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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BFirefly Sep 10. 2020

인정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에서는 차별금지법 제정 시도가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불안정을 공개적으로 드러나게 만든 촉발제가 되었고, 성소수자는 그에 대한 저항으로 인정의 정치 또는 정체성 정치에 나서게 되었다. 성소수자가 경험하는 고용차별, 의료접근법, 사회보장권 등 구체적인 기회와 자원에 관계된 산적한 사안들이 있지만, 이 모든 싸움의 최전선에는 성소수자를 ‘있는 그대로’ 동등한 사람으로 인정하라는 요구가 있었다. 인정이 모든 것의 시작이기 때문이었다.  (김지혜, 창비, 2019, p.182)


마지막 문장 “인정이 모든 것의 시작이기 때문이었다”는 사람의 생각과 행동의 관계에서 중요한 원리 하나를 시사한다. 곧, 우리가 어떤 의미있는 변화를 일으키려면 많은 경우 그것의 전제가 되는 관념을 먼저 의식 속에서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내면에서 인정해야만 외부적으로 제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알콜 등에 중독된 사람, 이런저런 심리적 문제 있는 사람이 치유되려면 가장 먼저 자기에게 문제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듣는다. 어려워보이는 일을 앞두고 ‘나는 할 수 있다’라고 자기 암시를 하면 좋다는 조언도 같은 원리에 바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인정의 이러한 성격에 대해 몇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1.     인정은 이유 인정이다


강준만 교수는 <독선사회>라는 책의 한 장(“왜 우리는 ‘왜냐하면’에 쉽게 넘어가는가?”)에서 타인의 주장과 행동에 어떤 이유가 따라오면 더 쉽게 납득하는 인간의 습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유가 엉터리일 때조차 ‘왜냐하면’이라는 단어는 부탁을 수용하는 자동적이고 본능적인 반응을 사람들에게서 끌어낼 수 있”다고 저자는 기술한다. 그가 인용하는 비키 쿤켈이라는 학자도 이러한 경향이 인간의 “본능”이라고 말한다. (인물과사상사, 2009, p.28) 


이유는 이렇게 타인의 생각과 행동을 받아들이는 것에서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뒷받침하는 데에서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 같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라는 니체의 말도 이런 판단에 힘을 실어준다. 그리고 우리는 이 글에서 논의하는 인정이 바로 이러한 주관적인 ‘이유’라고 이해할 수 있다. 달리 말해, 인정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변화시키는 데 중요한 것은 그것이 생각과 행동의 이유로서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2.     인정은 진리 인정이다


때로 사람에게 자기가 하는 행동에 그럴듯한 이유가 반드시 있어야만 함을 일러주는 문장을 우리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책  <까라마조프 형제들>에서도 만나게 된다. 이 소설에서 이반 까라마조프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악마는 이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것이 허용된다’. 그러면 됐어요! 이 모든 게 멋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속이려고 한다면 왜 그걸 위해 도덕적 승인(진리의 승인)이 필요한 건가요? 하지만 그게 오늘의 우리 러시아인입니다. 그는 승인 없이는 속일 수도 없어요. 그는 정말로 진리를 사랑합니다.


여기에서 악마는 처음에는 이반 한 사람의 사고방식을 이야기하고, 이어서 그것을 “오늘의 우리 러시아인”에게 확대 적용한다. 그리고 그의 말이 적용되는 대상은 다시금 이 세상 사람 대부분으로 확대되어도 될 것 같다. 사실 우리는 거짓말을 할 때에도 그것을 참(진실, 진리)으로써 정당화하고 싶어한다. 


이반의 악마가 ‘진리’의 승인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 자체로 정확한 지적이면서 동시에 ‘속이는 짓’과 개념적으로 대조가 되는 수사적 효과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진리의 승인을 ‘어떤 이유로 정당화하는 것’으로 일반화해서 이해할 수 있으며, 동시에 이 이유가 우리의 ‘진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를 인정은 이유 인정이라는 생각과 연결시키면, 우리가 무엇을 인정하는 것은 그것을 우리의 진리로 삼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3.     인정은 재인정이다


포르투갈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가 하퍼콜린스 출판사의 <연금술사> 10주년 판본을 위해 2002년에 쓴 서문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사람이 우주로부터 받은 자신의 소명에 따라 살려고 할 때 마주치는 네 가지 장애물이 있다. 첫번째는 어렸을 때부터 ‘우리가 원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라는 말을 듣는다는 사실이다. 달리 말해, 어려서부터 부정적인 생각으로 세뇌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두번째는 ‘사랑’으로서 우리가 원하는 길을 감으로써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줄까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세번째 장애물은 우리가 가는 길에서 만나게 될 이런저런 실패와 좌절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장애물을 차례로 다 넘어선 사람이 마지막으로 마주치는, 가장 위험한 장애물은 “꿈을 이루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것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고, 한 걸음만 내딛으면 꿈을 실현할 수 있음에도 어리석은 실수를 저질러 목적지에 영영 도달하지 못하기도 한다.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하는 것은 마음에서 자신에게 꿈의 실현을 허용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여기에서 목표를 성취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을 꿈을 이룰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의문이 있다. 이 사람이 자기를 이러한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애초에 자아실현의 길을 떠나 1, 2, 3번째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 이 물음에 대한 적절한 대답은, 그가 처음에도 인정하긴 했지만 그것은 온전한 인정이 되지는 못했다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만일 이 사람이 목표지점을 눈앞에 두고 꿈을 이루는 두려움을 극복한다면, 이것은 자신을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다시’ 인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인정함으로써 처음에는 어렴풋하고 불완전했던 인정을 온전하게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삶에서 중요한 인정은 많은 경우 다시 확실히 해야하는 인정이다. 많은 경우 알콜 중독에 걸린 사람은 자기 문제를 명확히 인정하면서 치유 과정에 들어서기 전에 이미 자기에게 문제가 있음을 알고 있지 않을까? 위에서 언급한,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말하는 인정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사람도 의식 깊은 곳에서는 성소수자가 자신과 동등한 사람임을 희미하게나마 인정하지 않을까? 차별이란 그 대상이 조금이라도 나와 같음을 인정하기 때문에 오히려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이 미미한 인정이 차별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참다운 인정의 실마리가 되는 것일 것이다. 인정이란 많은 경우 재인정이라고 생각된다.


이 글에서는 우리의 말과 행동에 의미있는 변화가 있기 위해 전제되는 인정에 대해서 몇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보았다. 인정은 어떠한 앎과 이해와 정의(definition)로서 다른 인식 및 행동의 토대가 되는 특별한 힘이 있는 듯하다. 좀 거창하게, 그러나 거짓없이 말해 인간은 인정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인정에 대해 알게됨으로써 우리는 인간 자체에 대해 중요한 점을 배우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공부는 차별 등 중요한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데에도 도움을 줄 것이라고 믿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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