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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가스포어 megaspore Dec 17. 2023

의무감에 사는 분

내가 좋다고 했던 나이 많은 선생님의 말씀 중에 좀 모순이 있었다. 분명 예전에는 와이프랑 세월이 지날수록 더 좋아지는 것 같다고 하시더니 나와의 마지막 만남에서는 와이프랑 의무감에 산다고 했다.좋은 아빠, 좋은 남편처럼 보여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마음을 놓고 더 마음을 연 면도 있는데, 마지막에 “의무감에 사는거지”라는 그 멘트에 좀 깨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 첨엔 이미지 관리하느라 좋은 남편 코스프레 한거였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중간에 이렇게 관계가 급진전되는 신호가 있긴 했다. 갑자기 나한테 귤을 까준다던가 나한테 낚시로 잡은 문어를 준다던가 그냥 나를 좋게 생각하는 친절한 분으로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는건가.


그분이 나에게 나 때문에 잠을 설친다고 말한 이후부터 며칠동안 갑자기 분위기가 사귀는 것 비슷하게 됐는데, 흰 머리에 그냥 할아버지 느낌이었던 분이 마지막 날에는 뭐가 씌였는지 그 흰머리도 체격도 나쁘지 않게 보였다.


그분은 날 정말 좋아했을까. 아니면 조금은 젊은 사람을 만나서 아주 예전에 느꼈던 설레임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었을까. 마지막 만남에 차 안에서 그분께서 거의 울먹이시면서 나를 안고 싶다고 갖고 싶다고(두번이나 이말을 하셨다)하시는데, 난 정말이지 우리가 그정도로 진전된 관계가 아닌데 왜 날 갖고 싶을 정도로 나에 대한 감정이 진해지신건지 궁금했다. 내가 본인보다 젊은 여자라서? 고백하니까 얼씨구나 당장 좋아하고 새벽까지 카톡 보내는 쉬운 여자라서?


그분이 울먹이며 그렇게 본인의 사랑이 진짜임을 피력하시는데 나는 좀 오그라드는 느낌을 받았고(우리 그정도로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잖아요..)저 분이 갑자기 (며칠사이에)저렇게 되신 이유가 궁금했다.


그분과 만나지 말자고 선언하기 전날 나는 신랑에게도 쓰지 않는 편지를 장장 4페이지나 써서 사진 찍어 그분 카톡으로 보냈고(다 쓰고 보니 새벽 4시반)그분에게서는 가슴이 뜨거워지고 살아있는 느낌이라는 문자를 받은 적이 있다.


나는 이분 자체가 좋았던게 아니라, 그분도 내 자체가 좋았던게 아니라 “살아있는”느낌이 좋았던 것이다. 무미건조한 일상에서 갑자기 찾아왔던 “살아있는” 느낌.


그런데 살아있는 느낌을 꼭 남의 가정 있는 사람 만나가며 몰래 느끼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건전한 떳떳한 방법으로도 충분히 살아있다는 느낌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어렵지만 나는 그 길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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