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천(南天)
남천(南天)
푸른 잎으로만 살던 시절은
이미 지나갔다.
사느라 바빠
숨 돌릴 틈도 없던 날들이
한순간 통째로 멈춰 섰을 때,
시간은 무게를 잃고
삶의 한가운데에 패인 웅덩이처럼
고여있었다.
갑자기 주어진 한가함이
그토록 원하던 휴가였다는 걸
알지도 못한 채 서 있었다.
봄이 와도, 여름이 와도,
창밖 계절은 소리 없이 미끄러지고
달력의 숫자들만 바뀌어
시간은 더 이상 선물이 아니었다.
살아남느냐 마느냐
보이지 않는 불안이
불신의 계절을 건너온 바람을 휘젓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멀어질수록 분열은 더 쉬워졌다.
나누고, 밀어내고,
이따금 지나가던 욕설과 한숨들,
나만 옳다는 목소리가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 손잡고
눈앞에서 활개 치는 악의들이
한겨울의 미세먼지처럼 떠다녔다.
삶이 절벽처럼 느껴질 때마다
겨울을 통째로 견디고도
색을 버리지 않으려는
하루하루의 고집으로
얼어붙은 추억을 주머니에서 꺼내
붉은 열매 한 알의 체온으로 버텼다.
모두가 고개를 젓던 그 겨울,
끊어내는 대신
견디고 통과하는 사랑도 있다는 걸,
가장 큰 상처가
가장 진한 색을 남긴다는 걸.
하늘로 발송된 아이의 소원 목록 같은
첫눈을 이고,
산타가 선물보자기 맨 아래
끝까지 숨겨둔 진홍 열매.
우리의 어둠 또한
후회와 실수를 하얗게 덮은 뒤에야
뜻밖의 아침이 되어 돌아온다.
다시 올 수 없는 사랑을
기다리는 대신,
그때의 설렘을
다시 삶 속으로 옮겨 놓는 일.
당신이 울던 그 겨울도
가슴 시리던 불안의 밤도
언젠가 누군가의 마당 한편에서
떠나는 이의 뒷모습을 비추며
붉게 익어갈지 모른다.
밤새 첫눈이 내렸다.
첫눈을 이고 마당가를 둘러선 키 낮은 남천의 붉은 열매와 잎을 보며 위로를 받는다.
볼수록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진국인 사람이 있다.
남천나무가 딱 그렇다.
대나무를 닮은 잎사귀도 그렇고, 봄 여름 가을까지 자기 자리를 지키다 혹한의 겨울에도 잎을 떨구지 않고 붉게 물든 잎과 열매는 따뜻한 겨울 정원 풍경을 만든다.
모두가 섬이 되어버린 코로나의 시절.
사람을 만나는 일이 죄가 되어 눈치 보던 시간들.
의심의 눈으로 사람을 바라보고,
작은 호의조차 경계와 서늘한 적개심으로 되돌아오던 그 시린 계절.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이 바이러스의 숙주일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나 역시 감염 전파자의 후보가 되어 하루아침에 집단 학살자로 뉴스 속 익명의 얼굴로 떠오를 것만 같은 불안.
그 지루하고 음산하던 겨울 끝.
첫눈이 내리고 하릴없는 반복의 일상을 단숨에 다른 세계로 바꾸는 천지의 하얀 변심.
하얀 눈을 이고 남천이 붉고 따뜻한 열매를 달고 서있다.
이제야 보통의 평범한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처절하게 깨우친다.
겨울이 깊어가면 정원은 하나둘 문을 닫는다.
색 바랜 잔디, 꽃들은 물러나고, 잎들도 제 갈 길을 찾아 흩어진 뒤라 바람만 허옇게 드나든다.
그때 남천나무가 따뜻한 얼굴을 드러낸다.
다른 꽃과 나무들이 모든 것을 놓는 순간에도 남천은 끝까지 잎을 잡고 있다.
혹한 속에서 푸르던 잎은 서서히 붉게 물들어, 마치 오래 삼킨 말을 조용히 피로 바꾸어 내는 것처럼 겨울 정원을 물들인다. 가지마다 매달린 빨간 열매는 ‘그래도 아직 끝난 건 아니야’라고 말해주는 희망의 촛불 같다.
연말이 되면 마음은 괜히 뒤숭숭해진다.
잘한 것보다 못한 것이 먼저 떠오르고, 사람에게 받은 말의 상처들에 새삼스럽게 가슴이 아리다.
첫눈이 내리는 창밖에서 눈발 사이로 남천이 가만히 서 있다. 차갑게 식은 정원 속에서 혼자만 따뜻한 색을 품고 서 있는 나무를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마음의 체온이 조금씩 돌아온다.
남천나무의 끝까지 버티는 잎처럼, 상처 입었다고 해서 마음까지 다 지워버릴 필요는 없다고, 차라리 그 자리를 더 깊은 색으로 물들여보라고.
겨울 정원 한쪽에서 따뜻한 남천의 붉은빛이, 한 해 동안 상처받고 지친 마음을 묵묵히 감싸 안는다.
힘겨웠던 시간을 보낸 사람에게 마지막 남는 작은 위안 같은 나무.
