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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하 Jan 26. 2021

내 분수를 안다

<모든 스타트업의 난제, 지속 경영>      


 창업은 차라리 쉽다. 진짜 승부는 그 이후부터다. 스타트업 10곳 중 9곳은 데스벨리를 극복하지 못하고 허공으로 사라진다. 기업들의 평균 수명은 약 15년. 결국 지속 가능한 경영이 가장 어려운 숙제이다. 그렇다면 숱한 위기를 견디며 수십 년의 역사를 써 내려간, 심지어 그 과정에서 업계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은 기업이라면 지속 경영의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국내 최초 선박 설계·감리 기업이자 지난해 명문장수기업(45년 이상 업력을 보유, 장기간 건실한 기업 운영으로 지속성장이 기대되는 중소기업)으로 선정된 H 회사를 살펴보자.          



<10년째 지속되는 업계의 불황>


 1969년 설립된 이 회사는 선박 설계 기술용역 업체 중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오래된 업체로 국내 최초이자 유일한 쇄빙선인 '아라온'을 비롯해 2천여 종의 선박 설계와 초대형 조선소 건설 계획에 참여했다.     


 그런데 조선업이 어떤 분야인가. 한 때는 전 세계 1위 산업이자 초 황금기를 누렸던 분야이지만 지난 10여 년간 짙은 불황의 그늘 속에서 급속도로 축소된 산업 중 하나이다. 이렇듯 어려운 시장에서도 묵묵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사업가에게는 숙명과도 같은 부지불식간에 닥치는 위기를 H는 어떻게 해결해 나갔을까?

      

 조선산업 전반이 무너지며 H 회사 역시 매출에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2007~8년 조선업 호황기 시절, H 회사의 직원은 300명, 매출은 300억 원을 웃돌았지만 그로부터 10년 후, 직원은 120명, 연간 매출은 2019년 기준 70억 원에 불과했다. 위기는 2010년쯤부터 찾아왔다. 특히 4년 전쯤엔 주요 거래선(고객) 가운데 몇 곳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일은 모두 마쳐 놓고도 수금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며 회사 설립 이후 처음으로 적자가 발생했다.                                 




<사람은 줄이면 안 된다>     

    

 회사가 한창 어려워지기 시작할 2005년, H는 회사 대표의 자리에 올라 경영을 맡았다. (H는 이 책에서 유일하게 창업주가 아닌 순수 대표이사이다.) H는 당장 위기를 타계해 나갈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해야 했다. 하지만 H는 알고 있었다. 엔지니어링 용역 업체인 H 회사는 위기가 온다고 해서 위기를 ‘당장’ 해결할 수 있는 회사가 아니란 것을.          


 용역 업체는 말 그대로 외부에서 일감을 줘야 일이 생기는 곳이다. 설계 일은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닌 데다 국내 조선 산업이 침체기에 들면서 지난 3년간은 일감이 거의 없었다. 인력을 더 줄이고 긴축경영을 해야 했다. 동종업계의 유사 업체들은 당시에도 직원 수를 절반 혹은 1/3로 줄이고 있었다. 하지만 L은 인력을 더 이상 줄여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H 회사의 인력 120명 중 순수 설계인력은 85명이다. 선박 설계는 꽤 긴 시간을 요하는 작업으로 약 18개월에 걸친 도면 설계, 이후 18개월에 걸친 건조기간 동안 많은 인원이 투입된다. H는 인원을 현재보다 줄이면 향후 큰 프로젝트를 수주했을 때 자체적으로 일을 해나갈 여건이 안 된다고 판단했다. 설계를 외주화 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러면 품질이 떨어지게 된다. 다른 모든 걸 포기해도 품질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 때문에 당장에 부담이 되더라도 직원 수를 줄이지 않기로 결정했다.                              




