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어떤 산문이 '좋은' 산문인가요? 이 맹랑하고 막연하기 짝이 없는 질문에 누군가 명쾌한 해답을 보여 주었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어려운 질문인 걸 안다. 큰 서점 베스트셀러 탁자에는 항상 처음 보는 이름들의 산문집들이 몇 권씩 있는데, 각자 너무 다른 서로의 결을 절대적인 기준 하나에 맞추어 재 보려 하는 건 힘든 일일 테다. 작가마다의 개성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만큼 다양한 독자의 취향은 그에 대한 판단에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다. 소위 'SNS감성시인' 혹은 '인플루엔서' 들이 쓴 글의 수준에 대한 갑론을박과, 그 가치에 대한 판단이 세상 곳곳의 대화 안에서 논란거리가 되면서도, 한쪽에선 오프라인으로도 출판되어 잘만 팔리는 걸 보면 높은 층위의 문학, 낮은 층위의 문학을 구분하는 것, 탁월성에 대한 고찰 자체가 이제 그렇게나 큰 의미가 있을까 싶은 오늘이다.
필연적으로 대부분의 산문, 에세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산문집을 즐겨 읽고 구매하는 독자들이 진지하게 그런 생각까지 할 일은 없을 듯하지만, 아니 그래서 뭐 어쩌라고? 저기 혹시 누구 이거 물어보신 분? 이래 버리면 에세이란 장르 자체가 성립할 수 없고, 개인적인 이야기는 공허한 문장의 나열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마치 몇 년 전 징그럽게 쏟아져 나오던 자기계발서들처럼.
이에 더해서, 일관된 주제와 분위기, 세밀하게 설정된 몇 명의 인물로 수십, 수백 페이지를 채워나가야 하는 소설이나, 각종 은유와 상징을 고심하며 단어 하나에도 며칠간의 고민을 아끼지 않기도 하는 시와는 달리 산문은 체질적으로 그 무게가 비교적 가볍다. 짧은 분량으로 다양한 주제나 생각, 통찰을 담을 수 있는 건 산문의 장점이기도 하겠지만, 그 가벼운 무게가 산문을 만드는 일도, 그것에 접근하는 일도 쉽게 한다. 산문과 산문집은 더욱 범람하고, 장르적 특성상 용인될 만큼의 가벼움인가, 훅 불면 날아갈 듯한 가볍기만 한 글인가를 구분해야 할 필요가 생긴다.
그래서 참 어떤 산문이, 에세이가 좋다고 말하는 건 나름대로 어려운 일이다. 필연적으로 일상적인 사건들과 말들로 쓰일 수밖에 없는 에세이에 어느 정도 수준의 통찰력이 더해져야 읽힐 만한, 팔릴 만한 글이 되는 걸까.
이런 산문이라는 장르와 산문집 자체에 대한 의구심들을 적지 않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산문집을 즐겨 읽고, 자주 구매하는 독자로써, 그럼에도 그걸 읽는 이유를 묻는다면 뻔한 귀결이지만 공감이나 위로라는 진부한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 진부한 단어들을 의도와 결과를 최대한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어떤 소재나 구성으로, 치밀한 관찰력과 통찰로 풀어내느냐부터가 작가의 역량이라 느낀다.
박준 시인의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은 그런 기대들을 충족한다. 시인의 산문집이라는 걸 드러내듯, 책 속의 문장들은 운문과 산문의 경계에 서 있는 듯한 것들이 많다. 그의 문장들은 직설적이지는 않은 형태로 감정을 표현하고 긴 울림을 남긴다.
