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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ri B Jan 07. 2018

#11. 키르기즈스탄 (Kyrgyz Republic)

개발도상국 이야기

개발도상국 이야기

#11. 키르기즈스탄 (Kyrgyz Republic)

키르기즈스탄의 국기는 용맹을 상징하는 붉은색 바탕을 배경으로 평온과 부를 상징하는 노란색 태양과 40개 키르기즈 고대부족을 상징하는 40개의 태양광선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태양의 중심부에는 키르기즈스탄의 전통 유목가옥 유르트 (yurt)의 지붕모양이 그려져 있습니다.  


키르기즈스탄은 중앙아시아에 위치하고있으며 북쪽은 카자흐스탄, 동쪽은 중국, 서남쪽은 우즈베키스탄 및 타지키스탄과 국경을 맞대고있습니다. 수도는 비쉬켁 (Bishkek)입니다. (출처: UN)


서울에서 비쉬켁까지는약 4,414km이며 비행시간은 카자흐스탄이나 러시아등을 경유하여 약 9-10시간입니다. (출처: ZeeMaps)



개요

- 인구: 약 600만명

- 민족구성: 키르기즈인(66%), 우즈벡인(14%), 러시아인(11%), 고려인 (0.4%)등 80여개 민족

- 면적: 199,951㎢(한반도:220,000㎢)

- 언어: 키르기즈어(공식어), 러시아어(공용어)

- 종교: 이슬람교 (80%),러시아정교 (17%), 개신교 및 기타 (3%)

- GDP(2016): 65억불(세계 147위) / 1인당 GDP:1,077불 (경제성장률 3.8%)

- 주요 수출 산업: 금, 우라늄, 수은 등 원자재 산업 및 면, 양모, 육류, 담배 농산업   



공식적으로 키르기즈 공화국(KyrgyzRepublic)이라고 불리는 키르기즈스탄은 아름다운 자연 환경으로 유명한 국가입니다. 국토의 80%이상이 산악지대이며 대부분 해발 1000미터 이상으로 '중앙 아시아의 스위스'라고 일컬어 지기도 합니다.

키르기즈스탄의 명소 사리 체렉 (Sary Chelek) 호수. (사진 출처: Alexis Santraine)



키르기즈스탄 국가명의 유래는 옛 터키어로 ‘우리는 40’ 이라는 뜻의 ‘키르기즈’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는 키르기즈스탄의 민족적 영웅 ‘마나스 (Manas)’가 이끈 40개 부족이란 뜻입니다. (참고로 ‘스탄’은 옛 페르시아어로 국가라는 의미로 예를 들어 아프가니스탄은 ‘아프가니’ 사람들의 국가라는 뜻입니다). 마나스는 키르기즈 민족을 결집시켜 8-9세기 경에 중앙아시아를 지배했던 위구르 제국을 멸망시킨 전설의 용사로, 마나스 국제공항, 수도 비쉬켁의 마나스 광장, 필하모닉 국립극장 앞의 거대한 마나스 동상 등 마나스라는 이름을 키르기즈스탄 곳곳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나스 광장에 위치한 17m 높이의 거대한 마나스 동상 (사진출처: timetravelturtle)


마나스는 또한 키르기즈 민족의 구전 문학 중 가장 대표적인 서사시인 《마나스》의 주인공으로 50만 행을 넘는 이 방대한 서사시는 서양문학사의 대표적 서사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드Iliad》와 《오디세이 Odyssey》보다 약 20배 이상 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마나스 서사시 1000주년을 기념하여 유엔 (UN)은 1995년을 ‘마나스의 해’로 지정하기도 하였습니다. 마나스치(Manaschi)라는 구전자들에 의해 1000년 이상 구전되어 내려오다가 20세기에 이르러서야 서사시로 정리된 《마나스》는 마나스와 그 자손들의 영웅적 삶, 격정적 사랑, 쓰라린 음모와 복수, 거란족 등과의 격렬한 전쟁 및 장렬한 죽음 등의 줄거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키르기즈 민족의 역사, 문화, 풍속 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유물로 현재 유네스코의 세계무형문화재에 등록되어 있습니다. 민족주의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소비에트 공산주의 시기 동안 금지되기도 한 《마나스》는 전통적으로 키르기즈인들의 민족적 정체성의 지주 역할을 해온 문화자산으로서 키르기즈스탄 정부 및 중국 신장 지역의 키르기즈 소수 민족 지도자들은 《마나스》의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교과서 채택 및 연구소 설립 등의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MDklwoLf34

