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는 뉴욕에 사는 많은 이들의 삶을 바꿔놓았다
6월 5일. 금요일.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재택근무를 하게 된 지 거의 100일이 다 되어간다.
100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계절은 금세 무더운 여름으로 바뀌었고, 2020년의 반이 지나갔지만, 나는 아직도 이 현실이 피부로 와 닿지 않는다. 그동안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고, 나는 아직도 그 사실들을 곱씹는 중이며,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갸늠이 되지 않는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고, 아직도 필요하다.
3월 3일. 뉴욕에 첫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 한 뒤 며칠 뒤, 나는 회사의 인사과 매니저를 찾아가 회사로 출근하는 것에 대해 염려를 표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뉴욕 오피스에 근무하는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생각이었다.
다들 회사 출근을 해야 하는데,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 것이 영 꺼림칙한 데다 (게다가 나는 첫 확진자가 바이러스를 전파한 그랜드 센트럴 역에서 환승해야 하는 통근러였기 때문에 더) 그렇다고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겠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시기상조인 것이 아닌가 다들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당일 아침, 나는 지하철에서 아시아계 사람들을 미심쩍게 바라보는 미국 사람들의 눈빛에서 두려움과 인종차별이 담긴 혐오를 읽었고, 바이러스나 인종차별로부터 내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튜브에 떠돌아다니는 아시안 승객을 향해 욕설과 비난을 쏟아내는 한 정신 나간 승객의 비디오를 보고 나서, 난 또 다른 희생양이 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미국에서 동양인 여자애로 사는 것이 녹록지 않다고 느낀 것은 처음이 아니었지만 그 위협이 제법 살벌하게 느껴진 건 생소한 경험이었다.
인사과 매니저는 조용히 내 이야기를 듣더니 곧 재택근무에 관련해서 사내 이메일을 보내겠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우리 회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Upstate New York이나 브루클린에서 출퇴근을 하기 때문에 대중교통을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 상황을 늘 예의 주시한다. 생각보다 수월하게 이야기가 진행이 돼서 그나마 가벼운 마음으로 회사를 나설 수 있었다. 그리고 점점 뉴욕에 거주하는 확진자의 수가 증가하기 시작하자, 3월 9일, 회사의 전 직원은 무기한 재택근무를 하게 되었다.
재택근무를 시작하고 나서 처음 몇 주간은 몸도 마음도 편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출근 준비를 안 해도 되고, 9시 30분에 낑낑 거리며 인산인해인 지하철 칸에서 이리저리 떠밀려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니. 게다가 점심은 집에서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대로 해 먹을 수 있다. 이거 꽤 내 체질에 맞는 걸? 평생 해도 되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뭣도 모르고 몸이 편하니 좋아라 했다.
친구들과의 약속은 당연히 취소되거나 무기한 연기되었다. 주말마다 친구들과 술 한잔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게 낙이었는데 그 사치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천식 환자들에게 치명적이라는 보도에 기존에 천식이나 다른 질환이 있었던 친구들은 뉴욕을 벗어나 부모님이 계시는 본가로 돌아갔다. 학교를 다니는 유학생 친구들은 학교가 휴교하자 어쩔 수 없이 살던 집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귀국길 또한 안전하지 못했다. 여러 친구들이 공항이나 비행기에서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몇 주째 바이러스와 싸우며 고생하는 것을 보았다. 올해 학교를 졸업하는 친구들은 경제가 얼어붙자 일자리를 알아볼 기회도 얻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 암울한 시기의 연속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생각보다 심각하다고 느낀 건 집 밖을 나설 때였다. 길거리에 점점 많은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기 시작했고, 마스크를 쓰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비난의 눈초리를 보내며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마트에서는 휴지와 손 세정제, 소독용품들이 동 나기 시작했고, 도시는 점점 유령도시로 변해갔다. 타임스퀘어에는 불 켜진 전광판만 반짝거릴 뿐 바글거리는 거리는 거짓말처럼 텅 비었다. 적응이 되지 않는 광경이었다.
길거리에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게 되었고, 점점 노숙자들이 거리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횡단보도에 서있는 보행자가 보이는 족족 그들은 점점 위협적으로 돈을 달라고 구걸했다. 장보는 것 이외에 집 밖을 나가기가 무서워졌다.
바이러스로 인해 모든 것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사람들이 집 밖에 나오지 않자 경제가 금세 침체되었다. 많은 회사들이 경영상의 어려움을 이유로 많은 직장인들을 정리해고하거나 무기한 무급휴가 (임시해고)를 통보했다. 직장을 잃은 사람들은 정부에서 나눠주는 재난지원금을 받았다. 수많은 가게가 문을 닫거나 부도처리되었고, 뉴스에서는 계속해서 집 밖에 나오지 말라는 얘기와 경제대공황 이후로 최대의 경제 침체에 대한 소식이 가득했다. 확진자와 사망자의 수를 보여주는 그래프는 날이 갈수록 고공 행진했다.
