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벨에포크 Apr 26. 2022

몸 몸 몸

바퀴 달린 의자는 조심해야 한다. 특히나 바퀴 달린 동그란 의자를 밟고 일어서는 일은 하지 않는 게 좋다. 나도 알고 있다. 나이가 서른인데 그걸 모를리는 없다. 그래도 올라갔다. 나이가 서른이니까 넘어지지 않을 줄 알았다. 조심하면 넘어지지 않을 수 있는 나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 의자를 밟고 올라갔다. 갑자기 의자에 올라가게 된 건 벽에 붙어있는 하루살이를 잡기 위해서였다. 복층인 집은 천장도 높아서 잘못 열어둔 창문에 하루살이 몇십 마리들이 냉큼 들어와 천장 구석과 높은 벽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나는 위태롭게 의자에 올라서서 별 저항도 없는 하루살이를 휴지 한 장으로 쉽게 잡았다. 이제 내려오는 일만 남았다. 나는 여기서 자칫하면 넘어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난 분명 알고 있었다. 몰랐던 게 아니다. 그래서 발을 뗄 때는 아주 조심히 떼야겠다 생각도 했고 나름 계획도 세웠다. 난 지금 의자에 서있으니 의자에 앉아있는 자세로 바꾸자. 이런 계획 말이다. 무게중심을 의자 중심부에 두기 위해 엉덩이를 아래로 빼고 쭈그려 앉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계산 미스. 내가 서있던 발이 의자의 중심부였고 엉덩이가 내려오려던 자리는 의자의 가장자리였다. 부들부들 다리를 떨며 엉덩이를 내렸더니, 다리보다는 엉덩이가 더 무거웠고 그렇게 의자와 나는 서로를 바삐 밀어냈다. N극과 S극이 만날 때 휙 서로 돌아서는 것처럼 그렇게 바삐 의자가 내 발에서 도망쳐 앞으로 나갔다. 그러자 엉덩이는 지지할 곳이 없어 빠른 속도로 추락했고, 오른쪽 엉치뼈가 먼저 중력을 크게 받아 바닥에 쿵하고 떨어졌다. 나는 그렇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엉덩방아를 말이다. 내가 엉덩방아를. 순식간이었다. 최근 6개월 간 그렇게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걸 보지 못했다. 자 쭈그려 앉아 볼까. 쿠당탕탕. 끝이었다. 순식간이라는 말은 '순식간' 이 3음절을 발음하는 시간보다 빠른 시간을 뜻했다.


너무 아팠다.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고통이다. 엉덩방아는 성인이라면 쉽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학생 때도, 더 거슬러 올라가 고등학생 때도 엉덩방아를 찧어본 경험은 없다. 중학생 때도 내 기억에는 없다. 초등학생 때나 그랬던 것 같은데. 어언 15년에서 20년 만에 엉치뼈에 커다랑 힘이 가해졌다. 모르고 맞으면 더 아픈 것처럼 엉덩방아는 악 소리도 내지 못할 정도로 너무 아팠다. 소리를 내지 못한 채 온몸에 전해지는 고통. 자다가 화장실에 갈 때 발가락을 부딪혔을 때, 책장을 넘기다 손가락을 베었을 때, 닫혀가는 문틈에 손이 끼었을 때. 전해져 오는 고통이 너무 강력해서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 충격을 감내하는 시간이 필요한 고통 말이다. 살갗이 벗겨지는 것이 아닌 더 깊숙한 곳의 고통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바로 침대에 엎드려서 오른쪽 엉덩이를 잡고 흐느꼈지만 아픔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내가 엉덩방아를 찧었다니. 엉덩방아를. 어떻게 엉덩방아를 찧었지. 내 엉덩이를 붙잡고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지만 강력한 고통은 움직일 때마다 엉덩방아라는 사실을 계속 상기시켜줬다. 극심한 운동을 하고 찾아오는 근육통이 내게 근육이 있다는 걸 알리는 것처럼, 엉덩이는 움직일 때마다 내가 엉덩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나 아직 여기 잘 붙어있어'라고 엉덩이는 원 투 펀치를 날리듯이 퍽퍽 격하고도 찐하게 말을 건넸다. 