<위기 때 투자한다>         


 업계의 모든 회사가 인력을 줄일 때 H는 거꾸로 인력을 더 뽑아서 R&D 센터, 즉 미래 선박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 싱크탱크 본부를 만들었다. R&D에 집중함으로써 향후에 올 일에 대한 준비를 미리 하기로 했다. 단순히 인력 투입뿐 아니라 소프트웨어 구축을 위해 꽤 많은 투자를 감행했다. 그로부터 5년 후. R&D 센터에서 자체 개발한 일로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R&D 센터에서는 업계의 변화와 트렌드를 미리 읽고 이에 대응하는 데 주력했다. 자동차 산업 등 여타 산업도 그렇지만 선박 분야 역시 대기환경 오염물질 등에 대한 친환경 규제가 강화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여기에 대비하지 않으면 미래 먹거리가 없어질 것으로 판단한 H는 LNG, 수소 암모니아 등 친환경 선박에 대한 연구를 강행했다. 결국 R&D 센터에서는 선주 없이, 즉 배를 주문한 고객 없이 자체적으로 개념 설계까지 해 놓은 프로젝트를 4~5개 정도 완성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실제 프로젝트로 연결되었다. 주인 없는 배를 과감히 만들면서 36개월 이상 소요되는 선박 설계 과정들에 미리 대비해 놓았기에 실제 프로젝트가 시작됐을 때 작업 개월 수는 1/3 정도로 줄일 수 있었다.              




<대박을 꿈꾸지 않는다>         


업계 1등 기업을 이끄는 H 대표였지만 그는 원대한 비전과 거대한 목표를 갖고 있지 않았다. 회사의 모토는 ‘대박을 꿈꾸지 않는다’였다.


“저희는 저희가 엔지니어링 용역 업체임을 잘 알고 있었어요. 50년간 운영해 오셨던 분들도 그렇고 저 또한 그렇고요. 용역회사가 갑자기 대박을 칠 수는 없는 거죠. 대박을 치겠다는 무모한 꿈을 꾸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합니다.”          


 나 자신, 내 회사를 정확히 알고 요행을 바라지 않는 태도. 그저 지금 내 손에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태도가 회사를 50여 년간 지속 가능하게 만들었다. H 대표는 말한다. 대박을 꿈꾸는 대신 우리가 취할 포지션은 단 한 가지라고. 회사 전 직원이 실력을 높이거나 경험을 쌓아 타 경쟁사 대비 더 좋은 프로젝트를 따서 ‘더 빠른 시일 내에 더 우월하게 해 낼 수 있는 실력’을 갖추는 것, 그것이 H 회사가 집중하는 전부라고.



                                      

<더 빠른 시일 내에 더 우월하게 해낼 수 있는 실력>          


 H는 전 직원이 이러한 실력을 갖추도록 하기 위해 지난 10년 간 업무 간의 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초반엔 많은 잡음이 발생했다. 어떠한 회사이고 조직이든 다른 사람이 내 영역에 침범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싫어한다. H 회사 직원들 역시 상대방이 자신의 일에 침범하는 것을 마뜩지 않아했고 본인들 역시 자신의 업무 영역을 넘어서는 일을 하기 싫어했다. H는 그러한 업무 간의 벽을 무너뜨리며 직원들이 멀티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역량을 끌어올림으로써 내부 경쟁력을 높이는 데 주력했다.          


 한 척의 배를 설계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손이 거쳐 간다. 누군가는 선체 설계를, 누군가는 의장품을, 누군가는 배의 앞부분을, 누군가는 뒷부분을 나눠서 하게 되는데 상대를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업무 범위에만 갇혀 설계를 하다 보면 결국엔 재작업을 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게 발생한다. 그런데 직원들이 상대방의 업무를 이해하고 충분히 해낼 수 있을 정도의 역량이 쌓이니 상대방이 일하기 편하도록 고려해서 설계를 하게 되었다. 그러면 그다음, 또 그다음 일이 더욱 쉬워지면서 업무 효율성이 높아졌다. 수정 보완해야 할 업무가 줄면서 결과적으로는 직원들도 편해졌고 전체적으로 회사가 납품하는 도면에 오류와 문제점이 줄어 고객들의 만족도 역시 높아졌다.           


