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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llow Duck Dec 17. 2018

프롤로그: 파란만장 내 인생

질문에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다.

2016년 여름에 정리했던 지난날


# 파란만장 내 인생


내 이름은 최승연이다. 별명은 옐로우 덕.


정승 ‘승(丞)’ 자에 이을 ‘연(延)’ 자를 쓴다. 벼슬을 이으라는 조상의 사명을 띠고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난, 한국 나이로 올해 47세인 소띠 여자다. 어머니, 아버지 모두 살아 계시고 밑으로 연년생 남동생이 있다. 어릴 때 우유를 많이 마셨지만 키가 작으신 아버질 닮아서인지 149.7센티밖에 자라지 않아 이 세상 모든 걸 우러러본다. 아주 가난하지도, 그렇다고 아주 부자도 아닌, 아주 보수적이지도, 그렇다고 아주 진보적이지도 않은, 아주 오글거리지도, 그렇다고 아주 드라이하지도 않은 적당히 평범하고 행복한 집안에서 큰 문제 안 일으키며 잘 자랐다. 공예 전공으로 대학에 들어갔지만 그만 연극에 빠져 극예술 연구회 동아리방에서 4년을 보낸 후 무대 디자인을 공부한답시고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뉴욕으로 날아간 게 사고 친 거라면 사고 친 거겠다. 내 생애 최고로 빡센 날들이었던 대학원 생활을 ‘존버 정신’으로 버텨 졸업장을 받은 후 여러 디자이너의 어시스턴트로 일하며 '뉴욕! 뉴욕!'의 꿈을 이루는 듯했으나, 911 테러 후 돌아가는 미국 정세 때문에 취업 비자 연장에 실패하여 화려한 브로드웨이 데뷔 대신 한국행 비행기를 타야 했으니, 그렇게 총 7년의 뉴욕 생활을 끝냈다. 그 후 유학까지 다녀온 딸의 찬란한 미래를 기대하던 부모님의 꿈을 산산이 깨뜨리며 대학로에서 무대 디자이너로서 가난한 연극인 생활을 이어가던 중, 2009년 어느 날 한 인물이 내 남산 작업실에 불쑥 나타났다. 바로 지금의 남편 카밀. 네덜란드 출신의 젊은 청년 카밀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난 원래 당연히 그러리라고 생각했던, 즉 대학로에 뼈를 묻겠다는 각오로 대한민국 공연계 발전을 위해 이 한 몸 불사르며 일하다가 노처녀로 늙어 죽는, 그 생각 그대로 됐을 것이다. 하지만 주말 드라마 예고편에 나올 법한 ‘운명의 장난’이란 말은 알게 모르게 내게 다가와 망우리 공동묘지로 갈 뻔했던 노처녀 시체를 꺼내어 케냐행 비행기를 타게 만들었다. 


2009년 12월, 난 서른일곱의 나이에 뉴욕이 아닌 케냐로 떠났다. 그리고 카밀과 함께 1년간 전 세계 30여 개국을 여행하며 기관을 거치지 않고 독립적으로 자원봉사를 하는 채리티 트레블(Charity Travel) 프로젝트를 했다. 케냐에서 보육원을 세웠고, 태국에서 맹그로브를 심었고, 발리의 병원에서 연극 놀이를 했고, 볼리비아의 청소년 센터에서 벽화를 그렸다. (이는 2012년 출간한 ‘착한 여행 디자인’이란 책에서 풀었다) 프로젝트 후 결혼을 했고, 다시 찾아간 케냐 보육원에서 일할 때 미루가 왔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되자 그때까지 잘 먹었던 케냐 음식이 너무 기름져 냄새도 맡을 수가 없었다. 달걀과 아보카도, 토마토로만 몇 주를 버티다가 결국 ‘나에게 순댓국을 다오’ 절규하며 한국으로 돌아왔다. 2013년 마흔의 나이에 한국에서 미루를 출산했고, '자연 속에서 마음 맞는 이웃들과 지속 가능한 공동체를 만들고 우리만의 작은 보금자리에서 예술 활동을 하며 사는 꿈'을 꾸며 6개월 된 미루를 데리고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유럽을 방황했다. (이 중 일부를 2016년에 출간한 ‘노마드 베이비 미루’란 책에서 풀었다) 


