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 녀석들에게는 학기 초 약 4주의 시간이면 서열정리까지 마치기에 충분하다. 앞줄에 앉은 녀석들은 앞줄에 앉은 대로, 뒷줄에 있는 녀석들은 그들 나름대로 각자의 영역에서 서열을 정하곤 했다. 그렇다고 앞줄에 있는 녀석이 늘 잡아먹힌 것만은 아니었다. 제 나름의 실력으로 독보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내들도 있었다. 그런 녀석은 앞 줄에 앉아 있었지만 앞 줄에 한정되지 않는 존재감을 뿜어냈다. 싸움과 울음과 코피와 욕설이 난무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실은 안정됐다.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더라도, 그 자체의 안정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시절은 학생들에게 알려줬다.
90년대라고 왕따라는 게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은근히 따돌린다라는 뜻의 '은따'라는 말이나, 대놓고 따돌린다는 '왕따'라는 말 모두 90년대부터 시작된 단어이다. 다행히 내 기억 속 중학교 1학년 우리반에서 특별히 유난스럽게 괴롭힘을 당했던 녀석은 떠오르지 않는다. 각자도생이었지만 동시에 각자의 와이파이를 켜놓았다랄까. 서로는 기어코 연결 됐다. 다시 말하지만 그 시간은 한 달이면 충분했다. 3월 한 달.
직장인이 되어 마주하는 한 달과 학창시절의 한 달은 비할 수 없이 다르다.
직장인을 상징할 수 있는 문장은 필경 '여느 날과 다름 없이'라 할 수 있겠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은 오늘 같을 것을 짐작하는 것은 직장인에게 있어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반면에 중학교 1학년에게 어울리는 표현을 찾아보면 아마도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일 것이다. 학창시절의 매일은 매번 어느 날이었다.
학창시절 그때와 직장인인 지금의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 이슈가 달라진 것일까, 내가 바뀐 것일까.
한 가지 확실한건, 매일 매일이 새로움의 연속이었던 그 시절의 그 날들은 마음 속에 짙은 흔적을 남겼다는 것이다. 긴 하루 지나고 언덕 저편에 담배 연기가 아닌 학생들의 마음의 열기가 채 가라 앉지 않고 맴도는 것만 같았다.
중학교 1학년, 수업시간이면 매일 축구만 해서 별명이 싸커맨인 체육선생님은 늘 수업 시간 전에 일장 연설을 했다. "너희들은 더 이상 초등학생이 아니야!!"
그때는 몰랐다. 그 비유가 이렇게 바뀔줄은.
2학년이 되자 싸커맨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더 이상 1학년이 아니야"
3학년이 되기 전 나는 이사를 갔다.
하지만 3학년이 되었을 때 싸커맨이 무슨 말을 했을런지는 알겠다.
"너희들은 이제 최고학년이야"
어쩌면 싸커맨은 중학교 1학년 아이들에게, 앞으로 펼쳐질 교장선생님의 훈화말씀,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중대장의 실망, 더 많은 세월이 흐르면 만나게 될 부장님의 꼰질을 함축적으로 보여준 예언자였을지도 모른다.
싸커맨을 비롯하여 선생님들은 열심히 가르쳤다. 물론, 자신만의 방식으로.
하지만 교사의 가르침과는 별도로, 아이들은 정말이지 그저 가만히만 있어도 자라난다.
가만히 두었는데 어떤 존재가 특정한 방향으로 향한다는 건 신기한 일이다. 알려주지 않아도 어느 새 어딘가로 향하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놀라울 따름이다.
선생님들의 수업은 지식을 가르쳤지만, 수업시간을 넘어 학교는 삶을 배우게 했다.
중학교는 우리에게 경험의 부피를 차근차근 알려주기 시작했다.
하굣길 중앙계단 1층이 그랬다. 누군가가 말하지 않아도 1학년 사내아들은 4월이 되자 중앙계단에 바글바글 모였다.
서문과 동문이 있음에도 굳이 중학교 1학년 사내아이들은 중앙계단에 모여들었다.
수업 시간에 책은 늦게 펴내도, 집에 가기 위해 책가방을 싸는 것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녀석들이, 웬일로 중앙계단 앞에서는 또 우두망찰 모여서 멍하니 입을 벌리고 모여있다.
가만 살펴보아도 신발을 갈아신는 것도 아니다. 무엇때문일까.
신발 주머니를 휙휙 돌리면서 뛰어나간 녀석들이 거기서는 신기하게도 잠자코 서 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마냥.
아이들이 모인 공간을 정확히 말하면 신발을 갈아시는 출입문 외부의 공간이 아닌, 출입문 내부의 중앙계단의 내리막이 끝나는 위치였다. 가뜩이나 좁은 공간에 아이들이 몰린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큰 불편을 초래했다. 중앙계단으로 내려오는 아이들은 아래편에 모여있는 인파에 이미 짜증이 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다. 사람과 사람의, 아니 사람들과 사람들이 교차 하는 와중에 소년들은 흡사 스탠딩콘서트에서 자신의 자리를 사수하는 것마냥 쉽사리 자리를 물러서지 않는다.
연유를 알 길 없는 인파의 운집은 호기심 많은 사람들을 더 불러모으는 힘이 되기도 한다.
그 시절의 우리는 정녕 그랬다.
하나 둘, 왜인지도 알 수 없이 모이는 소년의 수는 점점 불어났다. 나 역시 비켜 갈 수 없었다.
한창 호기심 많은 그 시절, 그 나이에 남들이 다 아는 것을 혼자 모르고 있는 것은 공포의 으뜸이었다.
공포의 전이였을까, 목 빼고 기다리는 무리 들 중 나 같은 녀석이 한 둘이 아니었다.
- 여기 뭐 있어?
- 몰라.
나를 포함한 얼빠진 멍청이들의 행렬에서 답을 찾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 얼빠진 질문도 일종의 전조이기도 하다. 조금 더 머리가 큰 고등학생 시절에도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대학을 가는 이유에 대한 물음에 어느 누가 제대로 답할 수 있었던가.
그렇다면, 지금은?
중년의 문턱에서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이야기는 중학교 1학년 그때와 다르지 않다.
삶에 대한 물음에서 아직도 아득한 공상만 맴돌고 현실적인 대답은 입가 주변을 들락 거리다가 끝내 명료한 소리로 정리되지 못한다. 내 인생에서는 감탄과 환희의 느낌표 보다는 물음표가 훨씬 더 많았다.
하지만 중앙계단에서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를 통해 들려온 단어는 내 귓가에 도달했고, 도달한 단어는 귓구멍의 장막에 튕겨져 나가지 않고, 마음 속에 안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