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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파랑 Aug 06. 2017

영초언니 : 쎈 언니들의 가슴 저린 이야기

씨네왕자 부크공주 - 8월 5일

 섭씨 35도를 오르내리는 뜨거운 여름. 2주간의 짧은 방학이지만 고2 딸아이에게는 분주한 하루하루이다. 집에서는 공부가 잘 안되고  도서관에 가려하니 냉큼 마음이 내키지 않는 공주님을 위해 책 한 권 집어 들고 스터디메티트(Studymate) 역할로 같이 도서관으로 향했다. 시원한 에어컨 냉방으로 몸을 금방 차갑게 식힐 수 있었지만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이 뜨거워지고 마침내 눈시울도 뜨거워졌다. 한 시대를 같이 살았던 후배로서 못내 미안할 따름이다. 우리는 과연 발전하고 있는 것인지? 뜨거웠던 촛불시위로 박정희 정권의 망령은 종지부를 찍었다. 하지만, 아직도 두 개의 이데올로기에서 좌 또는 우를 강요받는 이원적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년들과 '공동체와 사회'를 이해하지 못한 가난한 젊은 세대들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며 살고 있다. 그 차이를 메울 수 있는 '건강한 한국적 철학'이 자리잡지 못하는 이 상황은 분명 '불확실성의 시대'임을 틀림없다. 서명숙 작가의 <영초언니>는 누군가의 인생을 송두리째 잡아 삼킨 대한민국의 이야기이다. 한입에 삼켜버린 크릴새우들을 알량한 식량으로 삼아 고래상어의 위장에서 근근이 태워져 에너지를 만들면서 풍랑의 대양에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이렇게라도 떠 있는 것을 다행이라고 할지...


제목 : 영초언니

출판사 : 문학동네
저자 : 서명숙

분류 : 자서전, 에세이
주제 : 유신시대 불의한 국가권력과 맞짱을 떴던 '당대의 언니들' 이야기
초판 : 2014년 5월 18일


아름다운 올레의 추억

 올레길을 처음 접한 것은 7년 전이었던 것 같다. 당시 장흥에서 떠나는 제주행에 차량을 싣고 떠난 그 배는 에버랜드 롤러 코스트를 방불케 하도록 출렁임이 심했다. 창가에 서로 앉겠다고 우기던 가족들의 즐거운 비명은 곧 극심한 뱃멀미와 위장으로부터 울리는 멀미로 인한 비명으로 바뀌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난생처음으로 제주도에서 버스 일일 투어를 해 보았는데 가이드로부터 '서명숙' 이사장에 대한 이름을 처음으로 듣게 되었다. 당시에 배우 '서갑숙'과 이름이 혼돈되어 그런가 보다 했다. 이분의 자서전 겸한 수필 '영초언니'의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7 올레길', '외돌개' 그리고 '폭풍의 언덕' 등이 그때의 뱃멀미를 하던 잔인한 뱃여행 처럼 동시대를 살았던 아픈 기억, 그리고 여행은 이렇게 인생을 살듯이 천천히 걸어가는 것을 가르쳐 준 제주도의 첫 올레길 경험이 가져다준 아름다운 충격이 책을 읽는 동안 번갈아 오르내렸다.


제 7올레길의 외돌개


긴급조치의 희생양

 단숨에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 시대를 살았던 제주 출신의 한 누님이 포장마차에 앉아서 주절이 주절이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고, 소주 한잔씩 들이키면서 몰입된다. 영초언니의 인생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숨을 죽이고 들었다.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지 영웅'처럼 작가가 경험한 한 인물의 이야기 형식이기도 하고 영화 '써니'를 보는 것 같이 70년대의 여학생들의 화려한 수다를 듣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 작은 영웅의 이야기는 일그러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단순히 꿈 많은 소녀들의 단순한 추억도 아닌, 우리의 정리되지 않은 근대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수필 속 작가 '나'의 성격은 민족에 대한 투철할 사명감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단지 공부 좀 하고 그냥 비열하지 않는 제주도의 촌 소녀였지만, 그녀에게 주어진 시대적 선택은 단 두 가지였던 것 같다. 눈 감고 굴복할 것인지 아니면 눈을 뜨고 두들겨 맞을 것인지...

 '긴급조치'. 유신헌법 제53조에 규정된 대통령 긴급조치권은 행정명령으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무제한으로 제약하는 모순적 조항을 근거로 헌법 개정 논의 금지 (1호, 2호), 민청학련 사건 (4호), 고대 휴교령 및 군대 투입 (7호), 유신헌법 반대 관련 행위 무영장 체포 (9호) 등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위를 민주주의라는 그럴듯한 포장으로 자행한 초특급 국민 탄압 프로젝트였다. 76학번인 주인공은 이 긴급명령 시대에 선택을 강요받았다. 고대 학보사 선배인 '영초언니'와의 만남은 이 시대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체험하고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탄생했다.


염병하네!