《마나스》를 읊고 있는 키르기즈스탄 어린이.《마나스》에 관한 유네스코 (UNESCO) 출처의 비디오 자료입니다. (출처: Youtube)



9세기 이후 약 200년 간 팽창을 거듭하던 키르기즈스탄은 12세기 경 몽골족에 의해 그 세력이 약해지면서 13세기 경 몽골제국에 편입되었고 18세기에는 중국 칭나라, 19세기 초에는 우즈벡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이 후 1864년에 러시아 차르 제국과 중국 청나라간의 타르바가타이 조약 (Treaty of Tarbagatai)에 의해  키르기즈스탄의 동쪽 지역이 러시아에 편입되면서 러시아에 대항한 많은 키르기즈인들은 남쪽의 타지키스탄 및 아프가니스탄으로 이동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어지러운 정세의 러시아 편입 시기에 키르기즈스탄의 또 다른 국민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탄생하게 되는데 바로 키르기즈스탄의 대표적인 여성 지도자 쿠르만잔-다트카Kurmanjan-Datka (1811–1907) 입니다.

쿠르만잔 다트카를 다룬 영화 Queen of the Mountains(2014)의 한 장면. 키르기즈스탄에서 보기 드문 대규모 예산의 영화로 2014년 몬트리올 국제영화제에 초청받으며 비평가들에게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쿠르만잔은 키르기즈스탄 남부 지역인 오쉬의 몬구쉬 부족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18세 때 다른 부족의 남성과 중매결혼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결혼 당일 혼인 상대자가 마음에 들지 않자 당시로는 파격적으로 남성중심의 이슬람 전통을 깨고 파혼을 선언하게 됩니다. 이 후 두 부족간의 관계를 완화시켜준 알림벡 다트카(다트카는 장군이라는 뜻의 칭호입니다)에게 사랑을 느낀 쿠르만잔은 그와 결혼하게 되는데 그녀의 이러한 면모와 용기는 훗날 키르기즈스탄 여성들의 인권 신장에 도움을 주는 모범 사례로 남아있습니다.  


남편이 죽고 뛰어난 협상 능력을 발휘하여 알라이 전 지역의 통치자로 인정받은 쿠르만잔의 괄목할 만한 또 다른 면모는1876년 알라이 지역이 강국 러시아 차르제국에 합병되는 시기에 키르기즈스탄인의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러시아와의 원만한 병합에 기여한 것인데, 특히 그녀의 아들이 러시아 제국에 항거하기 위한 밀수품 매매 및 러시아 군인 살인 혐의로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을 당시 그녀는 측근들의 무력 구명요청을 거절하여 지도자로서 부족들의 안위를 선택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의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서 어머니로서의 아픔을 뒤로 하고 부족 전체의 미래를 위했던 쿠르만잔에 대한 존경심은 현재까지도 키르기즈스탄 지폐에 그려진 그녀의 초상화를 통해 전승되고 있습니다.  

키르기즈스탄 50솜 (Som) 지폐에 그려진 쿠르만잔-다트카(Kurmanjan-Datka). 이슬람 국가의 화폐에서 보기 드문 여성 지도자의 초상화입니다. (사진출처: banknoteworld.it)



러시아 제국에 합병된 이후에도 키르기즈스탄의 여러 지역에서 크고 작은 항거는 계속되었는데 특히 러시아 군대의 징집에 반대하여 북동부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을 제압하고자 1916년 러시아 차르 제국은 약 10만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키르기즈스탄인을 대량학살하게 되고 이로 인해 많은 키르기즈스탄인들이 중국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 지역으로 이주해 현재까지도 중국의 56개 민족 중 하나를 이루고 있습니다.