지난해의 좌절과 실망이 전화위복이 되기를....
남천(南天) 꽃말
전화위복, 지속적인 사랑
이름
원산지인 중국 남부지방의 '남천족(南天竺)'에서 유래했으며, 붉은색의 촛불 모양 열매와 대나무 같은 잎의 모양에서 유래한 이름
다른 이름
남천죽(南天竹): 잎 모양이 대나무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남천촉(南天燭): 붉게 익는 열매가 불타는 촛불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성죽(聖竹): '성스러운 대나무'라는 뜻
난땐(難轉): 어려움(難)이 변하여(轉) 복이 된다는 의미로, 전화위복(轉禍爲福)을 의미
남천(南天)에 대하여
남천(南天)은 매자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 남천속에 속하는 유일한 종으로 학명은 Nandina domestica Thunb이고 영어 이름인 Heavenly bamboo는 우리말로 번역하면 ‘신성한 대나무’라는 뜻이다.
히말라야에서 일본에 이르는 동아시아 원산이며 반상록(semi-evergreen) 떨기나무로 가을에 붉게 드는 단풍과 겨우내 달려 있는 붉은 열매가 아름다워 남부 지방에서 정원이나 공원에 관상수로 심어 기른다. 3m까지 자라며 추위에 약하다.
6~7월에 줄기 끝에서 길이 20~30cm의 원추꽃차례에 자잘한 흰색 꽃이 달린다. 열매는 장과로 둥글며 10월에 붉게 익는다. 변종으로 열매가 황백색으로 익는 노랑남천이 있다.
물 빠짐이 좋은 반그늘 흙에서 잘 자라고 가을철에 온도가 낮아지면 잎 색은 붉은색으로 변하지만, 나뭇잎(落葉)으로 떨어지진 않는다.
남천(南天) 겹잎이 가을철에 붉은색으로 변하는 것은 겨울을 버티기 위하여, 잎 속의 당류(糖類) 함량이 높아지면서 붉은색을 띠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천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는 분명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조선(朝鮮) 초기의 여류서화가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년)의 ‘화조도(花鳥圖)’에 남천으로 짐작되는 그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16세기 이전에 중국에서 가져와 심고 가꾼 것으로 추정된다.
효능
열매와 줄기, 잎을 약재로 쓴다. 생약으로 열매를 쓰며 남천실이라고 한다. 도메스틴, 이소코리딘 등의 알칼로이드를 함유하고 있어 백일해, 천식과 같은 병 때문에 생기는 기침을 가라앉히는데 쓰고, 잎은 강장제로 쓴다.
편도선염이나 구내염, 치통, 인두염 등에는 말린 남천잎 3~5g을 100ml의 물과 함께 달여 반 정도 된 액을 식혀서, 수시로 목 양치질을 하면 효과가 좋다.
그러나 열매, 줄기, 잎 모두에 독성이 있어 날것으로 먹으면 안 되며, 반드시 말리거나 달여서 사용해야 한다.
남천(南天) 나무의 민속과 전설
중국에서는 신선이 먹는 식품으로서 잎을 쌀과 같이 먹으면 백발이 검어지고 노인이 젊어진다고 하여 성죽(聖竹)이라 하였다는 전설과 또한 일부 속설에 의하면 집에 남천나무를 심으면 돈이 들어온다고 하여 돈나무라고도 한다.
또한 모든 재액을 물리친다 하여 정원수로 심는가 하면, 혼례 때 색시의 가마 속을 지키는 뜻으로 방석 밑에 잎을 넣어 주기도 했고, 임산부의 순산을 기원하며 마루 밑에 깔기도 하였다.
진시황제가 나무젓가락으로 사용하던 나무라고 전해지기도 하며, 정초에는 열매가 달린 나무를 사서 사당이나 집을 장식하고 노인에게 선물하였으며 젓가락으로 사용하면 "중풍"을 예방한다고 한다.
흔히는 재앙을 막는 나무, 전화위복이 되는 나무라고도 알려져 있다.
일본명인 ‘난텐’이란 이름 자체가 ‘어려움을 극복하고 부정을 깨끗이 한다’라는 뜻과 통하므로 귀신이 출입하는 방향이나 화장실옆에 심기도 한다.
일본 오카야마현의 일부지방에서는 음식물의 냄새를 없애는 데 효과가 있다고 하여 즐겨 사용하며, 남천의 젓가락은 치아를 튼튼하게 해 준다고 하여 즐겨 사용하는 민속도 전해지며 또 조그맣게 절구를 만들어 어린이의 허리띠에 채워주는 민속도 있는데 이렇게 하면 재액(災厄)이 범접을 못한다고 믿은 주술적 민속 때문에 어린이의 건강을 염원한 옛 부모들이 즐겨 만들어서 채워주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남천잎이 해독이나 부패를 방지한다고 믿어서 생선회 밑에 깔아 신선도를 유지했다고 한다.
남천은 다른 나무의 경우와는 달리 약효에 얽힌 민속이 많은데 예를 들면 복어를 먹고 중독되었을 때 남천 잎을 짓찧어서 즙을 내어 한 잔을 마시면 해독된다고 하며 가슴앓이나 뱃멀미도 곧 멎게 한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