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 한달살이 Day 14
중학교 3학년 2학기 수학에 <대푯값과 산포도>라는 단원이 있다. 대푯값에는 평균, 최빈값, 중앙값이 있고 산포도에는 분산과 표준편차가 있다. 이 중 중앙값이란 자료를 크기순으로 나열했을 때 딱 중간(right in the middle)에 위치하는 값으로, 자료의 개수가 홀수개일 때는 중앙값이 하나로 정해지지만, 짝수개일 때는 딱 중간에 위치하는 값이 두 개가 되어 그 두 개의 평균이 중앙값이 된다.
우리는 이번에 27일 동안 발리에 있는 일정으로, 나의 경우 대학교 4학년 때 호주에서 2개월 홈스테이를 했던 이후로 처음으로, 딸의 경우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해외에서 길게 있는 경험을 하는 중이다. 그 27일 중에 오늘이 14일째. 말 그대로 일정의 딱 중앙값인 날이 오늘인 것이다.
발리에서의 두 번째 주말은 캠프의 추가 일정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오늘 점심때 인근 레스토랑에서 아이들은 요리를 하고 학부모들은 요리를 먹는 이벤트가 있을 예정이었다. 로비에서 11:30에 모여 출발하는 계획이어서 어젯밤 내일은 늦잠을 자자고 하며 불을 껐었다. 딸은 거의 불을 끄자마자 잠이 들었으며, 나도 지난 글을 졸면서 겨우겨우 다 쓰고 미처 업로드는 하지 못한 채 잠이 들어버렸다.
오래간만에 늦잠을 잘 기회였는데, 사람의 습관이라는 게 참 무서운 건지 평일에 일어나는 시간에 눈이 떠져 너무 아쉬웠다. 매일 글을 올리기로 한 나와의 약속을 어젯밤 자느라 못 지킨 것을 후회하며 부랴부랴 글을 올리고 있는데 노트북을 두드리는 소리 때문인지, 오토바이 소리 때문인지 딸도 곧 잠이 깨버렸다.
이왕 8시 전에 일어난 거 조식을 먹으러 내려가기로 했다. 딸은 그냥 방에서 빵과 과일로 때우고 싶어 했지만, 둘이 먹기에 충분한 양이 아니었고, 나는 배가 고팠기 때문에 맛이 없어도 조식을 먹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혼자 내려가면 분명, 또 누군가가 참견을 할 것 같아서 방에 있는 빵과 과일을 가지고 가서 먹자고 딸을 설득했다.
그렇게 조금이라도 배를 채우고 오전에 그야말로 좀 쉬다가 12시경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도로 폭이 전체적으로 모두 좁은 발리의 특성상 버스는 우리를 레스토랑 앞이 아니라 조금 떨어진 곳에 내려주었다. 조금 걸어가다 보니 영화 <아바타>에서 튀어나온 듯한 나무도 보이고 약간 고급져 보이는 건물들을 지나 드디어 <cuca>라고 쓰인 곳이 나타났다.
나는 여행을 앞두고 계획도 거의 안 세우지만 이번처럼 캠프에서 이미 짜인 일정이 있을 때에도 갈 곳을 미리 검색해보는 편이 아니다. 앞으로 갈 곳에 대한 정보가 많으면 막상 실제로 갔을 때 실망할까 봐서이다. 그래서 <cuca>라는 레스토랑에 대해서도 한 번도 검색을 해보지 않았었다. 그래서일까. 사전 정보가 하나도 없어서였을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멋진 레스토랑의 전경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다른 엄마와 아이들, 심지어 내 아이도 이미 앞에 가고 있는데 나만 뒤쳐저 계속 사진을 찍었다. 들어가다 보니 딱 봐도 포토존인 곳이 있어 레스토랑 직원에게 부탁해 딸과 사진을 찍었는데, 영 마음에 안 들어 솔직히 다시 찍어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게 이제와 후회가 된다. 아, 그때 세로로 한번 더 찍어달라고 말할걸.
아무튼, 그렇게 시작된 오늘의 찰칵찰칵. 글을 위해서도 그리고 나중을 위해서도 매일 찍은 사진을 폴더별로 저장해두는데, 오늘 찍은 사진도 꽤나 많다. 웰컴 드링크와 두 종류의 타파스로 시작된 요리는 실내로 자리를 옮겨 와인과 3종류의 음식 및 디저트로 이어졌다. 그 사이사이 아이의 모습도 담다 보니 오늘도 핸드폰의 배터리는 이미 낮부터 반 이하로 뚝 떨어져 버렸다.