몸이 자신의 존재감을 잊지 말라고 꿈틀거릴 때가 있다. 3년 전쯤에도 그랬다. 별다를 것도 특별한 일도 없는 하루가 지속되는 날들이었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가려고 잘 계획된 보도블록 거리를 걷고 있었다. 횡단보도의 초록색 신호등은 그런 나에게 깜빡깜빡 어서 건너라고 밝게 빛나고 있었다. 뛰어야 한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뛰어. 그렇게 깜빡거리는 초록색 신호등에 불나방처럼 달려들었다. 10초, 9초, 8초, 마우스 커서가 깜박이는 것처럼 1초가 빠르게 흘렀다. 저건 과학적인 1초가 사실은 아니지 않을까. 조작된 시간이 아닐까라는 의심을 하면서 조급함을 느끼며 뛰었다. 묘하게 흥분되는 카운트다운이었다. 생존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발을 내디뎌 뛰지 않으면 내 등 뒤에 토네이도가 모든 것을 파괴시켜 나를 덮쳐버리는 그런 생존게임. 그렇게 5초, 4초, 3초 빠르게 흘러가는 신호등을 보며 탁. 탁. 탁. 탁. 내딛을 수 있는 큰 보폭으로 빠르게 횡단보도를 건넜다. 마지막 지점을 통과할 때 곁눈질로 본 신호등은 2초를 남겨두고 있었다. 나는 토네이도에 잡아먹히지 않았다. 살았다. 불씨같이 조그만 쾌감이 일었다. 심장은 갑작스러운 뜀박질에 넙덕 넙덕 판막을 요란하게 열고 닫으며 소리를 냈다. 나는 숨을 몇 번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다시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걸었다. 


그 이후로 자주 심심할 때면 초록색만 보면 멀리서 뛰었다. 사람을 보면 달려드는 좀비처럼 나는 초록불이라는 시각적 자극이 눈으로부터 뇌에 들어오면 반사적으로 뛰었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말이다. 잘 걷고 있던 종아리에 딴딴한 근육을 만들어 에코백을 어깨가 아닌 거의 목에 둘러매고선 숨을 가볍게 짧게 들이마시고 다다다닥 뛰었다. 무사히 통과. 예 생존 성공. 또다시 아무 일 없는 듯 걷기. 심심한 일상에 나 혼자 하는 짧은 놀이였다. 무난하게 아무 일 없이 흘러가고 있는 하루에 심장 뛰는 일 하나를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점점 더 오랫동안 긴 거리를 뛰었다. 횡단보도를 다 건넜어도 계속 동력을 유지하며 뛰었다. 그렇게 뛰다가 멈추고 또 뛰다가 멈췄다. 그러다 이걸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본격적으로 뛰어야 했다.


나는 집 근처 호수공원에 가서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심장은 판막을 미친 듯이 열고 닫고 있었고 평소의 넙덕 넙덕 하는 소리가 아닌 퉁퉁 퉁퉁 아프리카 부족이 적을 만났을 때 발로 땅을 구르는 소리가 났다. 너무 빨리 뛰어서 얼마 뛰지도 않았는데 숨이 가빠와서 나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퉁퉁 퉁퉁 계속해서 발 구르는 소리가 났고 학학학학 거친 숨소리가 내 얕은 체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 심장소리가 껄떡껄떡 바뀌고 나자 머리가 짧게 핑 돌더니 돌연 개운함이 느껴졌다. 달리기는 개운함을 느끼려고 하는 거구나. 나는 27살이 되도록 운동에서 오는 개운함을 느낀 적이 없었다. 


