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질 급해 먼저 세상에 나온 선배들은 제 몫을 다하고 누렇게 바래져 빗물에 쳐진 채로 막 세상을 떠나려는 모습인데...
약이라도 올리듯 빗방울마저 하얀 얼굴에 광택이라도 넣어주듯 방울방울 빛나고 있다.
위아래 마주 보는 백합들은 주룩 거리는 빗속에서도 경주라도 하듯 여름을 향해 달려간다.
얼굴 가득 빗물 머금어도 무겁지 않다는 듯 떨어지는 꽃잎옆으론 새로운 아이들도 고개를 치어들고 있다.
지난주도 저번 주도 피고 지고, 장마에도 긋지 않고 다시 핀다.
여름 꽃 장미와 백합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피고 지고를 주고받고 있는 비 오고 후덥지근한 여름날이다.
하얀 겹백합은 누렇게 떠 가는 단백합에게 말한다.
아니 언제 나오셨어요?
지난주예요?
그런데 벌써 가시려고요?
그게 ~~ 그게 ~~~ 댁은 언제 오셨어요?
저는 작년에 왔어요!
겹백합은 한참이라도 된 듯 반짝이는 흰 얼굴에 광채를 나부끼며 자랑스럽게 말한다.
이제 곧 떠날 듯한 노란 단백합은
나는 일곱 번째 여름맞이예요 ~
장맛비가 더 쏟아지는 다음날 아침,
빗물에 젖은 얼굴을 숙인 채 키가 큰 노란 백합이 묻는다.
어머 ~ 꽃을 언제 피웠어요?
며칠 된 것 같아요. 지난주에 피웠고 한송이는 이번 주에 피었어요.
꽃 핀 송이도 비 오는 날 피었던 것 같다.
그럭저럭 또 한주가 흐르고 모처럼 비도 긋고 날씨도 맑고 화창한 날,
어린 겹백합은 크고 하얗게 빛나는 풍성한 꽃잎을 펼치면서 마당을 활보하고 있다.
센스 없는 노란 단백합은 다시 묻는다.
어머 ~ 언제 꽃을 피웠어요?
지난주에 피었다니까요.
저번에 지난주라 그러지 않았나요?
사실 그전 주에 도 피웠고요~~~
어머 ~ 이 집엔 언제 왔어요?
작년에 왔다고 얘기했잖아요.
작년 초봄 어느 장날에 이사 왔다고 얘기했었잖아요.
왜 얘기했던 것을 또 물어보세요??
작년 기억 안 나세요?
버럭 소리를 높이며 화를 내는 겹백합...
지난주엔 막 피어나 얼굴 가득 묻은 빗물도 즐거워했던 것 같은데 일주일 내내 비가 오다 보니 고개조차 들기 힘들어 짜증이라도 났는지, 아니면 하얀 겹얼굴이 빗물에 젖어 오히려 늘어진 주름처럼 예쁜 얼굴을 망치고 있어선지 잔뜩 화가 난 표정이다.
버럭 화를 벌컥 내는 겹백합을 보고 놀란 단백합은,
어머 ~ 미안해요 ~
내가 깜박하고 또 물어봤나 봐요 ~~;;
고개를 수그리고, 자기 생긴 대로 빗물을 받고 있는 단백합은 단 잎이라, 빗물이 흘러버려 얼굴에 고여 있을 새가 없다. 그러나 꽃잎이 몇 배나 풍성한 겹백합은 밝은 햇살아래선 겹겹이 빛나는 광채로 아름다우나, 비가 계속 내리게 되면 겹겹의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피부 곳곳에 물이 차, 주름인 듯 피부인 듯 자기의 아름다움을 돋보이지 못하고 무겁고 힘든 육신이 되어버린다.
사실은 아름답고 빛나는 하얀 겹백 함임에도 날씨에 따라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환경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짜증스러웠나 보다.
왜 나는 지난번에 물어본 것을 기억 못 하고 또 물어봤을까...
그렇다고 그리 무안스럽게 화를 내고 쏘아붙이듯 답할 수가 있을까? 화가 나기도 하고 한편으론자책하던 단백합은 곧 마음을 접었다.
자신도 얼마 전에 건너편에 있는 노란 백합에게 색깔이 어중간하게 왜 그러냐? 며 흰색? 노란색? 원래 색깔이 무엇이냐?를 몇 번은 물었던 것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건너편의 단백합은 별다른 반응도 없이 배시시 웃기만 했었는데...
겹백합의 반응은 생각도 못하게 거칠었던 것이다.
사실은 겹백합에게 어쩌면 그리도 풍성하고 예쁜 잎을 많이 가졌을까? 하는 부러운 마음을 표하고 싶었지만, 당시의 겹백합은 비 올 때의 힘든 자신의 그 모습이 싫어서 오히려 화를 낸 것이다.
서로의 속마음을 모르니 자신의 입장에서 기분을 표현한 것이다.
단백합은 어린 겹백합에게 욕먹는 것 같아 순간적으로 기분이 좋진 않았다.
단백합이야말로 여러 해 전에 이곳으로 와서 잔뼈가 굵은 주인 같은 존재였는데 이제 막 입주한 청년에게 그런 망신을 당했으니 기분이 좋았을 리는 없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자신을 돌아보니, 자기 역시 다른 이의 마음을 불편하게 생각도 들어, 충분히 겹백합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었다.
오히려 질문해 망신당한 것이 비 오면 젖어 아름다운 향기와 모습을 자랑할 수 없어 불평했던 자신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단백합은 속으로 되뇌어 본다.
너를 통해 ~ 나를 본다.
너는 어리고 화려하고 아름답고 풍성한 겹백합이고,
나는 소박하고 나이 든 조촐한 단백합이지만
결국 우리 모두는 아름다운 백합이야.
덥고 힘든 여름날을 꿈나래로 시원하게 날아다니게 만드는 향기롭고 아름다운 백합이야.
조금 다른 너와 나의 아름다움과 고상한 향기는 빗속이라도 펼쳐갈 것이야.
여름 끝 무렵엔 화려한 얼굴도 과감히 포기하고 새 희망으로 다져가는 같은 모습의 백합이 되고 말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