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슬작가 짧은 소설
이지운.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급하게 책을 펼쳐 들었다. '역시나'였다.
출생이 달랐다. 서울 출생이라는 글로 시작하는 프로필 속의 이지운은 그 이지운이 아니었다. 제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내가 아는 이지운'은 프로필에 적혀있는 유명한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다.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면 그랬다. 기억력이 똘똘하다고 자부하고 있었던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망치듯 제주도로 떠난 이. 지. 운이라는 세 글자를 움켜쥐고 살았다. 아니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아왔다. '공부라도 잘해서 유명 대학 문예 창작과에 입학했더라면 어쩌면 나는 아주 약간의 용기를 발휘했을지도 모른다. 경제적인 것들은 '개나 줘'라는 마음으로 길거리에 던져주고 순수한 모습으로 우아하게 그의 손을 붙잡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상하는 봄날은 오지 않았고 이지운은 간신히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엄마가 지키고 있다는 제주도로 다시 내려갔다. 가로수가 연둣빛으로 조금씩 물들기 시작하던 4월, 벚꽃을 데리고 떠났다.
대학 졸업 후, 부모님의 맞선에 순응하며 여러 사람을 만났다. 아주 예쁘고 늘씬한 미모는 아니었지만 흔히 얘기하는 평균적인 키, 평균적인 몸무게를 지녔기에 적당한 자리가 몇 번 만들어졌다. 평균적인 사람들이었다. 열렬한 끌림은 없었지만 정감이 느껴지는 얼굴이었고, 결혼 후 살 집을 이미 마련해두었다는 말은 엄마의 마음을 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성실한 사람, 자식 굶기지 않는 사람, 거기에 착한 사람, 지금 한 이불을 덮고 지내는 사람을 나는 그렇게 만났다. 초등학교 1학년인 첫째, 올해 유치원에 입학하는 둘째, 그리고 남편과 나. 단란한 가족을 언급할 때 우리 집은 순위에서 밀린 적이 없었다. 물론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은 혼자 상상에 빠지곤 한다.
'이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마지막으로 맞선 보았던 고등학교 과학 선생님과 결혼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날 집 앞까지 차로 데려다준 사람도 괜찮았는데’
하지만 그렇게 혼자 기억을 더듬다 보면 매번 끌려 나오는 이름이 있다.
이. 지. 운
이지운.
같은 반의 다른 남학생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윤동주를 좋아했고, 역사소설을 즐겨 읽는 모습은 관심의 대상, 그 자체였다. 유연하고 부드러운 사고력은 동급생 여자아이들에게서 높은 인기를 차지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다만 학교를 자율적으로 나오는 것이 문제였고, 기껏 참여한 수업 시간마다 작가가 되기 위한 연습이라면 소설을 쓰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을까. 과목 선생님마다 따로 불러내어 어르고, 달래고, 혼도 내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러다 어떻게든 '졸업은 시켜야 한다'라는 쪽으로 방향이 모아졌고, 이후 가능한 많은(거의 대부분) 선생님이 지운이를 외면했다. 서로에게 좋은 가장 탁월한 선택이라며 입을 모았고, 다행히 지운이는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학교에서는 문제아가 사라져서 좋았고, 지운이는 고졸 학력을 얻었으니 서로 윈윈이었다. 하여간 여러 이유로 지운이는 정식 문제아는 아니었지만, 매번 문제아에 이름이 올려졌다. 그래서 다들 지운이를 피하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별이 던진 그물에 걸린 탓인지, 자꾸 지운이에게 마음이 쓰였다. 지금도 이해가 안 되지만 하여간 그땐 그랬다. 하긴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그 시절에 어디 그것 하나뿐일까.
