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월 간의 유럽여행을 돌아보며
사막을 건너고 있다. 목이 탄다. 몸과 영혼이 메말라 시들고 있다. 막막하다. 오아시스가 너무 멀다. 고통으로 신음하던 중 가방 한 구석에 수통을 발견한다. 허겁지겁 가방을 풀어헤치고 떨리는 손으로 수통을 집어 든다. 아.. 뚜껑이 잘못 잠겨있었다. 이미 상당한 양의 물이 소실되어 수통은 가볍디 가볍다. 몇 모금뿐 남아 있지를 않다. 이미 갈라진 입술을 적시기에도 모자라다. 한 방울씩 아껴가며 입에 털어놓고, 곱씹고 음미한다. 3개월 간 유럽 여행을 기억하며 느낀 감정이 이와 같았다.
매일 세상의 온갖 자극을 촉촉 젖은 감수성으로 두 팔 벌려 받아들이며 지냈던 꽤 괜찮았던 시기였다. 각박한 일상을 반복하며 혼이 메말라 비틀어져 손 끝만 닿아도 바사삭 부서져 내릴 것 같았던 요즘과 참 달랐다. 행복이 차고 넘치던 시기였다. 때는 무려 코로나 전이었고 아마도 세상도 조금 더 인류에게 너그러웠던 것 같다. 검역과 거리두기, 낯선 사람에 대한 고조된 적의나 긴장감 없이 유럽을 원 없이 누비고 다녔다. 인생의 운을 여기다 몰아 쓰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들 정도로 행복한 날들이었다. 안타깝게도 그 행복의 구체성은 시간이 흐르며 기억 속에서 뚜껑 열린 수통으로 쏟아져버린 물처럼 상당 부분 유실되고 말았다.
미약하게 찰랑이며 남아있는 기억들을 돌아본다. 얼마 남지 않은 이 기억들이 상처 입어 약해지고, 활기를 다 잃어 비틀거리는 나를 연명시켜 줄 것 같았다. 세월에 풍식되지 않고 남아있는 생명력 강한 기억들이니 왠지 더 특별한 힘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내면 깊숙이 내려앉아 각인된 이 행복한 기억들에 기대 보기로 했다.
끝까지 곁을 지킨 이 여행의 단편들은 대게 흔히 유럽에 가면 “꼭 해야 하는 것들" 또는 “안 하면 후회할 것들"과는 다소 다른 것들을 통해 새겨졌다. 커다란 관광지와 기성품처럼 이미 완성된 여행코스에는 공식화된 의미들이 가득 차있어 지질할지언정 나만의 감성이 스며들 틈이 적었다. 북적이지 않고 치일 걱정 없는 곳에서 비로소 내 생각과 감정이 몸을 펴고 크게 숨을 들이켠 듯하다.
이 생각과 감정들을 최대한 성의 있게 정제하여 담으려 애썼다. 짧은 글들이지만 수일에 걸쳐 생각을 다듬고, 말을 다듬고, 다시 읽어보고, 처음으로 돌아가 생각부터 다듬는 과정을 반복했다. 이 모든 것을 또 망각해 버린 미래의 내가, 또는 나를 닮은 누군가에게 내면의 사막을 건너는 힘든 시기에 내가 어떻게 여행에서 영감을 받아 스스로를 회복시킬 힘, 한 걸음 다시 뗄 수 있는 활력을 준 생각들을 만들어 나갔는지를 공유하고 싶다. 모자란 글과 생각을 바깥에 드러내자니 사막의 바람에 옷이 엉망으로 해지고 비쩍 말라버린 보잘것없는 내면이 발가벗겨지는 것 같다. 그래도 같은 갈증에 신음하는 누군가에게 하나의 물음을 던져줄 수 있기를 바란다. 거기 어딘가 수통 비슷한 것이 보이는데 당신 것인가요.
각자의 치열한 삶에서 우리의 주의를 앗아가는 수많은 것들의 횡포에도 불구하고 불구하고 내가 살아온 세계, 내 생각에 대해 작은 관심이라도 가져준 모든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