한국에서는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 증세가 의심이 되면 보건소 직원이 직접 자택을 방문하거나 환자를 병원으로 인계해 치료해준다고 들었다. 미국에서는 병원에 연락을 하면 무조건 집에 머물라는 통보를 한다. 타이레놀을 처방해주는 것이 그들로써는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했다. 이미 병원은 더 심각한 상태의 환자들로 넘쳐나 의료진들도 밤새도록 그들을 간호하고 처치하느라 잠을 못 이룬다고 했다. 의료진들의 방호복과 마스크는 물자가 부족해 이미 입은 방호복을 세정제로 닦아 다시 사용하는 등 환자도 의료진도 그 누구도 병원균으로부터 안전하지 않았다. 바이러스는 남녀노소 부자와 가난한 사람 가릴 것 없이 많은 목숨을 앗아갔다. 친구의 부모님이 바이러스로 돌아가시는 슬픈 소식도 들려왔다.
친구들과 가족들과 연락하는 수단으로 화상채팅이 큰 몫을 차지했다. 주말마다 한 친구가 Zoom 화상채팅 앱 링크를 공유하면 모두들 참여해 수다를 떨거나 같이 술을 마시고, 생일파티를 축하해주거나 저녁을 먹었다.
모두들 모이면 이 상황이 언제 끝날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대화의 끝에는 장담할 수 없는 미래 앞에서 무기력해진 말꼬리만이 늘어질 뿐이었다.
암울한 분위기가 지속되는 가운데 한 흑인 청년이 경찰의 무자비한 폭행에 그만 목숨을 잃었다. 도화선에 불 붙인 다이너마이트 마냥 금세 사회는 불붙은 화약고처럼 분노가 폭발했다. 그동안 무고한 사람들이 인종차별과 무분별한 폭행에 목숨을 잃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바이러스의 공격에 무능력하게 대처한 정부에 이미 실망한 사람들의 분노는 한계에 다다랐다. 마스크를 쓴 시위대가 결집해 거리에 쏟아져 나왔다. 맨해튼 시내와 브루클린, 모든 동네에서 사람들이 "No Justice, No Peace! (정의가 없는 국가에는 평화란 없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목소리를 냈다. 시위에는 무차별 약탈도 따랐다. 누군가가 가게의 유리창을 깨고 들어가 물건을 훔치거나 불을 냈다. 경찰 또한 시위대를 강경 진압하기 위해 몽둥이를 들고 최루탄을 던졌다.
도시에는 곧 저녁 8시 이후 통행 금지령이 내려졌고 디스토피아 영화에서나 볼 법한 줄거리가 눈 앞에서 펼쳐졌다. 뉴욕에서 지낸 7년 동안 이토록 혼란스러운 모습은 처음이었다.
이 곳 미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다. 태풍의 눈 속에서 문제를 직면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하루가 멀다 하고 여기저기서 좋은 소식보다 안 좋은 소식이 더 많이 들렸다. 뉴스를 읽고 문제를 파고들어보니 사회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정말 많은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있었다. 이 틈에서 내가 취해야 할 할 입장은 어느 것이고 어느 방식으로 불의에 맞서 목소리를 내야 할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나는 미국에 사는 이방인으로써 사회의 문제를 매일매일 가까이서 접하지만 목소리를 내거나 정치적 견해를 내는 데에 한계가 있음을 느꼈다. 그저 제삼자의 눈으로 관찰할 뿐이었다.
한 가지 흥미로웠던 점은, 주변에서 이 상황에 대처하는 깨어있는 사람들의 대처 방법이었다. 제 각각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친구들과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팻말을 만들어 거리로 나서는 친구도 있었고, 이 어려운 시국에 피해를 받은 사람들을 위해 기금을 조성하거나 봉사활동에 자원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동안 열심히 이 문제에 대해 공부했던 이들은 인권문제에 도움이 되는 책과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를 공유하며, 상대적으로 이 문제에 잘 몰랐던 이들에게 정보를 공유했다. 오래간만에 SNS의 순기능도 목도할 수 있었다. 주변에 이렇게 멋진 친구들이 있어서 덩달아 자극받는 기분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발현 이후에 전 세계는 한바탕 우울증을 겪고 있다. 아직 바이러스의 여파가 가시지 않는 뉴욕은 더욱더 그 증상이 심하다. 어느 누가 우스갯소리로 말했었다. 2020년은 워낙 다사다난해서 차라리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해라고. 어느 정도 그 말에 동의를 하는 바이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2020년은 그 나름대로의 교훈이 있는 한 해가 되지 않을까. 혐오와 불신, 그리고 상처라는 부정적인 키워드 대신 공생, 배려, 인내와 공동체라는 단어의 의미를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그런 시간이 모두에게 돌아가길 소박하게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