중국 북서부에 위치한 신장 위구르 자치구 (Xinjiang Uygur Autonomous Region)는 위구르족, 한족, 카자흐족, 후이족, 키르기스족, 몽골족 등의 다양한 민족적 구성을 이루고 있습니다. 신장(新疆)은 "새로운(新 신) 영토(疆 강)”을 뜻하며 위구르(ئۇيغۇر)의 뜻은 위구르어로 "단결"과 "연합"을 의미합니다. (지도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중국 신장 지역에 거주하는 키르기즈스탄계 중국 소수 민족의 모습. (사진출처: chinatoday.com)  



한 동안 개별 자치구로 규정되었던 키르기즈스탄은 1936년 완전히 소련 사회주의 공화국(USSR: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으로 편입되었는데 소련의 지배기간 동안 수많은 유목민들이 새로운 토지 개혁과 집단 농장체제 하에 정착민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 기간 동안 많은 러시아인, 우즈베키스탄인, 슬라브인 등이 대거 유입되어 1989년 당시 키르기즈스탄의 수도였던 프룬제(현 비쉬켁)는 외국인이 60%이상 거주하였으며  22%정도만이 키르기즈스탄인으로 조사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높은 외국인 비율은 소련 치하의 키르기즈스탄의 경제와 사회 발전에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으나 1991년 8월 31일 독립 이후 많은 외국인이 이탈하면서 경제사정을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되기도 하였습니다. 1991년 10월 27일 물리학자이자 키르기즈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대통령을 역임했던 아스카르 아카예프 (Askar Akayev)가 독립국 키르기즈스탄의 초대 대통령이 되면서 키르기즈스탄은 개방과 시장경제로의 새로운 길을 걷게 됩니다.

8월 31일 독립기념날의 축제로 한창인 키르기즈스탄의 비쉬켁 (사진출처: travelcalendar.ru)



그러나 본래 러시아 중심 경제적 체제의 금, 수은, 우라늄과 같은 원자재 및 농산품 공급국이였던 키르기즈스탄은 러시아 관련 거래 물량의 급감, 새로운 시장으로 수출하기 위한 교통 인프라 및 정부의 지원 부족 등으로 인해 독립 후 1995년까지 계속 경제적인 고전을 면치 못합니다. 1996년부터는 토지개혁과 국영기업의 민영화, 쿰토르 금광의 성공, 호의적 기후로 인한 풍년 등으로 인해 경제 성장률 7%를 기록하고 1997년에는 10%를 달성하여 1998년 독립국가연합 (CIS: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 국가 가운데 최초로 세계무역기구 (WTO)에 가입하는 등 경제 발전을 향한 강한 의지를 내보입니다.                               

1998년 10월 키르기스탄의 WTO가입 서명 사진 (사진출처: WTO 홈페이지)



그러나 키르기즈스탄은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의 여파와 루블화 평가절하로 발발한 1998년 러시아 금융 위기로 인해 큰 경제적 타격을 받게 되고 1998년 경제성장률은 2%로 하락하게 됩니다. 이 후 꾸준히 해외 원조를 통해 농업 및 IT 산업, 도로 건설 등이 육성되면서 2003년과 2004년 7%의 경제성장률을 보였으나 2005년 총선 부정선거, 대통령 중심의 오랜 권력 세습과 부정부패 등에 반발한 민중봉기 ‘튤립혁명’이 발생되고 아카예프 대통령이 실각되는 복잡한 정세 가운데 국제 상품가격 상승 및 국내 원자재 생산 저조로 인해 2005년의 경제성장률은 -0.5%까지 하락하게 됩니다.

2005년 3월24ㄹ 발발한 튤립혁명에 참가한 시민들 (사진출처: AFP/Getty)


새롭게 임명된 쿠르만벡 바키예프(Kurmanbek Bakiyev) 대통령은 ‘과다채무빈곤국’ 지위를 신청하여 외채에 대한 부담감을 줄이고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러시아로부터 1.8억 달러의 외채를 탕감받고 새로운 20억 달러의 외채 유치 및 1.5억 달러의 전력 설비 원조를 받으며 경제 안정을 도모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튤립혁명에 앞장섰던 바키예프 대통령 또한 본인의 권력 강화를 위해 정부 요직에 아들 및 친인척을 앉히는 정실 인사와 부정부패를 감행하여 여론의 비판을 받았고 전력공급의 지속적 불안정, 고질적인 남북간 지역 갈등, 미군의 주둔을 반대하는 러시아와의 갈등과 이에 따른 러시아의 외채 지원 취소 등이 원인이 되어 결국 2010년 4월 두 번째 튤립혁명을 통해 바키예프 대통령 또한 실각하게 됩니다.