레스토랑 이벤트가 끝나고 호텔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나뉘었는데 나와 딸은 당연히 후자. 토요일이고 이왕 나왔는데, 더 놀다 들어가야지.
2주 정도 지내다 보니 챙겨 온 옷들을 2~3번 돌려 입은 상태여서 나도 슬슬 캐리어에 담지 못한 옷들을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딸도 그랬나 보다. 며칠 전부터 입을 옷이 없다고 옷 투정을 하길래 토요일에 엄청 큰 몰에 가자고 했었다. 그래서 우리는 몰 발리 갤러리아로 향했다.
한국에서는 딸 옷은 주로 ZARA에서만 샀었다. 지난주 목요일에 왔을 때 자라를 봤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는지, 아니면 못 찾는 건지, 자라는 안 보이고 H&M만 보여서 그곳에서 입을 만한 옷을 찾아봤다. 다행히 내 반팔티 하나와 딸 반팔티 세 개를 득템 했다. 원래는 발리 스타일의 점프슈트나 원피스를 사고 싶었지만, 마땅한 것이 없어서 한국에서도 입을 수 있는 무난한 것들로 구매했다.
옷을 사고 간식으로 1단계였는데 엄청 매운 떡볶이를 먹고 후식으로 버블티를 먹으려다 품절이라고 하여 실패하고 저녁을 먹을 장소로 이동을 했다. 그래도 나름 주말 저녁이라 어제 나답지 않게 미리 석양이 아름다운 스페인 음식점(El Kabron)을 예약해두었는데, 오늘 이동하는 중간에 동선을 다시 체크해보니, 너무 돌아가는 루트여서 그곳은 취소하고 급히 쇼핑몰에서 가까운 곳으로 다시 알아봤다.
배터리가 너무 없는 상태여서 정말 급히 알아본 꾸따 비치에 있는 보드워크 레스토랑. 택시 기사가 안으로 걸어가야 한다며 어떤 리조트 같은 곳의 입구에 내려주었다. 아, 지난주 금요일 락바를 갈 때도 비슷한 상황이었는데, 왜 내가 검색하는 곳은 죄다 이렇게 고급진 공간을 지나야 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인가. 나중에 찾아보니 오늘 레스토랑을 가기 위해 지나왔던 곳은 발리 가든 비치 리조트라는 우리가 머무는 곳과 같은 4성급 호텔이었는데, 기분 탓이겠지만 뭔가 더 좋아 보였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가다 보니 음악소리와 음식 냄새가 나고 사람들 소리가 들리더니 꾸따 비치가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레스토랑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때쯤 이미 내 핸드폰 배터리는 매우 가늘어졌지만, 그렇다고 사진을 안 찍을 수는 없지. 그래서 나는 딸 핸드폰에도 고젯을 깔아 두었다. 나중에 돌아갈 택시를 잡기 위해. 이럴 때는 또 주도면밀하다니까.
또 봐도 언제 봐도 좋은 노을 사진을 한참 찍고, 음식 사진도 남기고(메인 요리는 미처 찍지 못해 아쉽지만), 너무 말라 안쓰러운 냥이에게 먹을 것도 주며 우리 집에 있는 고양이도 그리워하면서 그렇게 발리에서의 두 번째 주말을 딸과 사이좋게 보냈다.
사실 어제저녁 딱히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딸과 2주 내내 붙어 있어서였는지 조금 짜증이 날 뻔했었다. 나는 좀 선천적으로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너무 내내 붙어있는 건 힘들어하기 때문에 언제나 거리가 필요한데, 한국이 아닌 타국에서 2주 내내 물론 오전 9시~오후 4시는 제외이지만, 거의 딸과 단둘이 붙어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조금 다운이 되었던 거 같다.
하지만 아까 저녁을 먹으면서 딸과 오늘이 발리에서의 딱 중간인데, 어떤 것 같냐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다음에 3달 살이를 하자는 말이 딸 입에서 나왔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이미 나는 겨울방학 때 호주로 가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현실적으로 겨울방학이라고 해도 3달은 힘들고 한 달 반 아니면 2달 정도가 가능하겠지만, 다음번 해외살이의 밑그림이 시작된 것 같아 또 혼자 이미 설레는 중이다.
숙소로 복귀해 딸은 오늘 산 옷들을 차례대로 다시 입어보며 신이 났고, 나는 나대로 대학생 때 2개월 홈스테이의 추억이 있는 곳을 딸과 함께 가게 될까 싶어 신이 났다.
각자 신난 오늘의 이 기분을 잘 간직한 채로 남은 일정도 알차고 의미 있게 무엇보다 안전하고 건강하게 보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