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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화랑 Nov 30. 2024

휴대폰 속 은밀한 사생활

완벽한 타인

 

  영화 <완벽한 타인>에서는 오랜 친구들인 네 커플이 모여 저녁 식사를 하게 된다. 이들은 오랜만에 만나 술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중, 한 친구가 흥미로운 게임을 제안한다. 바로 각자의 스마트폰을 식탁 위에 올려두고, 오는 전화, 문자, 이메일을 모두 공개하는 것. 처음에는 장난처럼 시작한 게임이었지만, 게임이 진행될수록 각자의 숨겨진 비밀들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영화는 휴대폰을 통해 현대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며, 우리 일상 속 휴대폰이 어떻게 사생활의 거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지 강조한다. 휴대폰은 단순한 소통 도구를 넘어, 지인과의 관계에서 숨기고 있는 비밀과 은밀한 사생활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문득, 나 역시 22살때 우연히 한 남자의 휴대폰 속 은밀한 사생활을 목격했던 일이 떠올랐다. 

 나는 22살, 대학교 등록금을 벌기 위해 학교를 휴학하고, 수학·영어 입시학원에서 인포메이션 데스크 업무를 맡고 있었다.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의 출석을 체크하고 학원비를 관리하며, 수학과 영어 선생님의 강의 준비를 돕는 일을 했다.  

  특히 수학 선생님은 결벽증을 가진 완벽주의자로, 60대 중반의 까다로운 할아버지였다. 아이들에게는 한없이 부드럽고 온화해 보였고, 그들에게는 거의 양처럼 다정했다. 그러나 나와 영어 선생님에게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특히 내게는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그의 눈빛은 한순간에 번뜩였고, 표정은 험악해졌다. 복사물을 실수해서 가져가니 그는 호랑이처럼 눈을 번뜩이며 유인물을 낚아채더니, 아이들 앞에서 박박 찢어버리고 호통을 쳤다. "이것도 제대로 못 하냐"라는 호통과 함께 교실 안은 사방이 종이 조각으로 어질러졌다. 가끔은 영어 선생님이 복사용지를 많이 쓴다고 화를 내며, 그가 사용하는 종이까지 나더러 관리하라고 할 정도였다. 아이들에게 양처럼 웃는 얼굴 뒤에 숨은 호랑이, 아니 거의 악마에 가까운 이중적인 모습은 오직 나와 영어 선생님만 목격할 수 있는 비밀이었다. 

  영어 선생님은 40대 후반쯤 되어 보였고, 말수도 거의 없었다. 매일 저녁 나와 함께 학원에서 도시락을 먹었는데, 그는 대부분 밥을 먹지 않거나, 밥을 먹는 날에는 햅반과 참치, 그리고 아내가 싸준 김치만 먹곤 했다. 그의 얼굴은 어딘가 흐릿하고 졸린 인상을 주었다. 코는 아래로 길게 뻗어 있었고, 눈은 크지 않고 아래로 쳐져 있어 대체로 무표정해 보였다. 웃어도 입꼬리가 내려가 있어 표정은 늘 불투명했다. 정돈되지 않은 자연스러움, 혹은 무심한듯하지만 지쳐 보이는 표정이랄까.

  그러던 어느 날, 그 결벽증 강한 수학 선생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 열심히 구석구석 복사실을 청소하던 중 낯선 휴대폰을 발견했다. 당시 내가 손에 든 것은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폴더폰이었다. 선생님들 휴대폰은 아닌데, 학생이 놔두고 간 걸까? 손끝으로 가볍게 폴더를 여는 순간, 화면 속에 나타난 건 다름 아닌 남녀의 몸이 뒤엉킨 포르노 사진이었다. 저해상도임에도 불구하고, 뭉개진 화질 속에서도 분명히 알아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폴더를 열기만 했을 뿐인데, 화면 속에는 이미 수많은 포르노 사진들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얼른 휴대폰을 닫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로 그때, 복도에서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힐끔 내미어보니 영어 선생님이었다.

"선생님, 여기 낯선 휴대폰이 하나 있네요."

영어 선생님은 내 손에서 휴대폰을 휙 낚아채더니, 무심하게 말했다.

"아. 이거 제거예요."

  그 휴대폰은 다름 아닌 영어 선생님의 서브폰 이었던 것이다. 그 폴더폰을 열었을 때 느낀 충격은 한동안 가시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불법 촬영 동영상이 아니라면 야한 사진과 동영상이 담긴 서브 폰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나쁜 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다만 그때의 나는 겨우 22살에 불과한 아가씨였고, 그런 장면을 우연히 목격하는 상황은 너무도 예상 밖이었다. 누군가의 은밀한 세상을 그렇게 생생히 들여다보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 주인공이 바로 내가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하는 영어 선생님이라는 사실이 충격을 배가시켰다. 평소 학원에서 무심하게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말없이 도시락을 먹던 그가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가졌다는 걸 알게 된 순간, 그 고요하고 쓸쓸해 보이던 모습조차 다시 보였다. 그가 조금 불편해 보이는 미소를 지어도, 내가 눈을 피하는 이유를 아는지 모르는지 무표정하게 지나가는 그 순간조차도 나는 혼자 속으로만 부끄러워야 했다. 하필 그의 이름이 또 '성기'라니, 생각할수록 기묘하고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 휴대폰 속 이미지를 본 게 들킨 건 아닐까' 싶어 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영화 <완벽한 타인> 속 친구들이 단순한 놀이처럼 시작한 휴대폰 공개 게임이, 결국 모든 이들의 사적인 비밀을 낱낱이 드러내며 그들의 관계를 뒤흔들지 않았던가. 서로가 모른 척하고 눈 감아 주던 작은 비밀들이 폭로될 때, 그들이 과연 진정으로 가까운 사이였는지조차 의심스러워진다. 그들의 사생활이 하나둘 밝혀질 때마다, 우리는 타인의 진짜 얼굴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알고 싶어 하는지를 되묻게 된다.

  그때 내가 발견했던 영어 선생님의 휴대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그의 은밀한 세계를 엿보게 해 준 작은 열쇠였지만, 동시에 그가 학원에서 지내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그의 또 다른 삶을 보여주는 문이었다. 아마 선생님은 평소와 같이 말없이 학원에 오가고, 아이들에게 친절을 베풀며 매일 반복되는 수업을 해나가겠지만, 나는 그 속에 또 다른 모습을 알게 된 이상 어딘가 그를 이해하는 듯하면서도 여전히 의아했다. 휴대폰이라는 조그마한 기계에 들어 있던 그의 사적인 취향이, 그토록 낯설고 뜻밖의 충격을 준 이유는 단지 그 내용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가진 이중적인 삶, 그 속에 감춰진 고독과 은밀함을 알게 된 순간의 당혹감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영화를 떠올리며 나는 깨달았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완벽한 타인'일지도 모른다고. 서로의 사생활을 전부 알기란 불가능에 가깝고, 어쩌면 알 필요조차 없는지도 모른다. 우리도 그저 각자의 작은 휴대폰 안에 다양한 모습과 비밀을 감춘 채 살아가는 건 아닐까. 누군가가 내 휴대폰을 통해 내 사생활을 낱낱이 본다면, 과연 나는 얼마나 편안할 수 있을까? 이토록 작은 기계에 내 모든 관계와 감정, 그리고 사소한 비밀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소름 끼쳤다. 그리고 그것이 비단 나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의 이야기라는 걸 생각할수록, 서로가 서로에게 완벽한 타인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어쩐지 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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