이 후 전직 외교장관 출신의 인기 여성 정치인 로자 오툰바예바(Roza Otunbayeva)가 과도정부의 임시 태통령으로 선출되고 두 달 후 6월 바키예프 대통령의 고향인 남부 지역의 오쉬에서 키르기스계와 우즈벡계 주민 간의무자비한 폭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바키예프 대통령을 지지하던 키르기스계인들은 우즈벡계인들을 등한시하던 바키예프 대통령의 실각에 압장선 우즈벡계인들과 무력 충돌을 벌였고 이 것이 크게 확산되어 다수의 키르기스계인들이 소수의 우즈벡계인들을 무차별 공격하는 대참극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로 인해 다수의 우즈벡계인들을 포함한 420명이 목숨을 잃었고 약 8만인들의 우즈벡계인 피난민들이 발생합니다.

2010년 민족 분규 이후 우즈베키스탄으로 피난 중인 우즈벡계 키르키즈스탄인들 (출처: REUTERS/Stringer)



2011년 11월까지 임시 대통령으로 과도정부를 이끈 로자 오툰바예바 대통령이 대선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함으로서 2011년 11월 키르기즈스탄 최초로 실시된 민주주의적 대통령 선거에서, 두 차례 총리를 역임한 바 있던 알마즈벡 아탐바예프(Almazbek Atambayev)가 63%의 득표율로 새로운 대통령으로 선출됩니다. 아탐바예프 대통령은 키르기즈스탄의 원활한 해외교역을 위해 2012년 한국을 포함한 44개국의 방문비자 면제를 승인하고 2013년 키르기즈 대통령으로는16년만에 한국을 방문하여  '대한민국 정부와 키르기즈공화국 정부간 무상원조를 위한 기본협정'을 체결하고 2017년에는 시진핑 주석을 회견하여 중국과의 경제 협력을 강화하는 등 민주주의를 기초로 한 키르기즈스탄의 경제적 발전과 외교에 공헌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2010년 4월부터 2011년 11월까지 대통령을 역임한 로자 오툰바예바와 2017년에 대통령 임기를 마친 알마즈벡 아탐바예프 (사진출처: Vladimir Voronin, AP)



중앙아시아 최초의 민주주의 대선에 이어 20017년 10월에는 중앙아시아 최초로 어느 한 후보에 세력이 몰리지 않는 공정 대선이 실시되었는데 이는 2010년 헌법 개정을 통해 기존 대통령이 6년 단임 후 대선에 재출마 할 수 없는 것이 큰 역활을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전 총리를 지낸 남부출신의 수론바이 젠베코프(Sooronbay Jeenbekov)가 가장 큰 경쟁자였던 북부 출신의 갑부 정치인이자 2011년 총리를 지낸 바 있는 오무르벡 바바노프(Omurbek Babanov)를 물리치고 키르기스 공화국의 5대 대통령에 오르게 됩니다. 젠베코브 대통령은 11월 말 공식 임기가 시작된 후 곧바로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을 방문하여 그 동안 문제가 되었던 국경 관리 문제를 해결하고 무역, 경제에 관한 협정문을 체결하는 등 이웃나라들과의 외교 강화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2017년 12월 카자흐스탄의 누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과 성공적으로 회견을 마친 키르기즈스탄의 수론바이 젠베코프(Sooronbay Jeenbekov) 대통령 (사진출처:The Astana Times)




유럽부흥개발은행 리포트에 따른 키르기즈스탄의 2018년 GDP예상 성장률은 4.2%로, 2017년 키르기즈스탄 최대 금광 쿰토르(Kumtor)와 관련한 키르기즈스탄 정부와 캐나다 광산 회사 간의 장기 소송문제가 해결되면서 금탄광 산업의 수출이 증가하고 2017년 한 해 러시아로부터의 송금이 26% 이상 증가하는 등 인근 국가의 해외 인력 송금 증가 및 통화 안정세로 인해 키르기즈스탄은 비교적 안정적인 성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앞으로 키르기즈스탄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키르기즈스탄의 고립된 산악 지역과 주변 지역 경제를 연결하는 교통 인프라 구축 완성 및 키르기즈스탄 내의 지역 격차를 해소하는 경제적 노력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또한 키르기즈스탄 내 대부분의 기업들이 중소기업인 만큼 중소기업 육성을 위해 복잡한 세금 절차의 간소화, 불필요한 관료주의의 타파, 민영화를 통한 안정적 전력 공급 등 정부 차원의 노력과 이를 뒷받침하는 금융산업의 개발이 필요한 실정입니다.  