학창 시절 나는 체육을 싫어했고 가장 싫어하는 것은 체력장이었다. 그중에서도 오래 달리기가 가장 젬병이었다. 흙먼지가 난리는 운동장에 모두 모여 다 같이 헥헥 거리며 뛰었고 한 명, 한 명 마지막 지점을 통과한 아이들은 등나무 밑에서 숨을 고르며 쉬었다. 나는 그런 아이들을 부러워하며 계속 뛰었다 걸었다를 반복하다 겨우 꼴찌를 면하고 마지막 지점을 너덜너덜해진 채로 들어왔다. 그건 탈진할 것 같은 불쾌한 감각이었고 같은 반 아이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부끄러웠다. 엄청난 갈증을 느끼며 겨우 등나무 그늘로 돌아오면 헥헥거렸던 혀에서는 진한 피맛이 느껴졌다. 설소대가 끊어져버린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아직 덜 녹은 얼음물을 탈탈 털어 마셨다. 손을 씻기 위해 친구들과 화장실을 가서 본 내 얼굴은 눈자위만 빼놓고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탄 고구마 같았다. 나는 탄 고구마 같은 얼굴이 되는 이 짓거리를 왜 매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달리기를 제일 싫어했던 내가 자발적으로 달리고 있었다. 러닝화를 하나 마련해서 시간이 날 때면 달리기를 하러 갔다. 처음 달리는 거라 의욕만큼 잘 달리지는 못해서 중간에 걷기를 반복해야 했다. 그러다 5km를 마음먹고 한 번에 달리면 그다음부터는 쉬워질 거라고 그 시절 알던 누군가가 말했고, 그 사람의 도움을 받아 5km를 쉬지 않고 한 번에 뛰었다. 2km 때가 고비였지만 그때를 넘기니 내 의지를 벗어나 다리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한번 뛰고 나니 별게 아니었다. 2-3km 때의 고비를 넘기면 자동적으로 5km는 뛸 수 있었다. 나에게 맞는 속도를 찾아 주기적으로 일주일에 2번 정도는 달렸다. 체력이 점점 좋아졌다. 퇴근하고도 왕복 2시간 정도가 걸리는 서울로 놀러 갈 수 있었고, 새벽에 집에 온다 하더라도 그 다음날 출근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일주일에 두어 번은 필라테스를 가서 근력운동도 했더니 몸을 자유자재로 꼬거나 비틀거나 힘주거나 버틸 수 있었다. 근력과 유산소를 그렇게 열심히 했으니 내 생애 가장 몸이 튼튼했던 날들이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나는 달리는 것으로 풀었다. 일이 너무 바빠서 밤 10시를 넘어 끝나는 날이 잦아져도 나는 달리기를 꾸준히 했다. 답답한 마음을 토로할 곳도 없었고 그렇다고 친구에게 토로하고 싶지도 않았다. 찌꺼기들이 걸러지지 못하고 마음에 쌓일 때면 달리기를 통해 뱉어냈다. 깊은 한숨이 나오는 날일수록 몇 시에 퇴근을 하든 상관하지 않고 달렸다. 달리는 기분이 좋았다. 달리는 동안에는 12시간 좁은 사무실에 앉아 무엇을 위해 이러고 있는지 모르는 나를, 다시 심장이 뛰는 살아있는 인간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러다 보면 그날의 안 좋은 일들은 기억이 안 났다. 잊어버릴 수 있었다. 사무실에 동태눈으로 앉아 있는 나와, 타 다다다 달리는 나는 다른 사람이었다. 달리는 내가 진짜 살아있는 나였고, 일하는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앉아있는 아바타나 다름없었다. 살아있는 기분. 소근육과 대근육을 움직이고, 지면에 발을 내딛고 또다시 중력을 거스르고 마찰력을 이용해 발을 밀어내 나아가는 기분. 몸이 진짜 내 것이라는 것을 느끼는 기분. 그게 살아있는 것이었다. 호흡이 가빠지다 다시 차례로 후. 후. 내쉬다 보면 자연스레 몸이 움직이는 리듬과 호흡의 리듬이 맞아떨어지는 상태가 되고 그 후로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그냥 리듬에 몸을 맡기고 그대로 달리면 되었다. 매번 그렇게 5km를 뛰었다. 


