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국, 보름, 옥녀, 복실/순임의 이야기
작년 11월부터 1월인 지금까지 조정래 작가님의<아리랑> 12권을 완독 했다. 3달 동안 12권의 책을 다 읽었다는 성취감과 역사에 대한 어두컴컴한 내 무지의 영역에 빛을 밝혀주는 작업이었다. 여러모로 그 시대에 대한 깨달음이 많았고 특히 그 시대를 살던 같은 여자들의 인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본다.
아리랑의 시대적 배경은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그리고 광복까지이다. 불과 100여 년 전의 이야기들인데 이렇게 삶이 다를 수가 있나, 그들의 험난한 역사 위에 지금의 우리가 있고 오롯이 나 하나의 삶만 안온하게 잘 가꾸면 되는 지금을 살 수 있어 감사하고 다행이고 안쓰럽다.
<태백산맥>, <한강>과 마찬가지로 <아리랑>에도 수많은 주인공들이 나온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따라가려면 노트에 그들의 이름과 관계들을 적어놓고 헷갈릴 때마다 보면 도움이 된다 ㅋ 수많은 사람들 중 같은 여자들이 겪는 그 삶은 더 기구하고 신산스럽다.
여러 여자주인공들이 나오지만 제일 기억에 남는 사람은 감골댁의 오 남매 중 둘째인 보름이와 위안부로 끌려간 복실이와 순임이다. 일제강점기 창씨개명 전이라 그런지 “자”로 끝나는 촌스러운 이름 대신 보름, 수국, 월엽, 하엽, 오월, 연희 등등 우리나라 고유의 이쁜 이름들이다.
수국이 이야기
보름이 와 수국이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 오 남매 중 둘째와 넷째로 태어난 인물 좋은 딸들이다. 가난한 집에서 눈에 띄게 인물이 빼어나면 화를 당한다. 수국이는 이름답게 꽃처럼 곱고 어디서든 눈에 띄는 얼굴이다.
큰 오빠 영근은 하와이로 갔고 두 언니 보름이와 정분이는 시집을 갔다. 넷째인 수국이는 엄마 감골댁, 막내 대근이와 함께 살고 있었다. 감골댁에게 어떤 여자가 찾아와 수국이를 쌀 몇 가마니에 데리고 가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수국이를 첩으로 맞고 싶어 하는 일본인(하시모토)이다. 남자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돈 있고 권력 있으면 마음에 드는 여자를 갖기 위해 그것들로 밀어붙인다.
처녀딸을 첩으로 보낼 수 없어 감골댁은 수국/대근을 데리고 지삼출, 손판석과 함께 군산으로 야반도주한다.
수국이의 인물 때문에 밖으로 일을 보내면 괜히 일을 당할 거 같아 보내지 않았지만, 생활고에 어쩔 수 없이 수국이는 손판석의 아내와 함께 정미소에 일하러 나간다. 그러다 그 반반한 인물에 정미소 사장 아들 백종두가 입맛을 다신다. 백종두는 수국이를 속여 몰래 끌고 와 밤새도록 강제로 그 짓을 한다. 처녀인 수국이는 생판 모르는 남자와 징그럽고 역겨운 하룻밤을 견뎌내야 했다. 그 일에 분노한 동생 대근이는 지삼출과 함께 밤에 백종두를 습격해 죽도록 패주고 그들은 만주로 도피한다. 그 결과 백종두는 명씨박이눈이 되고 일터에서도 밀려나게 된다. 여자하나 잘못 건드려 그 꼴이 된 건 참 잘된 거다.
만주로 도피하고 나서 그 반반한 인물에 이번엔 친일파 밀정인 양치성이 수국에게 접근한다. 그 사이 감골댁은 경신참변으로 죽게 되고 엄마를 잃게 된 수국이는 양치성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결혼을 하게 된다. 결국은 양치성이 밀정인걸 알아내고 수국이는 그를 죽일 결심을 한다. 그가 술이취해 집에 들어온 어느 날, 관계를 몇 번씩하고 완전 곯아떨어지게 하여 그의 심장을 칼로 찌르고 도주한다.
