멘이 초연된 곳도 보았다. 이번 여행길은 좋아하는 음악적 장소도 많이 포함되어 나름대로 아주 좋다. 그리고 지금부터 조금씩 더 좋아지는 것 같다.


한국에선 태풍이 북상하고 있다는데, 여기서는 너무도 푸르른 하늘을 맘껏 누리고 있어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좋다. 하늘, 좋아하는 코발트 빛의 청푸른 하늘 원 없이 본다. 날이 더워도 온도가 아무리 한국보다 높다 해도, 신기하리만큼, 몸에 부담 안되고, 땀도 안 난다. 그냥 걸어 다녀도 전혀 불편을 못 느낄 정도다. 나는 스페인 날씨 체질인가 보다. 차창밖으로 보이는 끝도 없는 올리브나무들과 코발트빛 하늘. 다음 주면 벌써 그리울 것이다. 그러니 실컷 보고 즐겨야지. 기타의 고향, 스페인의 기타 연주를 들으면서 버스는 계속 달린다. 


버스가 흔들거리고 가니까 잠자기도 좋다. 가이드 선생은 계속 이런저런 얘기하다, 사람들이 잘 듣지 않으니, 설명을 줄인다. 궁금증이 많은 나 같은 사람은 조용히 몇 가지씩 계속 묻는다. 이 길이 고속도로냐, 마드리드에서 오는 길이냐, 여기 산에는 왜 나무가 없는지, 그라나다가 플라시도 도밍고가 부르던 노래 그 지방 맞냐... 가이드는 딱 그 답만 할 뿐이다. 내 맘 같으면 이것저것 좀 더 설명을 붙여주면 좋으련만, 수십 번씩 되풀이되는 말에 피곤하기도 하겠지. 그의 직업이므로 일일이 답하기 힘들기도 하고 별사람 다 있어서, 적당한 경계선 유지가 필요하겠지만, 벼르고 별려 힘들게 온 사람들에게는 꿈의 시간일 수도 있다는 걸 조금만 이해해 준다면 훨씬 더 친절하게 답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도 잠깐 가져 보았다. 하기야 질문하는 사람도 없다. 일상의 굴레를 벗어나 모처럼의 자유를 느끼며,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쉼 있는 여행을 누리고 싶어, 쉬고 가는, 버스 안에서 궁금한 것이 많은 사람은 오히려 민폐가 되는 듯하다.


드디어 그라나다로 들어왔다. 시에라 네바다 산맥은 일 년 내내 눈이 있는 곳이라고 한다. 하루는 스키 타고, 하루는 수영 (40km 가면 해변 있다고 한다.)이 가능하다고 한다. 남쪽 지방의 대학도시로, 인구 30만 명 중 대학생이 6만 명이나 되는 교육도시라고 한다. 그라나다에서는 알람브라 궁전 관람일정이다. 알함브라 궁전은 그라나다 지방이 이슬람(무어인)에 지배당한 시절, 만들어진 궁전으로, 이슬람 전성기의 문화와 예술을 집결시켜,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원색 (검정, 흰, 푸른, 황금색)으로 만든, 아름다운 건축물과 조경으로 꾸며진 궁전이다.


무어인들이 지배하던 스페인 남부지방을, 8세기에 걸친(711~1492년) 국토회복운동(레콩키스타) 끝에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2세가 탈환하게 된다. 이사벨 여왕은 하루에 4번씩 목욕할 정도로 깔끔했지만, 알함브라를 차지하기 전엔 군복을 벗지 않겠다고 했을 정도로, 그라나다 정복(스페인 국토회복)을 위해 총력을 다했다고 한다. 마침내 이슬람 왕조의 마지막 왕 무하마드 12세는, 그라나다 조약 체결로 스페인 연합에 항복하고, 그는 알함브라 궁전의 파괴를 막기 위해, 최후의 항전을 포기하고 궁을 넘겨준 후, 1492년 북아프리카로 돌아간다. 왕은 가면서 뒤를 돌아보고 울었다고 한다. 그렇게 아름다운 궁전을 버리고 가야 하는 마음이 오죽했으랴..


