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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낱말: 물욕

안드레아 거스키의 사진들

by Yellow Duck

집에서 한 블록 떨어진 슈퍼마켓의 진열대 앞에서 난 한쪽 눈썹을 치켜뜬 채 미동 없이 한참을 서 있다. 젠장, 그저 아이의 도시락에 넣을 빵이 필요할 뿐인데, 천차만별 가격표의 천차만별 제품이 저요 저요 자기를 데려가라고 아우성친다. 나 원, 이렇게 시끄러워서야. 뇌를 정지하고 아무거나 집으면 그만이겠지만, 그만 숨이 턱 막혀서 일단 과일 코너로 가기로 한다. 나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사야 할 리스트는 ‘존나’ 길다. 또 한 번 젠장, 숨을 크게 고른다.


고백하자면, 난 장 보는 걸 매우 싫어한다. 굶을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봐야 하지만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다. 그래서 비겁한 변명을 들이밀며 남편에게 떠넘긴다.

- 그래도 당신이 무거운 거 더 잘 들잖아.

내게 슈퍼마켓은 물건으로 대표되는 인간 욕망의 집합체다. 들어설 때마다 묵직한 아열대 기후의 바람 같은 답답함이 내 목을 조이고, 난 속절없이 압도된다. 그래도 당장 저녁거리로 우유가 필요하고 당근이 필요하기에 면접시험에서 번호가 불린 취준생처럼 숨 한 번 들이키고 발을 내디딘다. 내게 장보기는 그야말로 곤욕이며 꽤 용기를 요구하는 일이다.


슈퍼마켓에 갈 때마다 생각나는 작품이 있다. 바로 현대 사진계의 거장 안드레아스 거스키(Andreas Gursky, 현 70세)의 ‘99센트(99 Cents)’와 ‘아마존(Amazon)’이란 사진으로, 각각 LA의 대형 할인 마트와 인터넷 쇼핑몰 아마존의 물류 센터를 찍은 작품이다.

독일 태생의 안드레아 거스키는 현대 문명을 상징하는 고층 빌딩, 증권거래소, 아파트 같은 장소들을 독특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포착해 거대한 사회 속에 파묻힌 개인의 존재를 통찰하는 대형 사진들을 선보여 왔다. 그는 최근까지 세계에서 가장 비싼 사진작가로 통했다. 가로 3.3미터, 세로 2미터의 ‘99센트’도 경매에서 40억이 넘는 가격에 낙찰되었다. 소재가 99센트 마트인데 작품 가격은 40억이라니, 이런 아이러니가. 이마저도 예술적이다.


그의 작품을 보는 경험은 색다르다. 우선 엄청난 크기에 압도된다. 여러 각도에서 찍은 후 디지털 편집 기술로 이어 붙였기 때문에 카메라 특유의 왜곡 없이 평면적으로 보이는데, 이는 사진이 아닌 대형 명화를 보는 기분을 들게 한다. 멀리서 보면 규칙성을 강조한 패턴과 덩어리만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미처 보지 못한 여러 디테일이 보인다. 아파트 내부의 커튼 주름, 물건을 고르는 소비자, 활발하게 거래하는 비즈니스맨의 상기된 표정 등등,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새롭게 튀어나오는 장면을 확인하는 체험은 감정의 진폭과 몰입도를 높인다. 그리고 깨닫는다. 현대 사회 속의 내 모습은 이렇구나. 인간의 좁은 시야는 이렇게 초라하구나.


작품 ‘99센트’와 ‘아마존’은 가히 물건의 향연이다. 형형색색 대형 마트에 진열된 상품과 물류센터에서 배송을 기다리는 제품들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작가는 “대량 생산과 소비문화가 공존하는 사회를 표현하고자 이 사진을 찍었다.”고 말했는데, 그의 의도는 정확히 작동한다. 이 작품들을 처음 봤을 때 내가 뱉은 말이 ‘어우, 질려’였으니까. 선택을 기다리는 상품과 이미 판매가 된 제품들 너머로 현대인의 불타오르는 소비욕이 날 향해 돌림 노래로 ‘More! More! More!’라고 합창하는데 어찌 질리지 않을쏘냐. 아이러니하게 작품 ‘아마존’에서는 소비자의 직접적인 모습이 없음에도 물건마다 주문 후 흐뭇하게 미소 지었을 사람들의 모습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클릭 한 번이면 뭐든 가질 수 있는 시대이기에 가능한 상상이다.