수국 역시 원치 않는 양치성의 아이를 출산한 뒤 매몰차게 아이에게 젖 한번 물리지 않고 중국의 어느집으로 입양 보낸다.
보름이 이야기
보름이는 수국이의 언니다. 인물은 수국이가 보름이 보다 낫지만 그녀 역시 어디서 빠지는 인물은 아니다. 보름이는 시집갈 나이가 되었으나 집이 가난해 마땅한 자리가 없다. 그러던 중 부잣집 나이 많은 노인네가 쌀 몇 가마니를 줄 테니 첩으로 들어오라 한다. 아무리 가난해도 처녀딸을 첩으로는 보낼 수 없다는 감골댁이다. 그러다 주위에 사람을 소개받이 보름이는 무주 골짜기로 시집을 간다. 신랑 쪽도 형편이 좋지 않지만 총각이고 좋은사람이다. 가난하지만 남편에게 사랑 많이 받고 오손도손 시아버님을 모시고 살아가는데 남편이 독립군의 선 역할을 했다고 느닷없이 일본군에게 죽게 되고, 늙은 시아버지도 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 때문에 땅을 뺏기면서 그쪽 사람에게 대들었다는 죄로 공개 총살을 당한다. 남편도 시아버지도 다 죽고 혼자서 무주에서 살 수 없어 어린 아들 삼봉이를 데리고 군산에있는 손판석을 찾아간다. 엄마 감골댁과 수국/대근(남동생)은 이미 만주로 떠나고 없다.
그 시절 군산은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아 도시가 분주하다. 시골보다는 할 것이 많았으나 배운 거 없고 힘없는 여자는 할 게 제한적이다. 어딜 가나 반반한 인물이라 눈에 띈다. 보름이는 군산에서 우연히 장칠문을 만나게 된다. 장칠문은 예전 보름이가 시집가기 전부터 그녀에게 흑심을 품었던 남자다. 그는 아버지(장덕풍)가 보부상이고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친일을 하게 되면서 순사가 되었다. 그는 이미 결혼도 했지만 막무가내로 집을 얻어서 보름이를 강제로 데리고 와 첩 살림을 차린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력에 이끌려 싫은 남자와 한 이불 밑에 있어야 한다는 게 너무 끔찍하고 치욕스럽다. 그리고 힘없는 여자의 몸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에 분노를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장칠문은 선임 세키야에게 본인의 첩으로 인물 좋은 보름이 가 있다는 걸 자랑삼아 보여주게 된다. 보름이의 인물을 탐낸 세키야는 장칠문이가 업무상 곤경에 빠진 걸 해결해 주고 그 보상으로 보름이를 자기 집으로 데려온다. 이 말도 안 되는 막장 같은 이야기가 너무 징그럽고 혐오스러우며 보름이 본인의 심정은 어떨까 싶다. 세키야의 집으로 보름이는 아들 삼봉이와 함께 거처를 옮긴다. 보름이는 또 다른 남자 세키야와 한 이불을 덮고 산다. 그러다 세키야는 보름이에게 감정이 시들해지기도 하고, 그녀가 독립군을 집에 숨겨주려다 들켜서 이래저래 세키야의 집에서 나온다. 보름이는 세키야의 아이를 낳았다. 세키야의 집에 살고 있을 때부터 (수국이에게 관심을 보였던) 서무룡이 수국이와 닮은 보름에게도 관심을 보이며 수시로 보름이를 찾아가 성관계를 맺는다. 징그럽고 싫을 건데 왜 보름이는 거부를 못하나.. 그러면서 또 보름이는 임신을 하게 되고 서무룡이의 딸을 낳게 된다.
