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후우울증 생존자의 수기9] "내일은 무얼 하며 시간을 보내지?"
아이 두돌쯤이었을까. 발달단계에 맞춰 착착 대기해야 했던 육아용품 목록이 줄었다. 장난감, 책, 교구 등의 검색과 쇼핑도 더이상 하지 않았다. 이런 상품들을 검색할 때마다 따라오는 협박성 문구('000명의 엄마가 선택한 국민육아템', '아이의 뇌는 만3세까지 폭발적으로 성장하므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이가 잘 자라고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다.
문제는 남았다. 아이와의 24시간을 어떻게든 꾸려가야 한다는 것. 어디라도 나가거나, 누구라도 만나야 했다. 교육적 활동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와의 하루가 긴 나 자신을 위해.
그런데 어디에 나가고, 누구를 만난단 말인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작고 시끄러운 아이를 안은 채로.
엘리자베트 벡 게른스하임은 『모성애의 발명』에서 '고도 산업사회의 생활 세계는 여러 면에서 아이에게 알맞지 않으며, 심지어 객관적 구조상 아이에게 적대적이기까지 하다'고 말한다. ‘휴율성과 업적, 정확성과 계산 가능성, 질서와 조직 같은 기술과학 문명의 원리’가 일상 세계에도 파고들어 있다는 것이다. 기술과학 문명의 원리로 촘촘하게 기획된 생활공간에 아이들은 방해가 된다. 아이들은 ‘생기 넘치고 호기심과 발견의 기쁨, 움직이려는 충동’으로 가득 차 있고, ‘슈퍼마켓에서든 도로 교통에서든 훼방을 놓는다’.
서울 한복판에 살며, 갈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종종 옷장에서 가장 멀쩡한 옷을 꺼내입고, 문화센터와 키즈카페를 배회했다. 문화센터와 키즈카페는 엄마들을 열렬히 환영해주었다. 그곳에는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과 놀이시설, 넓고 쾌적한 수유실, 아이들에게 친절하고 너그러운 직원, 무엇보다 비슷한 처지의 엄마들이 있었다. 아이가 몇 개월인지, 잠을 잘 자는지, 밥을 잘 먹는지, 짧은 대화를 나누는 순간만큼은 평일 낮의 고립감이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문화센터와 키즈카페의 이용 시간은 짧으면 40분(문화센터 수업시간), 길면 2시간(키즈카페 이용시간)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비싼 비용을 감당해야 했다. 자주 갈 수는 없었다.
오래 살았어도 마트, 카페, 영화관 등을 제외하고는 아는 곳이 없던 동네를 탐험하기 시작했다. 아이와 산책하기 좋은 공원, 숲놀이터를 조금씩 알아갔다. 아이에겐 햇빛과 바람과 풀밭이 있는 작은 공간이면 충분했다. 아이는 산책 나온 강아지를 “멍멍!” 외치며 따라가고, 어른들 운동기구에 흔들흔들 매달리다, 풀밭에 주저앉아 나뭇가지를 줍고 꽃을 땄다. 나는 아이가 잘 노는지 지켜보고 맞장구만 쳐주면 됐다.
그래도 시간은 더디 흘렀다. 아이와 갈 수 있는 장소뿐 아니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나도 육아동지가 있었으면 좋겠다.' 가장 자주 한 생각이다.
가장 기다리는 건, 엄마나 가까이 사는 오랜 친구의 전화였다. '집이니? 지금 너희 집으로 가려고' 아니면 '지금 우리 집으로 올래?' 라는 전화를 받으면,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기뻤다. 아이의 상호작용 욕구가 오로지 나 자신만을 향하지 않는다는 것, 대화가 가능한 어른이 있다는 것, 잠시 아이를 맡기고 화장실에 편하게 다녀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육아의 시간이 수월하게 흘렀다.
내겐 조리원 동기가 없었다. 아이를 갖기 전, 조리원 동기들끼리 모임이 제법 끈끈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같은 시기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친해지다니, 시시해.' 갑작스러운 조산으로 조리원을 취소한 나는, 과거의 오만함을 반성했다. 같은 시기에 아이를 낳은데다, 가까운 지역에 사는 육아동지는 초보엄마에게 탁월한 사회적 지지망이 된다. 나 역시 '코드'가 통하지 않아도, 일상적으로 만나며 아이와 함께 교류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아이 낳기 전처럼, 고고하게 있을 수 없었다. 공원이나 놀이터에서 자주 마주치는 엄마들과 가벼운 인사를 시작했다. 아주 가까운 사이는 되지 않아도, 함께 보내는 시간만큼은 지긋지긋한 고립감을 잊고, 육아 고민을 나누고, 올망졸망한 아이들끼리 노는 모습을 지켜보며 웃을 수 있었다.
(관계가 오래 지속되기란 힘들었다. 옆동 A엄마는 복직과 함께 이사를 갔다. 같은 동 B엄마도 둘째를 낳고 집이 좁다며 이사를 갔다. 옆옆동 C엄마는 청약이 당첨되어 신도시로 갔다... 잠깐. 내 성격적 결함의 문제인가?)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지긋지긋한 미세먼지가 지나자 추위가 찾아왔고, 유난히 추운 겨울, 코로나가 시작됐다.
아이와 나는 다시 아파트 12층 우리집에 고립되었다. 간신히 만든 육아친구에게 만나자고 할 수 없고, 공원 벤치에 맘편히 앉아있을 수 없는 날들. 두돌이 지나 입소한 어린이집에는 발 한번 들이지 못하고 퇴소했다.
"내일은 무얼 하며 시간을 보내지?"
‘0-3세까지의 아기는 엄마 혼자 키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김수연 강영숙, 『엄마가 행복한 육아』)라는데, 이래도 괜찮은걸까. 밖에 나가지 못하는 아이의 에너지 발산과 대근육 발달을 위해 트램폴린을 검색하는 밤. 트램폴린을 둘 공간이 있을까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온다.
아이와 갈만한 곳, 만날 사람이 없는 환경에서 아이의 발달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행위가 아니라 집안에서 부모가 인위적으로 촉진해야 하는 책무가 된다. 이 책무를 짊어질 유일한 존재가 나라는 사실은, 시간이 흘러도 익숙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