여행은 여러 형태로 이어졌다. 나 포함 엄마 셋, 아이 셋, 팀을 이루어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체코 프라하까지 3500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여행하며 공연을 만들어 아이와 함께 아동극 축제 무대에 섰던 ‘마마카라바나’란 프로젝트를 했고, 여러 히피촌과 공동체 마을을 방문해 공동체 생활의 가능성을 살폈으며 독일의 베를린과 포르투갈 중부 지방에서 진지하게 정착을 모색하기도 했다. 에피소드가 많은 건 말할 것도 없다. 스페인 한복판에서 자동차가 홀랑 불타기도 했고, 포르투갈 시골에서 산불도 경험했고, 잘 살던 집에서 갑자기 쫓겨나거나 믿던 친구에게 뒤통수 맞기도 했고, 프라하 거리에 주차한 차에 도둑이 들어 중요 물품을 도난당하기도 했다. 사건과 사고가 끊이질 않았고 카밀과 싸우기도 참 많이 싸웠다. 하지만 두 권의 책을 썼고, 머리가 커졌고, 나와 세상에 대해 더 잘 알게 됐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경험과 지식, 멋지고 좋은 인연들을 만들었으며 내 사랑의 결정체 미루의 성장을 지켜봤다. 그리고 돌고 돌아 딱 7년이 되는 2016년 12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날들이었다.


공연 프로젝트, 마마카라바나.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현재 우린 내가 어렸을 때 자랐던 동네, 서울 마포구 망원동에 산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근 3년이 되어간다게 믿기지 않는다. 임신과 출산 기간을 제외하면 한 장소에서 3개월 이상 머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월셋집 평균 계약 기간인 2년을 마치고 이사하는 평범한 한국 중산층의 루틴을 행할 만큼 오래 살았다는 게 참 어색하다. 


주변의 반응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다양한 반응을 마주했고 꽤 많은 질문을 받았다. ‘자고로 인생은 너처럼 살아야지!’라는 동경도 있었고 ‘대책 없이 산다.’며 혀를 끌끌 차는 핀잔도 있었다. 부러움에 가득 찬 동그란 눈을 볼 땐 민망하면서도 우쭐했지만 반대의 얘기를 들을 땐 내가 뭘 그리 잘못했나 싶기도 했다. 젊을 때나 가능한 거지 뭘 믿고 그렇게 돌아다니냐, 그러다 골병든다, 미래가 안 불안하냐, 지금부터 안 모으면 나중에 거지꼴을 못 면한다, 애 교육은 어떻게 할 거냐 등등… 그중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바로 이거였다. 왜 한국으로 돌아왔냐. 

그러게 말이다. 모두가 핼조선이라며 탈출하려고 난리인데, 왜 난 청개구리처럼 돌아왔을까? 장황하게 설명하기 귀찮았던 난 머리만 긁적이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라고 얼버무렸다. 사실 이 말은 가장 정확한 대답일 수 있다. 결코 계획대로 되지 않은 인생, 그 누구가 지난날을 이래서 이랬고 저래서 저랬다, 딱 잘라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 질문들은 어쩔 수 없이 지금의 내 위치를 생각하게 했다. 현재 난 꽤 많은 경계와 충돌 위에 서 있다. 국경, 문화, 언어, 나아가 주류와 비주류, 정착과 여행, 안정과 불안정, 부모와 자식, 여성과 엄마… 이 모든 경계와 충돌 속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고 있다. 이 줄에서 떨어질까 봐 겁이 나고 안 떨어지려고 별 짓을 다 한다. 그 누구도 가라고 떠밀지 않은, 내가 택한 이 징글징글한 길을 걷고 있자니 내 속에서 이런 소리가 들린다.

