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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에포크 Feb 16. 2022

사슴벌레에 살았을 때

모험을 즐기는 사업가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 우리 가족은 아파트를 나와 '사슴벌레'에서 살았다. '사슴벌레'는 엄마가 하는 그릇매장의 이름이다. IMF 나 아빠 직장의 문제는 아니었다. 엄마는 장사를 해보겠다고 했고 우리는 잘 살고 있던 집을 팔고 '사슴벌레'에 새 보금자리를 틀었다. 그리고 가게 안에 있는 단칸방에서 네 식구가 살았다. 워낙 어렸을 때의 일이라 모든 과정이 다 기억나지는 않는다. 단편적인 기억만이 나의 유년시절 기억으로 남아있고, 이 기억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면 '사슴벌레에 살았을 때'라고 말해야 한다. 


 사슴벌레에 살았을 때였다. 

 내가 사는 지역은 남쪽 소도시라 겨울이 되어도 눈이 거의 오지 않는다. 온다 하더라도 진눈깨비처럼 흩날리는 눈들이었다. 길에 하얀 눈이 한 겹으로 조금이라도 쌓이면 나는 드디어 눈 쌓인 길을 밟아볼 수 있나 하는 기대감에 항상 차있었다. 그러나 모든 축복이 해임과 동시에 모든 문제도 해였다. 해가 조금이라도 들면 얇게 쌓이 눈은 샤베트처럼 사르륵 녹아 사라졌다. 티브이에서 눈이 펑펑 내리는 서울이나 강원도 지역을 보여줄 때면 남의 나라 이야기 같았다. 내가 사는 곳에서 눈은 그저 희망을 주는 보이는 비와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남의 나라 같던 일이 나의 나라에도 벌어진 날이 있었다. 그 날 우리집엔 함박눈이 내렸다. 눈의 결정이 또 다른 눈의 결정과 만나도 부서지지 않았다. 펑펑 내린 눈은 보도블록 위에 쌓였고, 황급히 녹기 전에 또 그 자리에 눈이 내려 쌓였다. 이번에 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쩌면 해가 저 멀리 반대편으로 가 있으니 멀리 있는 데로 해는 그 자체로 축복이었다. 


 엄마는 나랑 오빠에게 두꺼운 외투를 입히고 작은 손에 장갑을 끼웠다. 마무리로 털모자까지 씌운채로 무장해서 밖으로 같이 나왔다. 아빠가 없었으니까 출근을 하는 평일이었을 테고, 그렇다면 '사슴벌레'를 열고 물건을 팔아야겠지만, 엄마는 그런 틀에 박힌 존재가 아니었다. 가게는 제쳐두고 좀 더 걸어서 평평한 보도블록이 널리 깔려있는 경사진 거리로 나왔다. 이렇게 흔치 않게 눈이 많이 내리는 날에는 눈사람을 만들어야 한다. 엄마가 눈을 굴릴 수 있을만한 크기로 눈을 뭉쳐줬고 오빠랑 나는 그 눈을 굴렸다. 거리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다들 직장으로 출근하거나 학교를 간 시간이었기에 엄마랑 오빠, 나뿐이었다. 여기에 있는 눈이 모두 우리의 것이었다. 열심히 오빠랑 눈사람을 만들었다. 처음으로 만들어 보는 눈사람이었다. 우리는 모두 신이 났다. 오빠랑 나뿐만 아니라 엄마도 한껏 신이 났다. 내가 눈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눈을 굴리고 있으면 신이 난 엄마의 하이톤 목소리가 들렸다. 눈이란 모두를 신나게 할 수 있는 마법을 가졌다. 눈이라는 이유 하나로. 

눈사람을 완성시켜 거리 한 곳에 잘 세웠다. 우리가 만든 첫 번째 눈사람이었다. 눈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엄마는 눈 오는 날의 우리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고 그 순간은 그렇게 남겨졌다. 


그 사진은 부모님 집의 서랍장 위, 별모양의 액자에 담겼다. 엄마의 시선이 담긴 렌즈 속에 오빠랑 나는 아주 사이좋게 행복한 모습으로 엄마를 보며 웃고있다. 


