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새벽, 뒷산을 산책하는 시골 사는 웰피츠 일기
내가 성추행 범이란다.
으악~
너무나 억울한 누명이다.
내가 워낙 스킨십을 좋아해서 집사들이 콩엄마 머리를 쓰다듬는 순간 달려가서 내 머리를 디밀며 나만 만지라고 한다거나 새벽 산책에 콩엄마 목줄을 먼저 묶으면 또 머리를 들이밀어서 먼저 묶으라고 하는 거 다 스킨십이 필요해서다.
그러니까 나는 심각한 애정 결핍증이 있는 거다.
내가 이렇게 스킨십을 좋아하면 그거 채워줘야 하는 거 집사의 의무가 아닌가 말이다.
만날 우리 복지 얘기하면서 정말 필요한 것을 모르는 것이 제대로 된 집사냐 이 말이다.
그러니 내가 찾아서 이 결핍이라는 고약한 놈을 채울 수밖에 없는 거잖아.
그래서 집사들이 앉으면 얼른 뽀뽀를 시도하는데 이런 거 질색하는 두 집사는 번번이 피해버려서 나의 자존심을 깎아내린다.
우리 댕이들의 사랑 표현을 이렇게 개 무시하다니 정말 자존심 상한다.
오늘 아침만 해도 큰 집사가 콩엄마 목줄을 끼우느라 앉아있기에 얼른 뽀뽀 한 번,
콩엄마 목줄이 잘 안 끼워져서 시간을 끌고 있기에 또 뽀뽀 성공,
산책로 입구에서 목줄 풀어줄 때 뽀뽀 한번,
모두 세 번의 뽀뽀를 했다고 두 집사가 나한테 성추행 당했다고 뒷담화를 하고 있다.
성추행은 인간 대 인간의 법이지, 인간과 댕댕이 사이에 이게 적용된다는 말은 견생 3년 만에 처음 듣는 말이다.
인간이 댕이한테 성추행 당했다는 말 들어봤냐고?
그래도 나는 계속할 거니까
억울하면 고발해라. 아니 고소인가?
저기 저 법원에 가서 법으로 한번 다퉈보자고 누가 잘못했나?
# 에필로그
가을이는 머리를 만져주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그리고 걸핏하면 깡충 뛰어올라 강제 뽀뽀를 시도한다.
허리를 낮추는 순간 달려와 기가 막히게 손을 쳐서 자리 머리 위로 가져간다.
집안에 들어오면 수시로 자기 머리를 쓰다듬으라고 따라다니며 조르는데 그 빈도가 너무 잦아서 귀찮을 정도이다.
가을이 옆에 앉아있기 힘들 만큼 치댄다.
‘치댄다.’는 말이 경상도 사투리라고 하고 스킨십'(skin)이라는 외래어도 적당한 우리말을 쓰고 싶어 찾아보니 ‘피부 교감’, ‘피부 접촉’, ‘살갗 닿기’라 하니 왠지 어색하다.
가을이는 ‘살갗 닿기’를 좋아한다?
스킨십'(skinship)처럼 긴 시간 일상에서 우리말보다 더 자연스럽게 쓰고 있는 외래어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세계 어디든 1일 생활권이 되어가는 글로벌 문화의 속도감이 느껴지는 단어이다.
가을이가 자기 머리를 쓰다듬으라고 계속 들이대면 엉덩이를 만지면 된다.
엉덩이를 만지는 것은 또 극도로 싫어해서 털을 빗을 때도 엉덩이에 빗이 닿으면 못 빗게 엉덩이를 깔고 앉아버린다.
반면 콩이는 머리보다 엉덩이 만지는 것을 더 좋아한다.
웰시코기의 별명이 ‘치명적인 엉덩이’인데 어려서부터 예쁘다는 소리를 워낙 많이 듣고 자라서 관종이 된 콩이는 평소에는 시크한 편인데, 사람 많은 곳에 가면 입이 헤 벌어져서 자기를 예뻐하라고 종용하러 다닌다.
일명 ‘추앙하라’ 활동이다.
그때는 엉덩이부터 쓰윽 들이밀고 앉는다.
콩이가 엉덩이를 들이미는 것은 호감의 표시이고 자기를 예뻐하라는 신호이다.
엄마와 딸이 이렇게 스킨십 선호가 다르다.
아버지가 경상도 분이라 자식 사랑은 남다르셨지만 애정표현을 잘 못하셨다.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돌아오신 날에야 잠자는 우리 뺨에 당신의 거친 수염을 대고 문지르며 애정 표현을 하셨다.
까끌한 수염 감촉에 놀라 깨어나 어리둥절하던 것이 어릴 적 부모님 사랑표현의 추억이다.
그런 환경 탓인지 나는 스킨십이 불편하다.
폴란드 바르샤바대의 국제 합동 연구팀은 연인 간 의사소통 방식이 관계 만족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실험에서 연인 중 한쪽의 사랑 표현 방식이 상대가 받고 싶어 하는 표현과 비슷할수록 관계 만족도가 높아졌다고 한다. 연인이 원하는 방식대로 사랑해 줬을 때 사이가 좋아졌다는 뜻이다.
나는 수시로 치대는 가을이가 부담스럽고 가을 이는 원하는 만큼 만져주지 않아 서운하다.
가을이한테 강제 뽀뽀를 당하면 나는 얼른 입을 닦는다.
그걸 보는 가을이가 무안해하는 것 같다.
그래서 애정결핍이 생겼나 미안하기도 하다.
이 지고지순한 맹목적인 사랑은 도저히 감당이 안된다.
'인간이 아무리 개를 사랑한다고 해도 개가 사람을 사랑하는 것만큼은 사랑할 수 없다.' 는 말에 절대 공감한다.
'이 지구상애 이런 절대적인 사랑이 또 있을까?'
하지만 유난히 스킨십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무덤덤한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스킨십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스킨십을 유난히 좋아하는 가을이를 위해 내가 '애견 훈련소'에 입소해야 할지 고민 중이다.
내가 여기서 이걸 할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