러너스 하이. 30분 동안 달리기를 지속할 때 엔도르핀이 발생해 몸이 가벼워지고 기분이 좋은 개운함이 발생하는 상태다. 매번 5km를 달리면 30분이 걸렸다.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처음으로 들어와도 나는 더 달릴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에 좀 더 달리고는 했다. 힘이 막 솟았고 나는 더 뛸 수 있다. 더 달릴 수 있다는 기분에 쾌감이 몰려왔다. 그리고 이건 마치 중독과 같았다. 달리지 않으면 안 되는 날이 많아질수록 달려야 했고, 달리면 더 달릴 수 있다는 생각에 더 달려야 했다. 오늘은 몸이 힘드니까 걸어야지라고 호수공원에 가더라도 결국 뛰어버렸다. 그렇게 몇 번 러닝화가 아닌 스니커즈를 신고 달리는 날들이 두세 번 반복되었더니 결국 무릎이 아려왔다. 딱딱한 신발과 딱딱한 지면이 탄성 없이 만나 무릎이 그 충격을 그대로 받아버렸다. 한번 잘못되어버린 무릎은 그 이후로도 달릴 때면 시큰하게 아려왔다. 금방 괜찮아지겠지라고 말했지만, 내가 아는 '금방'이라는 시간적 소요는 이미 지나가고 있었고, 아직도 괜찮아지지 않았다 라는 미래의 시간을 더 소요해야 한다는 '아직도'라는 부사를 붙여 말해야 했다. 앉아있거나 계단을 오르내릴 때도 무릎에 이상이 오자 나는 한동안 달리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 내렸다. 


그리고 찾아간 정형외과에서는 연골 연화증이라 했고 염증이 차있으니 어떤 주사를 맞으라 했다. 그게 어떤 주사인지 따지고 있을 여유가 없어 비급여라는 몇십만 원짜리 주사를 맞았다. 그 주사는 3일만 효과가 좋았고 다시 무릎은 아프기 시작했다. 아픈 무릎을 달고 살다 조금 여유가 생겨 물리치료사가 있는 필라테스 학원에서 체형교정을 받았다. 무릎과 턱관절을 풀어주는 마사지를 받았다. 하지만 굉장히 일시적이라 꾸준히 무릎 주위 근육을 풀어주지 않으면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무릎 통증은 오래갔다. 30분 이상 걷기만 해도 무릎이 아팠다. 걷기만 해도 아팠으니 당연히 달리지는 못했고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평소와 다름없이 살다가 몸이 갑자기 꿈틀거린다면 좀 더 주의 깊게 몸을 관찰해야 한다. 몸이란 인풋과 아웃풋이 정량으로 똑같지 않기 때문이다. 섭취량과 배출량은 정상적인 신장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면 같아야 하겠지만, 나에게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것이 ml나 gram으로 수치화되지는 않는다. 나는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정량으로 표기할 수가 없고, 아직 축적되어 쌓인 것은 얼마인지, 엔도르핀으로 승화되어 날아간 것이 얼마인지 알 수가 없다. 거기에 어떤 수학공식이 관여되어 있는 건지도 알 수가 없다. 엄마가 해준 밥에는 어떤 공식을 더해야 하는지, 어떻게 홀로 집에서 해 먹는 밥의 에너지에 2 제곱, 아니 3 제곱의 효과를 내는지 알 수가 없다. 엄마 밥을 가족과 함께 먹을 때면 아밀라아제가 좀 더 많이 뿜어져 나왔는지 위액은 어떻게 과도하게 나오지 않았는지 나로선 알 수가 없다. 그렇게 걱정한 소쿠리를 가진채 엄마와 아빠랑 먹었던 밥이 어떻게 갑자기 아무 걱정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리고는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몇 번이고 전화를 해서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해대던 사람에게 맞받아 욕을 칠 수 없는 나의 직업이, 그리고 그 직업적 자아와 본연의 자아가 매 순간 충돌해서 수화기를 잡은 손을 벌벌 떨어가며, 화를 주최하지 못할까 봐 꾹꾹 눌러 참아 말을 내뱉던 날들. 끝없이 어딜 가나 윗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나한테 하는 것이든, 다른 사람한테 하는 것이든,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이 내는 시끄럽게 증폭되는 소음들. 그런 인풋들은 한번 귀를 통해 들어오면 쉽게 배출되지 않고 중금속이 쌓이듯 몸 곳곳에 쌓였다. 언제 아웃풋이 나올지는 내 몸도, 내 마음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게 다 뱉어질지도 알 수 없었다. 적기에 뱉어지지 않은 아웃풋이라고, '왜 지금에서야'라고 각자 궁금과 의문 어린 시선을 보낼 때에도 내 몸이라 한들 나도 알 수는 없었다. 몸은 그저 쌓인 게 이렇게 많다고 더 이상 담을 수 없어 뱉어내야 한다고 소리쳤을 뿐이었다. 달리기를 할 때는 인아웃이 과정이 활발히 일어나는 것 같았는데 달리기를 하지 못하니 찌꺼기들이 뱉어지지 않았다. 모든 노폐물을 뱉어내고 시원한 공기를 들 이마 쉬며 개운함을 느낄 때, 그때 많은 것이 사라졌다. 이런 기분은 필라테스를 할 때도 요가를 할 때도 나타나지 않았다. 요가와 필라테스는 찌꺼기를 가라앉게만 할 수 있었지, 뱉어내서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깊게 숨을 들이쉬고 마쉰다 해도 시커먼 공해 찌꺼기는 뱉어지지가 않았다.


