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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날 Apr 30. 2021

모래시계가 부여한 업무

복직 몇 달 전부터 긴장이 빡 들어가 있었다. 아는 고통이 더 무섭다고, 난 2년의 육아휴직 후 곧 다시 시작될 회사생활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다. 아이 없이도 회사 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회사 생활 없는 전업 육아도 매일이 전투였다. 이제 난 육아와 출근을 같이 해야 한다는 사실에 곧 매 맞을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끙끙대고 있었다. 복직 일주일 전, 기획팀에 발령났다는 통보를 받고서 내 불안은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모두 칼퇴할때도 불이 꺼지지 않는 부서, 근무시간 이석률 제로에 가깝다는 그 곳, 점심시간에도 샌드위치나 고구마를 먹으며 모니터앞을 떠나지 않는다는 그 부서. 회사의 핵심이자 브레인이며, 워라벨에게 배신당한 상급 노예 집단 기획팀. 출근 전 날, 두시간을 겨우 잤다. 


회사는 당연하게도 나의 적응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아니, 나의 부재였던 2년의 시간 마저 잊은 듯, 일주일 하계 휴가를 보내고 온 사람을 맞이하듯 덤덤히 인사를 건냈다. 지나친 긴장은 난독증을 일으켰다. 몇 년을 사용한 회사 그룹웨어와 행정 시스템들을 못다뤄 버벅댔다. 이런걸 물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기본적인 것들을 헤매면서 안헤매는 척 하느라 반나절이 다 갔다. 이리 기본적인 것을 함부로 누군가에 묻기에는 나의 연차가 너무 오래되었다.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동기에게 몇 번 이것 저것 묻는데 너무나 친절히, 이해한다는 듯이 기본적인 것부터 대답해 주어 오히려 나 자신에게 속이 상했다. 일이 어려웠다. 루틴한 업무란 아무것도 없고 새로운 사업을 기획하고 없는 문제거리도 만들어 분석해 와야 했다. 집중이 온갖 불필요한 것들에 분산되니 업무는 당연하게 진전이 없었다. 아니, 예전이면 별거 없이 금새 해치웠을 만한 일도 며칠이 걸렸다. 한두번 이런 경험을 하고 나니 자신감이 순식간에 추락했다. 문서 한 장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는 수준에 이르자 매 순간이 초조했다. 


 회사 일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복직과 동시에 아이의 어린이집을 회사 인근으로 옮기게 되면서 23개월 아이 역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있었다. 새 선생님, 새 친구들 그리고 장시간의 엄마의 부재. 난 아침마다 어린이집 안간다며 집에서 울고 어린이집 입구에서 안들어 간다며 울고 강제로 문을 닫고 나오는 뒤에서 죽어라 악을 쓰며 우는 아이가 안타까워 어쩔줄을 몰랐다. 어린이집에서는 키즈노트라는 어플의 알림장 기능을 통해 하루에 한번 아이의 소식을 전해주는데 오후 느즈막이 돼서 알림장이 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수시로 들여다 봤다. 알림장이 안오면 어제 찍은 아이의 사진과 동영상이라도 무음으로 해놓고 봤다. 아이가 먹을 먹거리를 인터넷으로 장바구니에 담았다 뺐다 했다. 지금 이게 급한게 아니란걸 알면서도 이런거라도 안하면 아이에 대한 불안이 해소되지 않았다. 


아이를 낳으면 머리가 나빠진다더니 내가 지금 그건가? 내가 너무 오래 쉰건가? 당일배송으로 30분단위 모래시계를 하나 주문했다. 그걸 책상에 놓고 이 모래가 다 내려갈 때 까지 절대로 딴 짓 안하는거야, 핸드폰 안보는거야, 아이 생각도 안하는거야, 하고서 커서를 노려봤다. 그렇게 하루를 기합을 주고 보냈다. 자연스래 몸은 매일 찌뿌둥을 넘어 무너져 갔고 눈에는 벌건 핏발이 서있었다. 툭 치면 머리의 무거움에 쏠려 쓰러질 것 같았다. 모래시계를 돌리며 애를 쓸수록 어이없을 정도록 쉬운 일 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보며 나는 더 이상 견딜수 없는 불안을 느꼈다. 아 지금 내 뇌에 진짜 무슨 문제가 생긴거 아닌가? 성인 ADHD의 뒤늦은 발현이라던가 조기 치매라더던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급히 오후 반차를 내고 네이버 검색창에 제일 가깝게 나오는 심리상담센터로 향했다. 


발길 해 본적 없는 그곳에 예약도 없이 찾아가 처음 만난 선생님에게 내가 제일 먼저 건낸 말은 뇌나 기억력, 집중력 이쪽이 문제인 것 같은데 병원으로 가야 하나요? 였다. 내 이야기를 차분히 듣던 선생님이 입을 뗐다. 


-지금의 능력치가 OO씨가 아니라 예전의 그 능력치가 진짜 OO씨에요. 수많은 신경쓸거리 그리고 불안으로 그런 양상이 나타날 뿐이지 가지고 있던 능력이 사라지거나 한게 아니에요.

-아뇨, 선생님 저 모래시계까지 돌리며 애쓰는데 집중이 안되요. 검사가 필요하지 않나요.

-그 모래시계가 말해주네요. OO씨가 지금 얼마나 긴장하고 경직되어 있는지를요.


시간이 지나 내 아기가 엄마보다 먼저 새 환경에 적응을 해주며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자 나 역시 정상 궤도로 차츰 돌아오게 되었고 먼지만 쌓이는 모래시계도 치웠다. 이젠 어느 정도 회사 생활에도 적응했지만 복직 후 2달여를 휘감았던 그 정체모를 불안감은 늘 내 속에 도사리고 있다. 나는 앞으로 남과 나 스스로의 인정을 연료삼아 사는게 아니라 그냥 사니까 사는 걸 배우고 연습해야 할지 모른다. 한번의 포기, 그 순간의 작은 실망 한번이면 오랜 자유를 누릴 수 있음을 끊임없이 주지해야 할 지도 모른다. 내 아이에게도 그렇다. 아이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해주려고 노력하다 무너질게 아니라, 아이가 원하는 것을 내가 모두 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아이도 나도 받아들여야 함을 기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게 나 뿐 아니라 아이를 위해서 더 그러하다는 것을. 의외로 아이는 아 엄마아빠가 모든걸 해줄 수 없구나, 그렇군 할 것을 나 혼자 이리 붙잡고 싸매고 울며 걷는 것일 지도 모른다. 사는거 별거 없다고, 그래서 내가 별 볼 일 없고 초라하다는게 아니라 그냥 삶이 그렇게 소소하게 오늘을 살며 가는거라고. ‘나는 특별해’의 덫에 갖힌 나에겐 회사에서 오늘 보고를 마친 ‘수요지향적 교육 시스템 개발 방향성’뿐 아니라 ‘진짜 나를 사랑하는 방법의 방향성’을 더 시급히 검토해 봐야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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