그렇게 아비 다른 자식 셋을 낳게 된다. 삼봉, 금님, 금예
여자 인물이 반반하다 보니 여기저기 팔려가며 물건처럼 성노리개로 이용되는 모습이 참 씁쓸하다. 먹고살게 막막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무력할 수밖에 없는 게 화가 난다. 자식을 안 낳아봐서 모르겠는데, 원치 않는 사람과 관계를 맺어 낳게 된 그 자식에게 정이 갈까? 그럼에도 살뜰하게 보름이는 두 딸들을 키워나간다.
옥녀(옥비)의 이야기
옥녀 역시 부자는 아니지만 화목한 집에서 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다. 옥녀의 아빠 차서방은 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 때문에 땅 뺏기고 면서기를 죽여서 공개처형 당하고 그 사건으로 엄마는 실성해서 죽는다. 하루아침에 고아가 된 어린 득보(옥녀의 오빠)와 옥녀는 어떻게든 살아가야 되기 때문에 구걸을 하며 둘에게 서로 의지한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고되게 꾸역꾸역 살아가는 그 어린 남매가 너무 애처롭다.
어린 옥녀에게는 아버지가 물려준 멋진 목소리가 있다. 옥녀가 힘겨워 노래를 부르는데 지나가던 어떤 여자가 그 목소리가 예사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고 득보와 옥녀에게 같이 가서 함께 살자고 한다. 배불리 먹여주고, 재워준다며 배고픈 그들을 꼬드긴다. 너무 배가 고프고 힘드니까 따라가는 건 맞는데 벌써 불안하다. 그 여자는 본인이 일하는 주막으로 남매를 데려와 한동안 배불리 먹이고 재워주고 하다, 놀이패에 옥녀를 팔아버린다. 그렇게 득보와 옥녀는 생이별을 한다. 너무 어린 나이라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무력하게 당했다. 다행히 옥녀는 어린 나이에 고생은 하지만 너무 험한 꼴은 당하지 않는다. 놀이패에서 도망쳐 나와 유명한 소리꾼을 찾아가 그 집에서 일해주고 먹고 자고 하며 소리를 야무지게 배운다. 마침내 옥녀는 소리를 마스터하고 명창이 되어 옥비라는 이름을 받고 그 집을 떠난다.
몸집이 커진 옥녀는 자기를 팔아먹은 주모에게 찾아가 밤에 칼을 들이대며 오빠를 찾아내라 한다. 그 주모에게는 이미 오빠 득보가 여러 번 와서 동생이 어디에 있는지 협박을 했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주모는 득보가 있는 곳을 알려주어 성인이 된 남매는 드디어 다시 만나게 된다.
옥녀는 명창으로 노래하는 기생이 된다. 그 빼어난 노랫소리와 고운 얼굴을 두고 남자들이 그냥 둘 리가 없다. 이번엔 고위관직 일본 놈이 처녀인 옥녀를 가지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덤벼든다. 넘어가지 않던 옥녀는 득보가 감옥에 있는걸 빼내기 위해 허탈하게 그 일본 놈에게 무너진다. 옥녀를 가지기 위해 득보를 감옥에 넣은 것이다. 권력 있는 자가 자기가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해 자기들끼리 판을 짠다. 옥녀 역시 그 밤이 얼마나 치욕스럽고 싫었겠는가.
복실이와 순임의 이야기
시골의 어린 두 처녀 복실이와 순임이. 집이 가난해서 밑으로 딸린 동생, 가족들이 잘 먹지를 못해 시들시들하게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어느 날 얼굴 번지르르한 여자가 찾아와 지금 당장 돈을 줄 테니 이걸로 가족들 밥 지어먹이고 일본에 일하러 가자고 한다. 가서 공장에서 한 2년만 고생하면 돈 많이 벌어올 수 있다고 꼬신다. 그 시절에 처녀 몸으로 일본을 간다는 게 말이 안 되고, 못가게 말려야 되는데 당장 눈앞의 돈에 무너진다. 복실이와 순임이는 취업사기로 끌려와 일본군 전투지역으로 가게 된다. 그러면서 그녀들은 위안부가 된다. 복실이와 순임이처럼 수많은 젊은 처녀들이 속아서 위안부가 되었다.
