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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낱말: 만남

국립중앙박물관의 반가사유상

by Yellow Duck

서울 용산에 위치한 국립중앙박물관 2층에는 <사유의 방>이라는 공간이 있다. 이곳에는 삼국시대 6세기 후반과 7세기 전반에 제작된 우리나라의 국보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83호와 78호 두 점이 온화한 자태로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반가사유상’이란 왼쪽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얹고(반가) 오른손 검지 손가락을 살짝 뺨에 댄 채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긴(사유) 불상을 말한다. 한국 불교 미술의 깊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걸작이다. 난 <사유의 방>이란 이름이 주는 신비로움에 강하게 끌렸다. 내게 절실히 필요한 게 ‘사유’였으니까. 난 2021년 11월에 오픈한 이곳을 한국 방문 때 꼭 가보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박호연 작가와 발행하는 웹진 <장르불문> 외에도 미국 텍사스주에 사는 친구와 함께 <시차 따위 문제없는 수다>라는 팟캐스트를 만들어 격주로 올리고 있다. 고단한 해외살이 속에서도 자신의 목소리와 자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중년’ 아줌마 둘이 한바탕 수다를 펼치는 게 주요 목적이다. 친구와 나, 각각 '오렌지덕'과 ‘옐로우덕’이란 닉네임으로 어느새 70회 넘게 녹음했는데, 요즘 살짝 난관에 봉착했다. 다음 회 주제를 정할 때마다 내가 이 말을 자주 해서 오렌지덕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해 딱히 할 말이 없어요.”


진짜다. 할 말이 없다. 야속한 삶이 시도 때도 없이 던지는 여러 공격에 대항할 강단이 생겨서 그런 거라면, 그래서 ‘그럴 수도 있지’라며 기꺼이 껴안을 여유와 지혜가 생겨서 그런 거라면 굳이 ‘난관에 봉착’했다고 표현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쪼글쪼글해지는 갱년기 아줌마의 뇌 때문이라면, 그래서 어떤 이슈에 대해 에너지를 들여 공부하고 사고하려는 의지가 게을러지고 생각의 폭이 점점 좁아져 아무 의견 없이 멍한 머리가 지속되는 거라면, 이건 분명 문제다. 시나브로 난 내 사유의 곳간이 비어가는 걸 느꼈고, 그건 팟캐스트 녹음을 두렵게 만들었다. 빈 곳을 채워야 하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야금야금 쓰기만 할 뿐 비축을 미루다 보니 입을 여는 족족 그 빈틈이 들킬까 두려웠다. 글도 마찬가지. 눈치 빠르신 분들은 내 글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어떤 불안을 느끼셨을지도 모르겠다.


조치가 필요했다. 글 쓰고 그림을 그리는 내가 이런 정신으로 창작활동을 이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마음과 정신이 배고플 때 꺼내 먹을 사유. 결코 거저 생기지 않는, 오랜 내공이 필요한 그것. 그래서 이 이름에 솔깃했을지도 모른다. <사유의 방>이라니. 물론 그 방에 들어간다고 해서 없던 사유가 저절로 생기지는 않을 테지만, 난 직접 보고 싶었다. 뇌를 자극할 그 오묘한 미소를. 고통의 본질과 존재의 의미에 대한 깊은 성찰을. 영적인 깨달음에 다다르려는 부처의 수행을. 다시 ‘사유’해야 할 이유를. 믿을 수 없는 무더위와 습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한 여름.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했던 난 아이와 함께 용산으로 향했다.


방의 입구에는 '두루 헤아리며, 깊은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라는 글귀가 검은 벽에 양각으로 붙어 있다. 예고편처럼 앞으로 경험하게 될 감각들을 기대하게 만든다. 왼쪽으로 꺾으면 검고 긴 복도가 새로운 공간으로 들어가는 긴장감을 더하고, 쏟아지는 별처럼 반짝거리는 천정은 그곳으로 인도하는 등댓불 같다. 그렇게 길을 따라가다 복도 끝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어느새 현실은 사라지고 매우 추상적인 시공간이 시작된다. 사뭇 그 안으로 발을 들이기가 조심스럽다. 허튼 동작 하나라도 그곳의 경건함과 고요함을 흩트릴 것 같다. 넓고 어두운 황토색 공간이 펼쳐진다. 마치 여성의 자궁 같다. 미세하게 기울어진 바닥과 벽과 천정은 살짝 몸이 붕 뜨고 중력이 덜 작동하는 듯한 생경함을 일으킨다. 그게 현실을 잊고 두 대상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는 건축가의 의도였다면, 그 의도는 성실히 일하고 있다. 고개를 들어 타원의 제단 위에 은은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우아하게 틀어 앉은 두 개의 형상을 본다. 불상이 놓인 전시대의 높이는 약 1미터. 무대 위에서 관객을 내려다보는 배우 같다. 왼쪽에 78호, 오른쪽에 83호. 그렇게 난 두 반가사유상과 만났다.


