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지친 날이었다. 몸도 마음도. 그 즈음은 매일이 그랬고 매일이 최대치를 갱신하는 기분이었다. 특별히 무슨 일이 명확히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생리 직전 호르몬 놀음 기간도 아니건만 며칠간 기분이 땅에 굴러다니는 늙은 낙엽마냥 떨어졌다. 회사 생활의 지긋지긋 함은 그래프 곡선을 타고 주기적으로 찾아오는데 그 주기의 반복마저 지긋지긋해서 아 이제 좀 그만, 이런 소리가 나도 모르게 혼잣말로 나오곤 했던 어느 늦가을이었다.
대부분의 평범한 직장인들이 그렇다지만 관심도 없고 재능도 썩 없는 일을 꾸역꾸역 해나가는 것에 지친걸까. 이렇게 하기 싫은데 왜 이렇게나 해야 하는거야? 의미없이 꼬리를 물어가는 물음표 언저리에 그저 1차원적 내 목숨 부지를 위해 일한다는 생각이 스치면 가슴 깊게 땅굴이 파이는 듯 했다. 인터넷에 ‘아래 리스트 중 15개 이상이면 번 아웃 증후군을 의심해 봐야..’ 이런 문구를 단 간단한 체크리스트들이 심심찮게 돌아다니던데. 내가 그 번아웃증후군인가에 해당되는거 아닐까 싶다가 체크리스트에 ‘입맛이 없고 최근 몸무게가 급감했다’라는 내용이 있던 걸 떠올리고 내가 잘도, 하고 중얼거린다. 그날 퇴근길, 지친 몸뚱이를 끌고 향하던 곳도 내려올 줄 모르는 몸무게를 어떻게라도 해볼까 해서 충동적으로 등록한 동네 실내수영장이었던 것이다.
무언가를 스스로 배운다는 건 삶에의 에너지가 있는 있다는 거라고 얼마전 티비에서 본업과 예능을 전횡하고 있는 인기 모델의 말이 떠오른다. 거의 물에 불다 못해 터지기 직전인 영혼을 질질 끌고 오다시피 하면서도 기어이 수영장에 들어간 건 이나마라도 안하면 내가 나 자신의 하강속도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어떻게 탈의실까지는 몸을 던져 놨지만 수영복 입을 기운도 없었던, 그래서 샤워만 간신히 마치고 내 젖은 몸과 마음을 기대어 웅크릴 온기를 찾아 수영장 샤워실 구석에 딸린 조악한 습식 사우나에 알몸을 누인, 이럴거면 왜 왔나 싶어 더 꼬로록 가라앉던, 수영장 터줏대감 아주머니들의 높고 빠른 목소리가 뭉근한 사우나실 공기를 뚫고 울리던, 그런 날이었다.
- 왜, 유성온천 사우나권 100장 단위로 사면 한 장에 5천원 꼴인데 100장 너무 많잖아. 근데 경숙이 걔가 100장을 샀다면서 나한테 30장을 판다더라구. 언니 내가 30장 떼줄게 해서 이제나 저제나 하다 손녀가 계속 찜질방 타령이길래 받을 수 있나 해서 전화하구 문자를 몇 번이나 했는데 글쎄, 아예 받지를 않는거야 걔가. 아니 늦게라도 문자에 답장이라도 해야지 원, 그냥 연락이란 연락은 다 안받구 말이지. 나 그래서 내가 그냥 가서 샀잖아 그 옆에 해수사우나에서 50장권으로 팔길래. 거기도 한 장에 5천원 떨어지거든 그러면. 나 경숙이 걔 그렇게 안봤는데 그런면이 있더라구 글쎄. 나 여기서 수영 시작하고 8년 알아온 사이인데 역시 사람은 끝까지 봐야되. 언니 언니 하더니. 계속 잘해도 끝까지 잘해야 잘한거지. 안그래?
마지막까지, 중간에 쉼도 흐트러짐도 없이 애쓰지 않으면 8년의 인연도 이렇게 종결을 짓는, 왜 이리 애써야 하나 수영장에서 만난 인연까지도 실수 하나에 손가락질 받는 이 세상. 입안에 흘러 들어오는 내 땀방울이 쓰디 쓰게 느껴졌다. 어찌하여 이리도 긴장을 풀고 살 수 없는가. 나도 너도 다들.
몸을 일으켜 수영복을 입으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