"내가 못 지키면, 너도 못 가지게 할 것"이라는 전쟁의 파괴적인 마음도 품을 수 있었으련마는 문화유산을 고스란히 내어 준 무어인들이나, 적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지만, 파괴하지 않고 잘 보존하여 후손에게 물려준 스페인 사람들의 마음도 크고 아름답단 생각이 든다. 그들은 미래를 볼 줄 알았던 것일까?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이 있었기에 거대한 유산을 물려줄 수 있었던 건 사실이다. 인류는 다만 미래를 빌려 살뿐이란 말을 나는 믿는다.


화려하게 장식된 천장이 인상적인 나수르 궁전은 무어인들의 수준 높은 건축기술의 절정을 보여준다. 궁 앞에 열두 마리의 사자가 받치고 있는 분수, 물 위에 중정의 모습이 그대로 비치게 만든 아랴야네스의 정원 등 어느 한 곳 인상적이지 않은 곳이 없는 아름다운 궁전이었다.  헤네랄리페 정원으로 올라가는 길에 이슬람의 상징인 석류나무가 많이 있다.  헤네랄리페 정원은 왕들이 더위를 피해 휴식하는 여름 별궁으로 후궁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조화롭게 만들어진 아름다운 분수들이 기억에 남는다. 


무엇 하나 부족하지 않게 주어졌겠지만, 바깥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갇혀 늘 그리워하며 살았을 후궁들의 애달픈 삶의 한탄이 분수의 물소리에 흘러져 나오는 것 같다. 무어인은 하늘을 묘사하기 위해 정원을 가꾸었다고 한다. 하늘나라를 묘사하려던 것이니, 얼마나 아름답게 가꾸었겠는가.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역량과 정성을 다해서, 분수도 만들고 물길을 만들고 꽃과 나무를 배치했을 것이다. 그리고 만드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하늘에 걸맞은 사람으로 살길 바랬을지 모른다. 


알함브라궁전에서 바라본 그라나다 시 / 알함브라 궁전 내 누각 

 유화로 그려본 알함브라 궁전 벽에 흐드러진 잎의 이름 모를 꽃나무   


아름다운 알함브라 궁전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저녁때가 되었다. 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간단히 저녁 식사를 한 후, 플라맹코 공연장으로 간다. 공연장은 식당을 개조해서, 무대 주위로 긴 의자들을 몇 줄로 배치한 그리 크지 않은 소박한 공간이었다. 


출연자는 플라맹코 무용수 여자 셋에, 남자 한 명 1( 무용수이기도 했지만 가수이기도 했다.) 그리고 서서 노래하는 남자가수 1명과 기타리스트였다. 우리는 여행 와서 하룻밤의 여정으로  공연을 보고 가지만, 이 공연은 그들의 생업이다. 한 무용수의 어린 딸이 와 앉아 있었다. 아마 부부가 공연하여 아이를 볼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우리가 낸 옵션비의 일부분이 그들의 생활비가 되는 것이다. (문득 지금 코로나 팬데믹, 이 어려운 상황에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음이 무겁다. 2012년 즐겁던 그때는 세계적으로 이러한 상황이 전개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 직업 무용수라 하지만,  정말 열정적으로 춤을 춘다. 끝났나 생각하면 다시 춤추고, 한 번에 10여 분은 멈추지도 않고, 추는 것 같다. 온몸이 땀에 젖고, 땀방울이 사방으로 떨어진다. 조악한 관람석 맨 앞자리서, 열심히 장단 맞추고 흥에 겨워하는 내게도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이 보인다. 몸뿐이 아니다. 플라맹코는 손가락, 발가락 (발장단) 모두 움직인다. 


우리나라도 외세의 침입을 많이 받은 나라긴 하지만, 스페인만 하랴.. 아니다. 세계 어느 나라인들 다르랴. 다들 침략과 융화와 보존과 섞임이 공존하는 걸.  스페인은 이슬람과 떼려야 뗄 수 없이 엮이어 왔을 것이고, 어제 본 매스카타에서 공존한 모습처럼 따로 또 같이 삶을 이어간다. 플라맹코 춤에 그런 삶과 역사가 녹아 난 듯 보였다. 한 시간 반 정도의 격렬한 공연, 땀으로 흘러내리는 열정적인 춤을 보면서, 옵션으로 지불한 비용이 미안할 정도로, 내 마음 근육은 이완되어 있었다.


열정적으로 플라맹코를 추고 있는 남자 무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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