「그는 비가 내리는 것이라 했고/ 나는 비가 날고 있는 것이라 했고/ 너는 다만 슬프다고 했다」 '비'
「배추는 먼저 올려보냈어. 겨울 지나면 너 한번 내려와라. 내가 줄 것은 없고 만나면 한번 안아줄게.」 '해남에서 온 편지' 중
대화의 단절에 대한 안타까움의 목소리는 이미 한참 지난 이야기고, 속내를 쉽게 드러내기 힘든 인간관계 사이 부재하는 감정의 공유는 책에 적힌 작가의 글과 생각으로 대신하는 시대다. 작가의 통찰에 동의하거나 감탄하기도 하고, 공감의 요소나 관찰력이 만든 재치에 웃음 짓기도 한다.
「우리가 함께했던 순간들이 나에게는 여행 같은 것으로 남고 당신에게는 생활 같은 것으로 남았으면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함께하지 못할 앞으로의 먼 시간은 당신에게 여행 같은 것으로 남고 나에게는 생활 같은 것으로 남을 것입니다.」 '여행과 생활'
「문득 생각해보니 돈을 주고 수건을 산 기억이 없다. 빨래를 널다가 그 이유를 알았다. 주헌이의 첫돌부터 동네 할머니의 칠순잔치, 새로 개업한 떡집, 연천초등학교 총동문회 체육대회... 온통 사람들에게 얻어온 것들이다. 나는 매일 이 고운 연들의 품에 씻은 얼굴을 묻었던 것이다.」 '축! 박주헌 첫돌'
유난히 여백이 많고, 4부의 구성에, 으레 산문집이 그렇듯 다양한 주제가 엮여 있지만, 누나의 죽음으로 가장 잘 드러나는,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산문집 전체의 흐름을 조율하며 책의 구심점이 되어 준다. 각각 다른 이야기들이지만 어느 정도의 일관성을 가진다는 점이 몰입을 돕는다.
「나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 한 문장 정도의 말을 기억하려 애쓰는 버릇이 있다. "뜨거운 물 좀 떠와라"는 외할아버지가 내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고 "그때 만났던 청요릿집에서 곧 보세"는 평소 좋아하던 원로 소설가 선생님의 마지막 말이었다. 나는 죄송스럽게도 두 분의 임종을 보지 못했으므로 이 말들은 두 분이 내게 남긴 유언이 되었다.」 '어떤 말은 죽지 않는다' 중
「나는 편지들이 궁금해 손에 잡히는 대로 펼쳐보았다. 한참을 읽어보다 조금 엉뚱한 대목에서 눈물이 터졌다. 1998년 가을, 여고 시절 그녀가 친구와 릴레이 형식으로 주고받은 편지였는데 "오늘 점심은 급식이 빨리 떨어져서 밥을 먹지 못했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 10여 년 전에 느낀 어느 점심의 허기를 나는 감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것으로 편지 훔쳐보는 일을 그만두었다.」 '편지' 중
표정이 필요 없는 하루를 보낼 때가 많다. 웃을 일도, 울 일도 없는 하루. 웃을 때 말고는 별로 쓸 일이 없는 얼굴의 근육은 굳은 듯한 날이 많고, 눈 앞쪽 깊게 팬 공간에 열이 오를 일도 참 없다. 차갑고 딱딱한 세상에 감정과 감성은 우선순위의 문제에서 늘 밀려나고, 온종일 표정을 짓지 않아도 하루를 보내는 대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겐, 배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자듯이 꼭 섭취해야 하는 감성의 일정량이 있는 듯도 하다. 그걸 채우기에 예술이 필요하고, 문학은 그 한 축을 이루며, 정신없이 바쁘기만 한 대부분의 삶의 형태 중에, 비교적 가벼운 산문은 필요한 감성의 양을 채우기에 적절한 방법이라고도 보인다.
한 유명한 팝아트 작가의 말마따나, 그가 일단 유명해져 있어 내가 다른 이들과 같이 환호를 보내는 것인지 끝없이 의심해 가면서도 그의 작품을 유심히, 그리고 충분히 좋아하며 읽었다. 그와 같은 탁월한 작가들에게 의심과 반함의 감정을 반복해 경험하다 보면 무언가 답이 보일 거란 기대가 아직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