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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히어 Jun 26. 2024

161104-03

두 개의 거울



처음에는 그냥 접이식 의자를 펼치고 앉아있기만 해도 좋았다. 하지만 사람 욕심에는 끝이 없는지 앉은 상태에서 다리를 죽 펴서 발을 올려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다음날 집에서 작은 받침대를 하나 가져와 의자 앞에 놓았다. 그다음 날은 무릎 담요를 가져와 의자에 걸어두었다. 그다음 날은 커피포트와 종이컵과 믹스커피를 가져왔고 그다음 날을 그것들을 담아둘 수 있는 플라스틱 박스를 가져왔다.


그렇게 5층 여자화장실 안 창고에는 나만의 살림이 하나씩 늘어갔다. 다행히 다른 화장실에 비해 청소를 자주 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어서 휴지나 비닐, 그 외 청소 도구들도 최소한만 남겨두고 1층이나 3층 창고로 옮기고 나니 공간은 처음보다 더 넓어졌다. 접이식 의자가 아니라 접이식 간이침대도 펼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고, 곧 접이식 의자는 접이식 간이침대에 자리를 내어주었다.


나의 일은 고되기는 하지만 요령을 터득하고 숙달만 되면 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시간을 세이브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공간이 생기고 나니 그곳을 찾는 횟수가 하루에 한 번에서 두 번이 되고 한 번에 머무르는 시간이 10분에서 20분이 되어갔다. 그리고 잠깐 몸을 누이는 것 외에 더 많은 일을 그곳에서 하게 되었다.


라디오를 들으며 집에서 싸 온 도시락을 먹고 커피 한잔을 한 후 20분 정도 눈을 붙이는 것은 수요일과 금요일 오후 나에게 주어진 비밀스러운 휴식이었다. 그렇게 꿀맛 같은 낮잠을 자고 난 후 양치질을 하고 거울을 보며 머리를 빗고 립스틱도 바르면 그 순간만큼은 화장실 청소부가 아니라 여배우가 된 것 같아 괜히 거울 앞에서 색다른 표정을 지어보기도 했다.


그렇게 창고 안에서 나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도 항상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누군가 갑자기 창고 문을 연다든가 그 밖에 다른 돌발 상황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누군가 화장실에 들어오면 걸리는 시간은 3~5분이다. 먼저 비어있는 칸으로 들어가 대부분은 액체를 배출하고 물을 내리고 옷을 입고 손을 씻고 얼굴을 점검하고 나간다. 가끔 더 오래 걸리는 경우도 있지만 순서는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그 순서에 동반되는 소리도 사람마다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분명히 누군가 들어온 것 같은데 아무 소리도 나지 않다가 다시 나가는 소리만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 한 번은 그러려니 했는데 똑같은 일이 3번째 반복되니 창고 문을 열고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대학교의 화장실은 강의와 강의 사이의 시간인 매 시간 50분에서 정시까지가 가장 붐비는 시간이다. 특히 11시 50분에서 12시와 12시 50분에서 1시는 점심을 먹으러 가기 전의 학생들과 점심을 먹고 난 후의 학생들로 화장실 칸과 거울 앞 모두 가장 혼잡한 시간이다. 가급적 그 시간대는 피해 화장실을 가더라도 매번 거울을 보고 있는 학생들이 있었고 이상하게도 나는 그 학생들과 같은 거울을 보고 있는 것이 불편해서 황급히 손만 씻고 제대로 닦지도 않고 나오곤 했었다.


그러다 어느 날, 타과의 수업을 청강으로 듣고 손을 씻으러 5층의 화장실에 간 적이 있었다. 그 건물은 새로 지은 건물이라 화장실도 깨끗한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5층 화장실은 깨끗한 것을 넘어서는 고요함이 느껴졌다. 청소 아주머니가 아무리 깨끗이 청소를 하더라도 화장실이라는 곳은 한 명만 이용해도 티가 난다. 휴지통이 반쯤 열려 있거나, 세면대 주변에 물이 한 두 방울 튀어 있거나, 거울에 손자국이 나 있거나 등등. 그리고 방금 청소를 한 화장실 역시 티가 나게 마련이다. 휴지통이 텅 비어있거나, 세면대나 거울에 사용한 자국 대신 막 닦아낸 흔적이 있거나. 그런데 그 화장실은 방금 청소한 것 같지 않은 대도 아주 깨끗했다.


그리고 아주 조용했다. 그래서 처음 들어간 순간 물을 틀기가 미안할 정도였다. 세면대에 물이 튈까 봐. 그 고요함을 깰까 봐. 잠깐 서 있다가 왠지 당분간 아무도 들어오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들어 얼마만인지 모르겠지만 실로 오랜만에 정면으로 거울 속 나를 들여다보았다.


집에서 화장실의 거울이나 방 안의 거울을 보지만 밖에서 이렇게 큰 거울 속 나를 가만히 들여다본 것은 거의 10년만 아니 거의 처음인 것 같았다. 항상 작은 거울로 잠깐씩만 보다가 큰 거울로 오래 보니 그동안 내가 알던 모습과 어딘지 달라 보였다. 한 발자국 더 앞으로 가서 거울 가까이에 얼굴을 들이대고 눈을 들여다봤다. 2등신으로 보이는 내가 거울에 비친 눈동자 속에 또 들어 있었다.


그렇게 보다 보니 들쭉날쭉한 눈썹도 보였고, 피부에 난 잡티도 보였고, 입 위쪽에 연한 수염도 보였다. 화장실에서 주변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얼굴을 거울에 들이밀고 화장을 고쳐대는 학생들의 기분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참을 더 내 얼굴을 뜯어보다 손 씻는 것을 잊어버리고 다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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