- 칫, 누가 뭐라든 알게 뭐야! 난 계속 이 경계들을 왔다 갔다 하며 살고 싶다고! 나이가 몇이든, 결혼했든 안 했든, 아이 엄마든 아니든, 돈이 있든 없든, 가끔 힘들다고 앓는 소리를 할지언정, ‘아니! 오히려 너무 재밌는데!’ 자신 있게 외치며 걷고 싶다고!


그러자 스스로를 제대로 돌아보고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귀찮다고 질문들을 어설픈 웃음으로 얼버무리기엔 그동안의 내 삶이 참 아름답고 소중하다. 그리하여 난 ‘노마드 베이비 미루’에서 다 풀지 못한, 그리고 그 이후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얼굴 모를 신부님께 고해성사하듯 대단한 야망도, 거창한 대의명분도, 자조적 낭만이나 불필요한 합리화 혹은 미화도 없이 그냥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어요’라고 덤덤히, 하지만 당당하게 입을 열고 싶었다. 혹은 ‘그렇게 궁금하시면 그냥 이걸 읽어보세요.’라고 권할 수 있도록. 


밴을 타고 유랑하던 시절


무더운 여름의 어느 날, 지난날을 생각하다


작년 여름, 참 초현실적으로 뜨거웠더랬다. 혼을 쏙 빼놓는 무더위를 선풍기 한 대로 버티는 정신 승리를 발휘하며 난 방구석 책상에 앉아 무심히 껌뻑이는 커어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안의 무언가를 자판 위에서 한바탕 춤추게 해야 할 것 같은데, 텁텁하게 가라앉은 공기 때문인지 목덜미를 스치는 선풍기 바람만 느껴질 뿐 쉽게 손가락을 움직일 수 없었다. 문득 랜덤으로 틀어놓은 ‘추억의 인기 가요’에서 김현철의 ‘그런대로’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8, 90년대 아줌마 감성으로 충만한 내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늘은 문득 주저앉았고, 그녀는 웃었고, 자기는 그런대로 살아간다고 목이 찢어져라 외치는 김현철의 한탄 사이로 난 아무 말 없이 난 그런대로 살고 있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런대로 살지 않을 거라고 묵묵히 자판을 두들겼다. 


그렇게 작년 여름부터 여행 중 써왔던 일기와 블로그에 올린 글들을 바탕으로 정리한 글이 이 글이다. 시작할 때만 해도 한국에서 더 오래 지낼 거라고 생각했으나 어쩌다 보니 계획을 바꿔 곧 3년의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떠난다. 첫 행선지만 있을 뿐 루트가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모른다. 따라서 글은 바뀌고 또 바뀌었고, 걸러지고 또 걸러졌다. 

쓰면서 걱정했다. ‘한여름 밤의 꿈’에서 벌어진 잡히지 않는 신기루, 혹은 소동극 같은 내 인생에 대한 변명만 구구절절 늘어놓는 건 아닐까 해서. 하지만 결국 이 글은 궁극적으로 내가 누구인지, 현재 이 삶을 어떤 힘에 근거해서 사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탐구하기 위해 쓴 글이다. 순전히 내 정체성을 다지기 위해 쓴 이기적인 글인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 지극히 이기적이고도 무모한 내 자아 찾기 연대기가 팍팍한 생활에 지친 누군가의 인생에 ‘뭐지? 이 또라이 인생은?’이라는 호기심을 살짝이나마 자극한다면 난 지독한 나르시시스트이자 이기주의자가 되지 않은 것에 진심으로 감사할 것이다. 아주 다를 것 같지만 사실 내 이야긴 당신의 이야기와 다를 바 없을 테니까.


이 글을 1945년생 임자, 자자, 정자 여사에게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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