우리는 대부분 몸은 그저 소화시키는 기관일 뿐, 몸을 돌보거나 느끼거나 하는 일은 젊을수록 잘하지 않는다. 내가 스니커즈를 신고 달려 무릎이 망가진 채 2년간 달리기를 하지 못해서 찌꺼기를 뱉어낼 수 없게 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몸은 뚜렷한 정량적인 아웃풋을 낼 수 없지만 그렇다고 셈을 아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서, 언제고 정직하게 인풋에 합당한 아웃풋을 본인이 때라고 생각한 시기에 내보이고 만다. 그래서 갑자기 멈출 수 없이 눈물이 난다거나, 과도한 위액분비로 속이 쓰린다거나, 미친 듯이 단 것이 당긴다거나, 단전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에 목이 딱딱하게 경직되어 버리는 등의 아웃풋이 돌연 갑자기 나타날 때가 있다. 발단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에서 시간이 너무 지나버리면 그만큼 곪아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오랫동안 곪지 않도록 우리는 잘 먹고 잘 자면서 몸을 돌봐야 한다.


엉덩방아를 찧고 이틀이 지났다. 퍼렇게 멍이 들 줄 알았던 오른쪽 엉덩이는 멍 하나 들지 않았지만 여전히 엉치뼈를 만지면 아릿하게 아프다. 또 의자가 미끄러지면서 갑자기 힘이 들어간 다리는 오금에서 내전근에 이르는 근육에 타이트한 통증이 시작되었다. 엉덩이보다 더 거슬리는 통증이 다리를 뻗을 때면 날카롭고 뻣뻣하게 느껴진다. 넘어지면서 어딘가에 부딪혔는지 팔에는 빨갛게 멍이 들었다. 엉덩방아를 찧고 오랜만에 진한 고통을 느끼면서 내 몸을 느꼈다. 어딘가에 잘 부딪치는 성격에 자주 멍이 들어도 몇 번 문지르고 나면 감당할 수 있는 통증이었는데 이번 것은 좀 셌다. 씨게 아팠다. 그래 아직 통증을 느끼는 감각이 파릇파릇하구나. 아직 살아있구나. 넘어지고 나서 엉덩이를 자주 문질렀다. 3주간 스쿼트와 브릿지를 매일 했더니 살이 탱글탱글 오른 것이 느껴졌다. 탱글탱글하니 근육이겠지. 내 엉덩이 아직 살아있어. 변태처럼 나는 아직 살아있는 엉덩이를 조물딱거렸다. 


매거진의 이전글 바게트 샌드위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