 긴급조치라는 박정희 시대의 망령으로 시작된 영초 언니의 투쟁적 삶은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의 딸이 세상을 뒤집겠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아니었다. 광주의 고위 경찰 간부의 딸이 시대적 상황을 정확하게 주시하려 단순히 눈을 부릅뜨고 있었던 것이었다. 유신헌법, 광주 민주화 항쟁 등 중요한 사건에서 시위를 주도하고 그로 인한 고문과 징역 탄압이 이어졌다. 올해 초 수의와 수갑을 차고 호송차에서 내려 특검 조사를 받으러 가는 최순실의 입에서 '민주주의 쟁취!, 독재타도'를 외친 소위 말하는 '염병질'은 대를 이어 박정희의 딸까지도 잠들지 않고 영초 언니를 모욕하고 괴롭히고 있는 것이 아니까? 작가는 미루었던 원고를 서둘러 탈고한 이유를 영초언니가 40여 년 전 어느 법정에서 외쳤던 구호를 코스프레한 최순실의 이 '염병질'로 들고 있다.

최순실의 염병질 (출처: 민중의 소리)

 책의 중간 부분은 79년 소위 말하는 '산천초목' 사건으로 영초언니과 구속된 성동구치소의 삶을 이야기한다. 독재 타도와 정의로운 세상을 외치던 학생들을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시선이 고스란히 이 부분을 통해 표현한 것 같다. 이 곳에서는 당시의 세상의 질서를 고스란히 인물 하나하나를 통해 표현했다. 사기꾼 할머니의 넉넉한 영치금은 구치소의 삶에서도 빈부의 격차와 삶의 질을 좌우했고, 김재규 장군과 친분이 있 부인의 무비판적 정치인에 대한 신봉, 그리고 배고파서 소시지나 빵을 훔쳐먹거나 지갑 등의 절도로 소년원에 들어온 어린 소녀들의 풍경은 독재의 처절함보다도 일신의 삶이 우선인 소시민들의 생각을 여과 없이 표현한 부분이다. 인간은 어떻게 하든 적응을 하면서 살고 있는 것 같다. 처절할 고문도 오줌을 질질 싸듯이 두렵다가도 이내 적응이 되어 버티고, 명분과 사회적 신념 없이 주변의 세력에 몸을 맡기는 굴욕도 몇 번 하다 보면 달콤한 안위로 적응을 하게 되고...


돌아보지 않는 역사

 후반부는 민주화 과정의 희생자인 영초 언니의 중노년 인생을 그린다. 정치적 동지 문화형과의 만남과 결혼. 사회를 바꾸어 놓을 혁명자금을 빙자한 다단계 판매원으로의 버려짐, 그리고 그녀를 버린 조국을 등 뒤로 하고 떠난 캐나다 이민, 한국에 남겨진 남편 문화형의 가난과 영양실조로 인한 죽음. 그리고 현지에서 그녀의 교통사고로 인한 실명과 뇌기능 저하...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은 것이 이렇게 처참한 결과를 만들어 내었지만 조금씩 그나마 좋아지고 있는 조국의 정치상황으로 만족하고 버티기에는 그녀의 혈기와 젊음은 너무도 쉽게 사그라들었다.

 병자호란 이후에 지키지 못해 청나라 군대에 끌려갔던 조선 여자들이 되돌아왔지만, 환향녀(還鄕女)들은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위안부 할머니들의 상처에 국가는 ‘불가역적 졸속 합의’로 소금을 뿌렸다. 이번 촛불 집회에서 국민의 힘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이 우리들의 가슴 한 구석에 잘못된 국가를 향한 분노로 남아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들에게 박정희 유신 정권, 5.18 민주화 운동, 6월 항쟁 등은 한국사 교과서의 지루한 한 부분으로 남는 현대사로 기억되고 우리들은 그 결과인 ‘민주주의’만을 자유롭게 누리고 있다. 한 사람의 인생이 교과서에서 다 표현되지 못한 채 좋은 세상을 위한 젊은 대학생들의 피, 땀, 눈물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서명숙 올레길 이사장

 천영초와 서명숙은 40여 년 전 '산천초목'사건으로 구형 전 최후의 진술을 다.

 "아이고, 우리 영초 참 잘한다. 만세다"

라는 천영초 어머니의 방청석 외침이든,

 "맹숙아, 겅 곧지 말라게. 빨리 판사님한티 잘못해댄, 다시는 경허지 않으켄 싹싹 빌라게!'

라는 서명숙 어머니의 방청석 외침이든 어떻게 자식 세대에 요구를 하건 그건 개인의 자유이다. 그래도 '천영초'라는 불꽃같은 여자가 오늘의 우리 삶에 분명한 역할이 있었고, 우리는 미안하고 또 미안한 마음으로 지금도 빛 지고 한세대를 살고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비가 그치고, 밤이 지나면 다시 벚꽃은 필 터인데, 꽃보다 가벼운 이슬로 사라졌던 사람들을 위해 손석희 의 올 <앵커 브리핑>처럼...


손석희의 앵커 브리핑

손석희의 앵커브리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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