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이 삶의 모토라며
“할 수 있다는 긍정의 힘! 저의 최대 장점이자 삶의 모토입니다.”
졸업 마지막 학기부터 무수히 써내던 입사지원서 자기소개란은 여러 가지 이유로 차마 눈뜨고 읽기 힘들다. 그래, 긍정의 힘. 그때 한참 유행했지. 그건 알겠는데 심지어 최대 장점이란다. 더 나가 삶의 모토씩이나.
그런데, 저 말 꼭 보여주기 용은 아니다. 그땐 정말 내 속에 긍정이가 반짝반짝 했던 것도 같다. 뭐든 꽤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고, 딱히 무언가를 잘 못해본 기억도 없었다. 내가 나 긍정적인 사람이야 라고 말하기 전에 주변인들이 먼저 말해주었다. 수많은 입사지원서가 서류심사에서 탈락해도 그닥 큰 타격으로 다가오지 않았던 걸 보면 그때 내 속에 저 자기소개서의 오글거리는 문구같은 무언가가 있기는 했던 모양이다.
그러던 내가 취업을 하고 사회와 돈벌이의 쓴 맛을 진하게 맛보게 되었다. 그 맛은 보아도 보아도 적응이 안되서 그만 맛보고 싶은데 먹고 산다는게 무엇인지 멈출 수도 없었다. 나는 못하는 것 투성이었고 매일 자존감 줍기가 일과였다. 긍정하기의 무력함을 수도 없이 깨달은 그 많은 날들을 지나, 어느 순간부터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라는 말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졌다. 굳이 부정적으로 살 필요는 없겠지만은 시궁창에 몸을 담그고 그래 어짜피 버릴 낡은 옷이었잖아, 버리는게 있으면 들어올 것도 있겠지 아무렴 하며 억지로 긍정하는건 지렁이의 초라한 꿈틀거림 같았다. 날개를 잡힌 잠자리가 최선을 다하면 도망갈수 있어, 라며 꼬리를 웅크리고 다리를 발버둥 치는 것만 같았다. 아무리 긍정해도 내일 또 출근할 회사는 더럽기 그지 없는데 내가 어떻게 긍정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마음이 삐뚤어질대로 삐뚤어졌는지 긍정은 내게 그저 자명하게 벗어날 힘 없는 자의 초라한 자기위로였다.
그런 이유로 언젠가부턴가 긍정은 인위적이야, 삶은 그냥 덤덤히 살아가는거지, 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듯 하다. 흔히들 건네는 ‘잘될거야’ 이런 말은 쿨한 것과는 멀다는 느낌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잃었다. 내 속의 긍정이를. 내 마음에 어둠이 찾아올때면 힘을 내는 주문은 ‘힘내보자’, ‘잘될거야’가 아니라 대신에 ‘이것도 지나간다’, ‘아프지, 토닥토닥’ 이었다. 밝음을 굳이 목을 빼고 찾기보단 지금의 어두움을 안고 토닥이는 방법도 내겐 잘 맞았다. 나의 이런 태도는 내 주변인들에게도 당연히 은연간에 인지되었을 것이다. 근 10년간은 ‘넌 긍정적이야’ 류의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어느 평일 아침, 이제 막 여명이 비치는 새벽부터 아기가 깨어나 엄마 일어나라고 칭얼댔다. 어제도 안 자려는 아이를 늦게야 겨우 재우고 이런저런 일을 챙기고 새벽에야 잠들었단 말이야. 심지어 곧 출근도 해야 하는데. 몰려오는 피로감에 짜증이 확 솓구쳤다. 나도 모르게 왜그래, 좀 더 자야지! 하며 날카로운 목소리가 나간다. 평소 왠만하면 아이와 나의 육아전쟁을 방관해와서, 그래서 나를 너무 힘들게 했던 남편이 부스스 일어나 왠일로 옆에서 한마디 거든다.
- 너무 그러지마. 어떤 영상에서 보니까 아기 코끼리도 아침에 엄마, 아빠 코끼리보고 일어나라고 깨우더라. 엄마아빠 코끼리는 꿈쩍도 않고.
이 말이 뭐라고.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 매직처럼 마음이 살짝 누그러졌다. 가끔은 내 감정의 흐름이 이해 불가능할 때가 있는 법이다. 내 뇌가 내 마음보고 어, 너 왜그래? 하는 때 말이다. 하긴, 동물인 코끼리도 아기가 아침에 엄마아빠랑 놀고 싶어 일어나라는데 우리 아이가 그러는건 아이니까 당연하지. 일찍 깨어난게 딱히 잘못도 아니잖아? 얼마나 엄마를 좋아하면 그러겠어. 우리 아기랑 출근전에 시간 듬뿍 보내고 가겠네. 피곤한 몸을 애써 일으키며 마음을 다잡았다. 짜증으로 가득차 터질 것 같던 마음에 평정심을 끌어다 앉히며 아이를 다정하게 안아주었다. 생각보다 기분이 금새 가라앉아 심지어 아이가 사랑스러워 보였다. 1분안에 일어난 일이다. 좋게 좋게,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설마 이거, 진짜 효과 있던거야?
십년도 훨씬 더 전에, 그러니까 내가 입사지원서를 쓰고 면접을 다니던 그 무렵에 희대의 베스트셀러 「시크릿」이라는 책이 온 서점과 사람들의 손을 점령하던 때가 있었다. 아직도 기억나는게 온 우주에 내 소망과 기운을 계속 전달하면 정말 우주가 에너지를 뿜뿜 해서 이루어 준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좀 더 세련되고 논리적인 기조로 설득력 있게 저술한 훌륭한 책이었지만 내겐 그렇게만 기억에 남아있다. 하지만 여전히 난 우주에 기운, 그런 건 좀 체질에 안맞다. 긍정은 상황을 바꿀 수 없다. 하지만 작은 생각 꼬투리의 변화 하나로 내 마음이 조금 편안해 질 수 있다면, 그래서 내가 나를 조금더 아껴줄 수 있다면, 그래서 내 작은 아가를 한번 더 다정하게 안아줄 수 있다면. 그래, 긍정에게 당했던 배신감을 이제 털어내고 다시 친구하는 게 어떨까, 하고 살포시 생각해 본다.
난 여전히 ‘나 긍정적인 사람이거든. 잘 될거야, 세상은 그래도 아름다워. 오늘도 감사해!’ 하며 하이 텐션을 유지하는 사람들과는 그렇게 잘 맞지는 않는다. 어쩌면 부러워서 그러는지도 모른다. 회사에서도 삼삼오오 모여서 상사 흉보는 것도 좋아하고 답 없는 한탄을 하며 비하개그로 말 장난 하는 것도 좋아한다. 그래서 내가 밟은 이 땅이 엉망진창이라는게 아니라, 그 엉망을 그대로 바라보고 아닌척 하지 않고 싶을 뿐이다. 그렇기에 그 속에서 만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 내 마음을 움직이는 것들이 더 소중하고 값지다는 걸 정확히 알고 걷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생뚱맞은 아기코끼리가 내 마음에 조금 용기를 줬다. 일상의 사소함 정도는, 다시 멀어졌던 긍정이랑 손 잡아보라고 말이다. 날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