그 어린 여자애들이 치마를 걷어올리고 그 무지막지한 일본군들을 하루에 몇십 명씩 받는다. 하루에 스무 명 넘게 받고 그들은 엉기적엉기적 걸어 나와 식당으로 모인다. 꽃다운 처녀들에게 그 치욕스러운 공포의 순간들이 그들의 삶을 무지막지하게 짓밟는다. 처음에는 발버둥 치던 그녀들이 나중에는 알아서 치마를 걷어올리며 그 말도 안 되는 삶 속에 타협하며 살아나간다. 너무 잔인하고 가슴 아프다. 원하지도 않는 그 관계를 강제적으로 연달아 20번씩 넘게, 천으로 가려진 좁은 방에서 짐승처럼 그 일을 꾸역꾸역 치러내는 그녀들을 대체 어떤 방식으로 위로를 해야 하나.
그러던 와중 2차 대전의 막바지, 일본군이 패전의 길로 들어섰다. 일본군들 역시 자신들이 죽을걸 알고 더 난폭해진다. 연합국들의 폭격이 심해지고 순임이와 다른 처녀들은 정신없이 총알을 피해 버마의 산을 이리저리 파고든다. 산중에서 총알을 피하다 또 다른 일본군들을 마주치게 된다.
마지막 문장에 순임이는 그 군인을 꼭꼭 안아주었다.라는 문장이 며칠 동안 계속 생각이 났다. 일본군들한테 야비하게 짐승처럼 그만큼 당하고도, 막상 그 군인 중 하나가 내일 나가서 죽는다고 하니 꼭꼭 안아주는 그 자애로움이 마지막 순간에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 의아하다. 전쟁터에서 폭격을 피하다 결국은 순임이도 복실이도 그 폭탄에 맞아 죽게 된다. 마지막까지도 그 짓을 하다 죽는다. 짧은 인생이 이렇게 험난할 수가.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소설의 어느 부분에서 “잠자리 동녀”라는 것이 잠깐의 에피소드로 나왔다. 잠자리 동녀가 뭐지? 인터넷에 찾아봐도 그 정보가 잘 없다. 잠자리 동녀로는 어린 소녀를 쓰며 그 소녀의 이를 모조리 싹 뽑아서 늙은 남자가 자는 방에 넣는다고 그런다. 너무 끔찍스럽고 어이없는 이 잠자리 동녀는 무엇인가? 늙은 노인들은 기력이 달리고 체온도 떨어져, 잘 때 어린 소녀를 껴안고 자면 체온도 높아지고 기력도 세진다고 그런다. 그래서 돈 있는 집에서는 여리고 어린 소녀를 잠자리 동녀로 샀나 보다. 그 어린아이는 얼마나 싫고 무섭겠는가. 지금으로 치면 아동학대에 성범죄다.
저 다섯 여자들의 공통점은 집이 가난하고 궁핍하다. 그러다 보니 지금보다 더 노골적인 저 시대에 성적 피해에 가감 없이 노출된다. 이미 돈 많은 지주나 양반들은 친일을 하면서 자기 재산, 딸자식들과 아내를 지켜내고 누릴 거 누리며 잘 산다. 친일 지주집, 양반집 여자들은 저렇게까지 당하진 않는다. 여자들 중에도 돈 없고 백 없는 여자들이 성 노리개의 하나로 물건 취급되고 있다. 모두가 아닌 걸 알지만 힘이 없으니 눈뜨고 당해도 할수 있는게 없다.
위안부 여성들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 시간이 흐르면서 저들이 당한 수많은 상처들이 역사 속으로 희미해져 가는데,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일본은 꼭 용서를 빌어야 한다.
저 시대에 힘겹게 살아갔을 많은 여자들의 기구한 삶을 이야기로 잘 엮어준 작가님의 노고에 감사하고, 책으로나마 그들의 힘겨운 삶을 잠시나마 알아가고 공감할 수 있어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