도망치듯 과일 코너로 온다. 예상대로 각종 사과가 아우성친다. 스프랑크, 후지, 에스터... 그나마 고민 없이 한 봉지를 집을 수 있는 건 세일을 해서다. 아직 많이 남은 목록에 또 한숨짓는다. 장보기란 미션을 끝냈을 때, 아마존에서 물건을 주문한 소비자처럼 흐뭇하게 미소 지을 수 있을까?

겨우 장보기를 마치고 영수증을 본다. 모든 게 올랐다. 전에는 89센트(한화 1,238원)였던 오이가 1.09유로로 올랐다. 1.39유로(1,933원) 하던 우유는 10센트 오른 1.49유로고 1.45유로(2,017원) 하던 통밀빵은 1.69유로다. 전반적으로 오른 물가에 짜증이 난다.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가 밉고, 자기 이익만 챙기는 공룡 기업이 밉고, 나아가 신자유주의가 밉고, 그러다 보니 세상만사가 밉다. 기름값이 너무 올라 보일러도 못 켜는데, 올해 겨울은 어찌 될까. 장 본 총액은 21유로. 오늘 자 환율로 3만 3천백칠십일 원이다. 합리적인 소비인지 따지기 싫어서 영수증을 구겨 쓰레기통에 버린다. 집에 오자마자 방전된 채 카우치에 몸을 던지며 남편에게 말한다.

- 슈퍼마켓 가는 건 너무 힘들어. 다음에는 제발 당신이 가주라.


슈퍼마켓에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소비 자체가 어려운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무소유의 법정 스님도 아니고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처럼 산속에서 ‘나는 자연인이다!’ 외칠 자신도 없으면서 왜 이리 유난일까? 내 소비 패턴은 희한하다. 바보냐고 할 정도로 숫자 개념이 없고 가계부를 쓰거나 물건 가격을 비교하는 꼼꼼함이 없다. 현명한 소비인지 고민하는 게 번거로워 꼭 필요한 물건 외에는 사지 않는다. 다행히 물욕이 없다. 물건을 통해 결핍을 채우려는 욕구가 0에 가깝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도 자유로운 난 (즉 누가 뭐라든 내 ‘쪼’대로 사는 시건방진 난) 물욕으로부터도 자유롭다. 난 이 자유가 좋다.


거스키의 작품은 가소로운 내 시야로는 감히 볼 수 없는 위치에서 날 바라보게 만든다. 마치 드론 카메라가 하늘로 쭉 빠지며 배경과 인물을 부감으로 촬영하듯 점만큼 작아진 내 모습을 상상하면 지구상의 내 존재는 단세포 동물인 아메바보다도 작다. 영화 ‘맨 인 블랙(Man In Black)의 엔딩 장면을 본 적이 있는가? 지구가 속한 은하계, 나아가 은하계가 속한 은하수가 알고 보면 더 큰 우주의 외계인이 가지고 노는 구슬 속의 문양밖에 안 된다는 사실. 이를 생각하면 현재 내가 겪는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닌 ‘그까짓 거’가 된다. 내게 그의 작품은 정신 승리용으로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덕분에 다시 슈퍼마켓에 갈 용기를 얻는다.


문득 그가 부럽다. 작품값에 40억이라니, 이러면 진짜 예술 할 맛 날 것 같다. 물욕은 없지만 돈은 있으면 좋겠다. 물욕 없는 돈 많은 사람. 쿨한 사람. 세상에 이런 스웩이. 인터넷으로 무료 운세를 본다. 심심풀이라지만 ‘곧 뜻밖의 성공으로 사방에 자신의 이름을 떨칠 것’이라는 총론에 신이 나 음흉하게 손 비비며 히죽거린다. 올해엔 나도 대박 한 번 내보자. 장보기의 공포로 시작한 글은 이렇게 기-승-전-돈으로 끝난다. 결국 나도 거스키의 사진처럼 돈을 좇는 현대 문명 속의 콩알만 한 존재다. 알고 보면 나도 매일 욕망하며 산다.


1999-99-cent-1700x1700-q75.jpg <안드레아 거스키 - 99 Cents>


2016-amazon-1700x1700-q75.jpg <안드레아 거스키 - Amazon>


2016-mediamarkt-1700x1700-q75.jpg <안드레아 거스키 - Mediamark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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