관람객들은 감히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한다. 공간이 주는 엄숙함 때문일 거다. 하지만 주변과는 달리 두 불상은 친근하게 나를 맞는다. 눈을 감은 듯 아래로 깔고 있으면서도 내 눈을 정면으로 보며 ‘무슨 고민이 있어서 내게 왔니?’라고 다정하게 묻는 것 같다. 내 눈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불상의 라인을 따라 바쁘게 움직인다. 오뚝한 콧날, 모나리자의 미소를 능가하는 입꼬리, 무용수가 뻗을 듯한 우아한 포즈, 매끈한 옷깃의 곡선... 과연 그 시절, 천오백여 년 전에 어떤 기술로 이렇게 원만하고 부드럽고 균형 잡힌 형태를 만들 수 있었을까? 수백 번 실패를 반복했을 직조공의 땀을 상상하며 난 불상이 머무는 고요의 순간으로 빨려 들어가 불상과 함께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사유가 시작되는 것이다.


문득 불상이 내게 묻는다. 글 쓰기는 어때? 장르불문은 잘 되어 가니? 난 얼마 전 만난 <장르불문>의 공동발행인 호연을 생각한다. 호연은 편안함보다는 긴장을 주는 인물이다. 방방 뜨고 촐싹대는 나와 달리 진중하고 잔잔하다. 밑그림을 그대로 볼 수 있는 트레이싱 페이퍼 같은 나와 달리 겹겹이 쌓인 두꺼운 유화 물감 아래 숨겨져 있는 캔버스 같다. 정반대의 에너지는 이질감을 일으키지만 의외의 화학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척’하면 ‘착’인 동지도 좋지만,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의 장단점을 조율할 텐션을 일으키는 동지도 무언가를 도모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두 불상을 보며 호연과 나를 떠올렸다면 주제넘은 비약일까. 약간의 익살과 아이다움이 비치는 83호가 나고, 조금은 엄숙하고 여성스러운 78호가 호연이라고 상상한다. 이 방은 <사유의 방>이 아닌 <장르불문의 방>. 과장된 상상에 씩 웃으며 난 무심히 답한다. 그럭저럭이요. 순간 글의 아이디어를 찾는다. 이번에는 반가사유상과의 조우를 써보자. <사유의 방>의 열쇠가 내 손에 쥐어진 듯하다.


'한여름 밤의 꿈' 같았던 그해 여름, 한국에서의 시간이 지나고 다시 네덜란드로 돌아와 일상을 산다. 잔치가 끝났으니 비축의 시간이 왔다. 난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두 손으로 뺨을 때리며 정신 차리라고 나를 깨운다. 이제 두려움을 떨쳐내고 내 사유의 곳간을 채우자고. 한국에서 원 없이 먹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아랫배를 보니 한숨이 난다. 식단을 짜고 운동 계획을 세우고 미디어 노출 계획도 세운다. ‘중년 여성 생활 습관’이란 키워드로 여러 정보를 취합해 ‘to do’ 리스트를 만든다. 할 일이 많음에 살짝 질리지만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라고 소리 높여 구호를 외친다. 한국에서 사 온 책들을 거실 테이블에 쌓는다. 첫 책으로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김기태 작가의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집어 든다. 돌아오는 금요일에는 팟캐스트 녹음을 할 것이다. 한국의 무더위에 불평불만을 쏟아내겠지만 <사유의 방> 경험은 반드시 얘기할 것이다. 그리고 <장르불문>을 발행할 막바지 점검을 할 것이다. 이렇게 차근차근 일상을 쌓으면 사유가 쌓일 거라 믿으며 달리기를 위한 운동복으로 갈아입는다.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반갑게 맞아주고 ‘밥 한번 먹자’고 연락하는 친구와 지인들 덕분에 벅찬 날들을 보낸다. 먹을 밥이 많음에 감사한다. 오래된 명작을 다시 꺼내 읽는 듯한 대화들이 맛난 음식과 커피잔 너머로 오간다. 무심하고 둔한 성격 탓에 항상 인간관계에 미숙하다고 느끼지만, 이들의 다정함과 너그러움 덕에 내 우려가 가볍게 깨진다. 나이 들면 남는 건 사진과 사람이라고 했던가. 즐거운 추억 여행 속에 서로의 변화와 성장에 감동하고 축하하며 영감을 얻고 삶의 방향성을 찾는다. 이들이 바로 내게 사유할 동기를 주는 반가사유상이다.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이다.


* 웹진 <장르불문>은 2024년 12월호를 마지막으로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지고 있다.

*<시차 따위 문제없는 수다> 팟캐스트 역시 시즌 3을 준비하며 휴식 시간을 가지고 있다.


KakaoTalk_Photo_2024-08-14-10-46-06.jpeg <사유의 방> 국립중앙박물관 이미지 제공


KakaoTalk_Photo_2024-08-19-13-17-26.jpeg 반가사유상
KakaoTalk_Photo_2024-08-20-10-00-18.jpeg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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