 H 회사의 인력 구성은 설계 분야 80%, 감리 분야 20%였다. 그런데 H 회사는 용역 업체였기에 언제 어느 분야로 일이 몰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떤 때에는 설계 쪽 일이 몰렸다가 어떤 때에는 감리 쪽 일이 확 몰렸다. 한쪽으로 일이 너무 몰리면 고객에게 양해를 구하고 일을 거절해야 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했다. 그런데 업무 간의 벽을 허물면서 감리도 설계를, 설계도 감리를 할 수 있게 되자 일감을 거절할 일이 대폭 줄어들었다. 생산성과 매출이 대폭 높아졌다.                                    




<"업무시간에 공부해라!">         


 회사에 난생처음 적자가 발생했지만 H는 지난 3년간 외부 세미나, 학회 등 직원들을 위한 자기 계발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직원들이 오히려 월급을 받으면서 도면은 안 그리고 공부를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 아닌가 하며 의구심을 품을 정도였다.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공부는 자신을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조직 전체가 공부를 하지 않으면 정체되어서 공룡처럼 없어지게 되는 거죠.”          


 지난 2~3년 간 일이 많지 않았기에 H는 오히려 업무시간에 공부를 해도 좋다고 독려했다. 우선 영어공부를 시켰다. 해외에 납품하는 도면, 기술자료 등을 모두 영어로 작성해야 하니 영어 실력이 우수한 것은 회사, 직원, 고객 모두에게 좋았다. 직원들의 영어 실력을 상위권으로 끌어올리는 데 집중했다. 기술 공부는 말할 것도 없었다. 트렌드를 알기 위해 직원들의 학회, 세미나 참가에 열을 올렸다.


 위기 때 투자하는 것. 이를 위해 인력을 늘리고 개개인의 역량을 최대치로 끓어 올리고자 직원들의 자기계발에 몰두하는 것. 이는 사실 누구나 알고 있는 성공의 원리이지만 감히 누구나 쉽게 실행하지 못하는 일이기도 하다. 거대 공룡 기업들 마저도 경기가 어려워지면 인원을 감축하고 긴축 경영에 나서기 바쁘다. 하지만 H는 투자만이 개인과 회사가 사는 길이라 생각했고 실행에 주저함이 없었다.                         




<목표가 없는 회사>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대표들에게 마지막으로 던지는 질문은 늘 동일했는데 향후 목표와 비전에 관한 물음이었다. 일반적으로 모든 대표들은 원대한 포부를 이야기했다. 물론 꿈의 크기가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실행 가능한 범위 내의 확실하고 구체적인 목표라면 그 꿈이 경이롭고 놀라울 테지만 그저 뜬구름 잡는, 희망 사항인 목표라면 어떠한 거창한 답변이라도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그런데 H의 대답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저희 회사는 목표가 없습니다. 엔지니어링 용역 업체는 오늘 하루하루 주어진 일을 잘하다 보면 고객이 알아서 찾아옵니다.”          


 실제로 H 회사는 홍보를 일절 하지 않고 있었다. 지난 10년간 홈페이지 업데이트도 하지 않았고 그나마 있는 홈페이지에도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별로 없었다. 한때 해외 프로젝트가 100% 일 때도 있었지만 그 당시에도 해외에 고객을 찾으러 나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회사가 설계한 선박이 바다 어딘가에 떠다니면서 입소문을 타고 전해져 결국 고객들이 알아서 찾아온다는 것이다.            


 대박을 꿈꾸지 않는 회사. 목표가 없는 회사. 홍보는 더더욱 하지 않는 회사. 다만 조직을 정확히 파악해 조직에 맞는 방향으로 회사를 운영하고 조직원의 역량에 맞는 프로젝트를 찾아내며 개개인의 역량을 최대치로 끌어내는 것. 비현실적인 목표를 세우거나 무리하지 않는 것. 그 숱한 위기를 넘기며 50년을 지속한,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은 기업의 비밀은 여기에 있었다.      


 내 조직을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단순히 회사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조직원들이 갖고 있는 핵심 역량 하나하나를 정확히 아는 것, 그것이 내 조직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중소기업이나 소규모 업체는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대기업보다 사람 한 명 한 명의 퍼포먼스가 더욱 중요한 곳이다. 그래서 사람에게 더 투자하고 조직원들을 잘 파악해야 한다. 단 한 사람도 버려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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