대학 O.T에서 진실게임을 했었다. 첫사랑에 관한 선배들의 짓궂은 질문이 쏟아졌고, 나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으로 이지운을 외면하면서 '이룰 수 없는 첫사랑의 아픔'을 조금 과장되게, 그러면서 완벽하게 잊은 것처럼 거짓말을 했다. 조금만 더 용기를 내었더라면, 아니 조금만 더 인생을 현실적으로 계산하지 않았다면 어설픈 첫사랑으로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교무실에 들어가는 것이 죽을 만큼 싫었던 내가 문 앞에 어정쩡하게 서 있을 때, 문을 열면서 앞서 걸어준 사람도 이지운이었고, 팀별 과제 발표 시간에 얼굴이 붉어진 나를 대신해 보고서를 읽어준 사람도 이지운이었다. 아주 가끔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쌍꺼풀 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눈빛이 다른 곳으로 향할 때 내 마음이 외면당한 것처럼 속상해했다. 그런 이지운을 딱 한 번 시내에서 만났었다. 졸업식이 일주일 정도 남았을 때였다. 이지운은 가방에서 작은 노트 한 권을 꺼내 자신이 쓴 소설이라고 내게 읽어보라고 전해주었다. 내가 첫 독자라고 얘기하면서. 그러면서 이지운은 덧붙였다.
"네가 늘 내 작품의 첫 번째 독자였으면 좋겠어"
무슨 소리인지 정확하게 몰랐더라면, 언니의 연애 이야기를 조금만 적게 들었더라면, 가난한 예술가의 아내도 살아가는 엄마의 하소연을 밤마다 듣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나는 아주 멀쩡한 정신으로 영화 속 주인공처럼 이렇게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너무 멋지다. 너무 낭만적이야.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라고.
하지만 나는 무슨 소리인지 너무 정확하게 알아들었고, 가난한 연인과의 슬픈 일과를 빠짐없이 보고하는 언니가 있었다. 예술가로 살아가는 아버지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아침마다 초토화된 집을 뒤로한 채 빛의 속도로 현관문을 뚫고 나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너무 잘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날을 기억한다. 카페에서 나와 둘 다 바닥만 쳐다보면서 말없이 걷고 또 걸었다. 정류장을 홀로 지키고 있는 벚꽃나무에게 시선을 박은 채, 조금이라도 버스가 늦게 오기를 바라면서, 아니 서둘러 일찍 오기를 바라면서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나는 예술 하는 사람 말고, 예술 안 하는 사람을 좋아해"
"..."
"지운아. 너는 소설 쓰는 것 말고, 좋아하는 것 없어?"
“나? 나는 소설 쓸 때 제일 행복해. 제일 좋아. 다른 건 상상도 안 해봤는데...”
"... "
눈 밑으로 내려온 앞머리를 귀 뒤로 꽂아 넣으면서 지운이를 올려다보았다. 더 이상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상황을 눈치챘던 것일까, 말이 상처로 남을 거라는 사실을 직감했던 것일까, 아니면 떠나는 겨울바람이 심술을 부리는 걸까. 대화를 이어가지 못하고 원망하는 눈빛으로 벚꽃나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때 지운이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왔다.
"나중에 제주도에 놀러 와"
“응? 제주도?”
“제주도. 다시 내려가려고...”
도로를 달리던 버스가 경적소리를 울리며 지나갔다.
빵. 빵. 빵.
'버스로 제주도에 갈 수 있을까'라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고 있는데, 또다시 경적이 울렸다.
빵. 빵. 빵.
내가 타야 할 버스가 온 것이었다. 타야 할 버스가 왔고, 지운이는 말없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온몸이 제주도로 떠나는 배 위에 올라탄 것처럼 현기증이 났다. 잘 지내라는 인사는커녕, 눈도 맞추지 못하고 헤어졌다. 나의 첫사랑은 그렇게 버스 안에서 제주도를 되뇌는 것으로 끝났다. 아니다.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 끝났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그때부터였을까. 이상하게 나는 벚꽃이 싫다.
by 기록디자이너 윤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