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열문단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도영 Feb 27. 2024

상대의 절박함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비겁한 일

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79

01 . 

17세기 스페인에서 활동한 철학자이자 오늘날 그 가치를 더 높게 인정받는 책 ⟪사람을 얻는 지혜⟫를 쓴 작가 '발타자르 그라시안'이 남긴 말입니다.

"말이란 너무도 가벼워서 상시 조심해야 하지만 특히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더 조심해야 한다. 자칫 그들이 당신의 말을 너무 쉽게 믿는다면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을 택하라."


02 . 

조금은 무거운 말로 글을 시작하게 되었지만 사실 지금부터 전해드릴 얘기 역시 그리 가볍지만은 않습니다. 오늘 다룰 주제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생각해온 주제이자 최근 들어 조금씩 더 확신을 가지게 되는 주제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 가운데에 있는 단어는 바로 '절박함'입니다.


03 . 

혹시 여러분은 가장 절박했을 때가 언제였나요? 취업 준비생 신분으로 하루하루 애가 타는 나날을 보내던 시절이었을 수도 있고 꼭 합격해야 하는 시험을 앞두고 안절부절못하던 때였을 수도 있겠네요. 아니면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에 봉착해서 한 푼 한 푼이 아쉬웠던 순간이나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어 구멍 난 자존심 사이로 찬바람이 휭휭 불어오는 겨울을 견디던 장면이 기억나는 분도 계실 겁니다.


04 . 

이렇듯 절박한 순간이 안타까운 건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하나는 한 치 앞을 내다보기도 힘든 그 막막함이 우리의 시야와 판단을 흐리게 만든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기 때문에) 너무 쉽게 뭔가를 선택하거나 판단하려는 조급함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절박하지 않았더라면' 나름 이성을 찾고 순리대로 진행할 수 있었던 일이 내 역량과는 무관하게 흘러갈 때가 바로 절박함과 마주하는 순간인 거죠.


05 . 

하지만 세상에는 이 절박함을 교묘히 이용하는 나쁜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이런 사람들은 절박함만을 활용해 자신을 과시하거나 개인적인 이득을 취한다고 보는 게 더 적합할 것도 같네요.

이렇게만 얘기하면 마치 보이스 피싱 범이나 공갈을 일삼는 사기범들을 떠올리기 쉽지만 의외로 우리 일상에서 아주 흔하게 보이는 평범한 절박함을 건드리는 사람도 결코 적지 않습니다.


06 . 

입에 올리기 부끄러운 얘기지만 한때 동료였던 사람 중 한 명이 자신의 지인에게 컨텐츠 자문을 해준다며 상대를 마음대로 조종하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충고도 해보고 따끔하게 일침도 해봤지만 도움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그 행위를 제제할 방법이 전무했죠. 당시 그 동료의 지인은 여러 번의 사업을 실패하고 마지막 보루로 그에게 매달려 있었던 것인데 동료는 정작 본인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일들을 들이밀며 더 과감히 도전하라고 부추기던 것이 기억납니다. 당연히 결말은 좋지 않았고 주변인 모두에게 아주 부정적인 인상을 남겼죠.


07 . 

최악의 케이스를 소개한 나머지 이런 에피소드가 크게 와닿지 않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한편으로 '나는 저런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리 절박해도 그 정도로 끌려다니는 사람도 문제가 있지'하는 의견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저도 크게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이런 지적이 딱히 틀린 부분이라고 볼 수도 없는 거니 말이죠.


08 . 

하지만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지나온 과거를 잊거나 미화하기 일쑤고 자신에겐 관대하고 온화하지만 타인에겐 엄격하고 타이트한 잣대를 댑니다. 따라서 지금 내가 이렇게나마 살고 있는 건 나의 치열한 노력 덕분이고 저들이 저렇게 절박한 이유는 그만큼의 열정을 다하지 않은 것이라는 이상한 기준이 마음속 어느 한켠에 괴물처럼 피어오르고 말죠. 그리고 마침내 도움과 조언의 탈을 쓴 희한한 가스라이팅이 시작되고 사태는 생각보다 나쁘게 치달아 가곤 합니다. 뭐랄까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악화일로라고 하면 괜찮은 비유가 되려나요.


09 . 

물론 그마저도 절박한 사람에겐 작은 도움으로 작용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나중에 욕먹기 싫어서 도움의 손길조차 내밀지 않는 건 더 비겁한 행동이라고 욕을 먹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말하고자 하는 포인트는 정확히 반대입니다. 만약 누군가를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다면 일단 본인이 무엇을, 얼마나, 잘 도와줄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만에 만에 만에 하나라도 그 과정에서 타인에게 자신의 우쭐거림을 과시하고 싶은 마음이 싹튼다면 애초에 그 싹을 잘라버리는 게 현명합니다. 아니면 더 나은 누군가를 소개시켜주는 것이 좋고요.


10 .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 더 말 조심하라'는 그라시안의 말은 어쩌면 '절박함을 가진 사람에게는 더더욱 말 조심하라'는 문장으로 바꿔쓸 수 있을지 모릅니다.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은 상대적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절박함을 가진 이가 받아들이는 한마디는 우리가 흘려드는 그 한마디의 수십 배, 수백 배의 임팩트를 가질 수도 있을 테니까요, 새삼 겸손하고 또 신중하게 사람을 대해야 한다는 교훈을 진지하게 다시 떠올리는 저녁이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발전과 진화는 '쪼개짐'으로부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