아직 타지키스탄 (Tajikistan) 다음으로 중앙아시아에서는 1인당 GDP 1,077불 (세계 은행 2016년 자료)의 최빈국으로서 (참고로 중앙아시아의 최대 경제국인 카자흐스탄의 GDP는1인당 7,510불입니다.) 빈곤, 실업, 민족 분규 및 최근 증가하고 있는 이슬람 과격 세력 등 다양한 문제를 끌어안고 있지만, 소련 독립 이 후 몇 십 년간 동일한 정치 체제와 리더십을 경험하고 있는 인근 국가들과는 달리 중앙아시아 최초로 민주주의의 초석을 마련한 만큼 올바른 시민 정신을 바탕으로 앞으로 점차 나은 사회와 경제 발전을 이룩해가길 기대해봅니다.



저자 약력: 런던 소재 국제금융기구인 유럽개발부흥은행 (EBRD) 근무. 유럽,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 등EBRD의 27개 개발도상국 관련 업무 담당. 해외 투자 은행, 사모 펀드, 임팩트 펀드, 프랑스 OECD 근무.



<키르기스탄에 관한 흥미로운 또 다른 사실>

- 세계에서 2번째로 큰 염분 호수로 잘 알려진 키르기즈스탄의 이스쿨 호수는 겨울 동안 사방이 얼음임에도 불구하고 얼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는 바로 온천수와 소금때문이라고 합니다. 참고로 이스쿨 호수 지역의 겨울은 영하 10도까지 떨어지는 추위를 동반하지만 여름에 평균 25도 등으로 여행하기 좋은 날씨입니다.

중국과 접경지역에 위치한 티엔산맥의 진주라고 불리우는 키르기즈스탄의 이스쿨 호수 (사진출처: seen-places.com)


- 키르기즈스탄은 교육, 의료, 복지제도 무료 등 소련 사회주의 문화가 강하게 남아 있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약 70년 전 세계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와 파시즘에 대항하여 소련 공산군에 기여하여 승리를 이끌어낸 역할을 한 것에 대해 아직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러시아어가 공식언어 중 하나인 만큼 친러시아 성향이 강한 나라이나 자유 민주주의 영향 및 미국 정부의 적극적인 경제 및 교육 지원과 관련하여 미국과의 관계도 매우 중요시하며 영어 교육 장려에도 힘을 쏟고 있습니다.

키르기즈스탄을 포함한 중앙아시아의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매년 미국 정부에서 실시하는 미국 유학 장학제도 FLEX의 졸업생들. 전 포스팅 '키르기즈스탄에서 하버드까지'의 주인공 아이자다도 FLEX 출신입니다. (사진 출처: bradleyherald.org)   


- 키르기즈스탄 및 중앙아시아에는 1937년 스탈린에 의해 강제 이주된 약 50십 만명의 고려인들이 거주하고 있는데 고려인들은 대개 성실함, 높은 학구열과 적극적인 사회 기여로 키르기즈스탄 내에서 긍정적인 이미지를 쌓아오고 있습니다. 2005년 툴립혁명에는 고려인 언론인들이 변혁의 큰 주역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관련기사)

뛰어난 학업 성취 및 업무 능력으로 영국 정부 (Chevening) 장학생으로 선발된 키르기즈스탄 고려인 나디아 박씨가 한복을 곱게 입은 모습. 유창한 러시아어와 영어 실력으로 마나스 국제 공항의 금융 투자 분석과 인프라 개발 전문가로 활동했던 그녀는 영국에서 항공 교통 경영학 석사 과정을 이수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키르기즈스탄 관광청이 제작한 키르기즈스탄의 아름다운 문화와 경치를 영상으로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itNXU4Po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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