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후우울증 생존자의 수기4] 상담소에서 다룬 것과 다루지 않은 것
아이를 낳은 후, 내가 가장 골몰했던 일은 지난 날을 곱씹는 것이었다.
'배뭉침이 있었을 때 병원에 일찍 갔더라면, 라보파 부작용이 힘들다고 간호사를 부르지 않았더라면, 수술동의서에 사인을 하지 않고 기다렸더라면...(아이를 조산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소용 없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후회와 자책을 멈추지 못했다.
후회는 입원 전의 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임신 당시, 일터에는 임산부 휴게실을 만들자는 논의가 있었다. 임신을 준비하려는 동료, 육아휴직 후 복귀하려는 동료가 줄줄이 있었고, 투병 생활 끝에 복귀한 동료도 있었다. 임산부, 모유유축이 필요한 이, 성별 막론하고 아픈 이들이 이용할 수 있는 휴게공간을 만들자, 나의 임신 전부터 나오던 이야기였다. 공간도 예산도 부족한 비영리단체에서 그런 공간을 어떻게? 유일하게 찾아낸 공간은 창고로 쓰던 작은 방이었다.
그 방을 휴게공간으로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는 이가 나타났다. 그 방으로 가려면 자신의 뒷덜미(와 컴퓨터 화면)를 지나쳐가야 한다는 이유였다. 그는 반대하는 과정에서 이해할 수 없는 무례함을 표출했다. 그 역시 한 아이의 아빠였다. 나는 그냥 지나치고 싶지 않았다.
사과를 받기까지 내가 마주한 것은 동료들의 내부 문제를 처리하는 무능력함, 그가 상처받을까 감싸기에 급급했던 태도, 이차 가해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분노, 눈물, 스트레스... 입원 전의 일이다.
그와 동료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잘 살고 있겠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분노는 다시 내게로 향했다.
'내가 어짜자고 일을 크게 만들었을까.' '왜 나는 태아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잠이 오지 않는 밤들이었다. 걱정과 두려움, 후회와 자책, 분노와 좌절이 한데 엉켜있었다. 책의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간신히 노트북을 켜고 쓴 글은 어떤 지점에서 꽉 막혀 버렸다.
'이대로는 안되겠어. 상담이라도 받아야겠어.' 난생 처음 상담센터를 찾기로 했다.
상담센터에 처음 방문했던 날. 한 오피스텔의 복도 끝, 나는 문 앞에 서서 애꿎은 핸드폰 시계만 바라보았다. 시계는 약속한 시간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심호홉을 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1시간 후, 나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곳을 나왔다.
매주 한 시간씩, 작은 상담실에서 이야기를 쏟아냈다. 6년만의 임신, 갑작스런 조산, 직장 동료들에 대한 분노, 깊은 죄책감... 아무리 반복해도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매주 처음 하는 이야기처럼 눈물을 쏟았다.
선생님은 대부분 가만히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이야기에는 손을 재빨리 놀려 메모를 했다. 선생님은 어느날 ‘제가 유독 더 죄책감에 취약한 것 같아요’ 라던 말을 받아적었다. ‘방금 내가 한 이야기가 중요한 이야기였나?’ 어렴풋하게 짐작할 뿐이었다.
선생님은 가끔 질문을 던졌다.
“주변 사람들이 네 탓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이 고마우면서도, 스스로는 왜 자신의 탓이라고 믿어요?”
가까스로 알았다. ‘내 탓이야, 나를 용서할 수 없어’ 하는 마음 이면에, ‘나도 최선을 다했어. 누구보다 아이를 지키고 싶은 사람은 나였어’ 외치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걸. 그 마음을 받아들여주기로 했다. 나는 내 삶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어느날 선생님은 말했다.
“죄책감에 취약한 것에는 좀더 깊은 뿌리가 있을 것 같아요.”
십대 후반에 겪은 언니의 죽음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내가 맞닥뜨린 감정들로. ‘내가 더 옆에 있어줬어야 했는데, 내가 더 잘해줬어야 했는데...’ 누군가를 지키기엔 어렸던 내가 후회와 자책을 반복하고 있었다. 성인이 된 후, 교회 생활을 하며 끝도 없이 돌아보았던 일. 그런 일을, 새삼 다시 울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 괜찮지 않았던 걸까. 상담을 마친 후 상담소 근처 천변을 하염없이 걸었다. 내가 더 행복해도 괜찮을까, 흘러가는 강물을 오래 바라보았다.
상담 몇 달로 사람이 드라마틱하게 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 탓이라는 생각이 들 때 ‘내가 죄책감에 취약한 사람이지’ 거리두기가 가능해졌다. 나의 이야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한데 엉켜있던 분노와 혼란, 자책과 후회, 두려움과 막막함을 구분하고, 각자의 길을 찾아줄 수 있었다. 분노해야 할 것에 대해 자책하지는 않기로 했다.
이 시기가 있어서 급한 불을 껐다.
하지만 엄마가 되면서 맞닥뜨린 거대한 죄책감은, 결코 ‘내면 아이’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발달장애인 엄마들의 인터뷰집 『그래, 엄마야』에는 아이의 발달장애를 두고 엄마 탓을 하는 시가 이야기가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지적장애를 가진 딸 미선의 엄마 이념 씨는 시가 어른들로부터 ‘우리 집에는 이런 아이가 없는데 너희 집에서 찾아봐라’ 라는 모욕적인 말을 들어야 했다. 과학적으로 가능한 일인가는 상관없었다.
자녀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엄마에게 있는 사회, 아이가 아프면 모든 비난이 엄마에게 쏟아졌다.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모두가 물었다. “엄마는 어디서 뭘 했는데?” 엄마가 납작 엎드려 석고대죄하며 헌신적인 모성을 수행하지 않으면, 비난의 강도는 더 세졌다. 엄마들이 가진 죄책감은 그 비난을 내면화한 것에 불과했다.
여성이 육아를 담당하는 게 당연시되는 사회에서 아이에게 장애가 있을 경우 사람들은 대개 그 책임을 엄마에게 돌린다. (...) 엄마가 현명하게 육아를 하고 조기에 발견했다면 장애를 막지는 못해도 조금은 나아질 수 있다는 신화가 존재하기 때문에 어머니들은 더욱 자기 비난에서 헤어나오기 어렵다. 그렇게 여성에게 전가된 양육의 책임 앞에서 죄책감은 엄마들의 서사가 되었다.
- 인권기록활동네트워크 '소리', 『그래, 엄마야』 51-52쪽 -
이 죄책감은 장애가 있는 아이의 엄마는 물론, 아이가 한번이라도 아파본 모든 엄마들의 것이었다.
이 사회적 현실을 외면한 채, 상담소에서 '내면 아이'를 다독이는 것만으로 죄책감을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