사슴벌레에 살고 있을 때였다.

  그 해 가을이었는지, 봄이었는지, 아니면 그다음 해였는지 알 수 없지만 사슴벌레에 살고 있을 때였다. 엄마는 또 다른 것이 하고 싶었다. 그것은 붕어빵 장사였다. 왜 붕어빵 장사를 하게 되었는지 그때 당시에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엄마는 재밌어했다. 사슴벌레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엄마는 붕어빵 기기와 어묵을 파는 기계를 들이고 주황색 천막을 쳤다. 거기서 엄마는 붕어빵을 팔았다. 사슴벌레도 포기하지 않고 붕어빵도 포기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 아니라 사슴벌레를 찾는 손님은 적었기에 엄마는 투잡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어린이집인지, 유치원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곳을 다녀온 후면 엄마가 하는 붕어빵집으로 갔다. 엄마는 붕어빵 파는 주인의 자리에 있었다. 그 자리에 앉아보는 것이 쉬운 경험은 아니기에 나도 하원을 하면 엄마 옆에 앉았다. 생각보다 그 자리는 아늑했다. 밖에서 붕어빵을 파는 사람을 보면 춥고, 좁고, 불편해 보이지만, 막상 그 높은 단에 앉아있으면 생각보다 천막이 바람을 잘 막아줘서 따뜻했고, 아늑했고,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생겼다. 사장님의 기분은 이런거구나. 나는 사장님의 자리에서 좋아하는 어묵과 잘 우려난 어묵 국물을 먹었다. 붕어빵도 먹고 싶은 만큼 많이 먹었다. 역시나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이 아니라 장사는 잘 되지 않았다. 엄마는 손님이 오지 않아도 실망하지도 않고 지쳐보이지도 않았다. 애초에 손님이 목적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건 엄마가 하는 하나의 취미생활이었다. 그래서 팔리지 못한 거의 모든 어묵과 붕어빵은 오빠와 내가 먹었다. 우리들의 간식인 셈이었다. 마치 아주 커다란 역할놀이처럼. 엄마는 붕어빵장사를 했고 그 붕어빵은 우리가 먹고. 


그러나 붕어빵을 파는 작은 포장마차는 얼마 가지 않아 사라졌다.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엄마는 다시 사슴벌레로 돌아왔고, 나는 그저 어묵을 먹을 수 없어서 조금 아쉬웠었다. 


 며칠 전 설날에 우리 가족은 남해로 드라이브를 갔다. 남해 바다를 보면서 산책을 하다가 '사슴벌레에 있었을 때'라고 누군가가 이야기를 꺼냈다. 20년도 더 지난 오빠와 나의 유아시절을 이야기할 때면 등장하는 서두였다. 우리는 엄마가 붕어빵 장사를 했던 때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때서야 난 엄마가 왜 붕어빵 장사를 하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아니 붕어빵을 파는 아줌마한테 나도 그 붕어빵 기계로 한 번만 붕어빵 만들어 보면 안 되겠냐고 부탁했는데 그 아줌마가 안된다고 하는 거야. 나는 딱 붕어빵 하나만 만들어보고 싶었어. 꼬챙이로 한번 뒤집어 보고 싶었는데 그걸 안 해주는 거야. 그래서 붕어빵 장사를 했지. 그거 만들어보려고. 아줌마가 한 번만 만들어보게 해 줬으면 안 했을 수도 있어" 


 엄마는 붕어빵을 만들어 보고 싶어서 붕어빵 장사를 했다. 붕어빵 기계로 딱 하나의 붕어빵을 만들어 보고 싶어서 붕어빵집 사장님이 된 것이었다. 그리곤 엄마의 친구가 친구의 어머니에게 붕어빵 기계 드리겠다고, 하도 팔라고 해서 그대로 팔아넘겼다고 한다. 그렇게 붕어빵 장사는 어렸을 당시에는 길게 느껴졌었지만 실제로는 '한 달' 밖에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날 나는 엄마의 MBTI를 알게되었다. ESTP였다.  

엄마는 '모험을 즐기는 사업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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